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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교촌리에서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벽돌무덤 확인

- 발굴현장 공개 6.7. 오전 11시 -


공주 교촌리 전축분 전경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의 허가를 받아 지난 5월부터 공주시와 함께 공주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고 있는 공주 교촌리에서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내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백제 시대 전축분(塼築墳, 벽돌무덤)이 발굴 조사되어 현장 공개와 설명회를 7일 오전 11시에 가진다.

* 발굴현장: 충남 공주시 교동 252-1번지

* 전축분(塼築墳): 벽돌로 널방을 만들고 주검을 넣은 무덤 


교촌리 3호분 전축분 노출



교촌리 전축분의 존재는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공주목조(公州牧條) 부분에 “향교의 서쪽에 무덤이 있는데, 백제왕릉이라고 전한다”라는 기록을 통하여 조선 시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촌리 3호분 전축분 북벽



그러나 교촌리 고분군이 일제강점기인 1939년 사이토 다다시(齊藤忠)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에 의해 발굴조사된 이후부터는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특히, 가루베 지온이 미완성 고분이라고 정의한 이후, 1971년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이 발굴 조사되면서 교촌리 전축분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상태였다.


석단시설 문양전



다행히 지난해 12월, 공주대학교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통하여 교촌리 전축분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또 다른 백제 시대의 전축분이 발견되어 80여 년 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교촌리 3호 전축분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내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 같은 터널형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무덤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이 모두 무늬가 없는 네모꼴과 긴네모꼴이며, 벽면은 벽돌을 가로로 쌓아서 만들었는데, 이는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는 다른 모습이라 주목된다. 


교촌리 산 정상부 석단 기초시설



발굴 조사단은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교촌리 전축분이 무령왕릉 축조를 위한 연습용의 미완성분인지, 아니면 백제 웅진기에 도입된 중국식 상장례 도입과 함께 수용된 전축분의 새로운 유형인지, 무령왕릉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 격의 무덤인지 등 해당 고분의 구체적인 성격을 검토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주향교 뒤쪽의 ‘교촌봉’ 정상부에서는 백제 시대 석축 단시설이 조사되었다. 1939년 조사를 통하여 2호 전축분이라고 정의하였으나, 이번 발굴조사 결과 전축분이 아니라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네모꼴의 석축 단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석축 단시설은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며, 주변에서 무령왕릉에서 나온 문양 벽돌과 같은 연화문(蓮花文) 벽돌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중요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지시대 교촌리 3호 전축분 노출



백제 웅진기에 만들어진 전축분은 그 사례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과 6호 전축분이 있다. 다행히 이번에 진행된 교촌리 3호분에 대한 재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전축분의 새로운 유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교촌봉’ 정상에서 조사된 방형의 석축 단시설을 통해 백제 시대 국가의 제례시설 존재를 함께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 성과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공주의 웅진기 왕도경관을 체계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 자세한 내용 설명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공주대학교 박물관(학예연구사 이현숙 ☎041-850-8733)으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0607 공주 교촌리에서 무령왕릉과 유사한 형태의 벽돌무덤 확인(붙임) (3).pdf



<송산리 6호분 등잔구멍>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기적적으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그 현실(玄室) 내부에서는 네 벽면에 모두 5군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발견됐다. 그 무령왕릉 바로 코앞에 식민지시대에 도굴 상태로 발견된 송산리 6호분이라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 역시 무령왕릉과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해 벽돌로 무덤 주체시설을 쌓은 소위 전축분(磚築墳)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구조 역시 그랬다. 하지만 6호분은 내부가 몽땅 도굴당한 상태라 그에서 건진 정보는 얼마되지 않았다.


이 6호분에도 무령왕릉과 같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현실 네 벽면에 있다. 숫자는 무령왕릉보다 2개가 많은 7개였다.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6호분 그 구멍도 비로소 기능을 둘러싼 베일을 벗었다. 


한데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 이 구녕을 무엇이라 했던가? 가장 그럴 듯한 설이 불감(佛龕)이라 해서 불상을 안치하는 시설로 봤다. 

하지만 이런 추정 혹은 주장은 무령왕릉이 미도굴 상태에서 발견됨으로써 개망신에 가까운 굴욕을 겪었다. 불감과는 전연 관계없는 등잔을 안치하기 위한 터널이었다. 


나아가 무령왕릉 등잔은 애초 그 발견 발굴 직후에는 비록 중국 수입제이기는 하나 이것이 한반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백자 출토례라고 대서특필되었다. 언뜻 백자로 보이나, 최근 정밀조사 결과 이것이 백자가 아니라 청자로 드러났다. 


<무령왕릉 등잔구멍> 


송산리 6호분 현실 구멍을 불감으로 봤다 해서, 무령왕릉 등잔을 백자로 봤다 해서, 우리는 그런 주장을 하고, 그것을 따른 사람들을 유사역사학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사역사학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나는 유사역사학을 누가 제대로 개념 규정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무령왕릉 발굴 이전, 나아가 그것이 발견된 이후에도 한동안 그것과 송산리 6호분을 둘러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설이 횡행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소위 강단 역사학이 공격하는 유사 역사학의 가장 큰 특징은 황당무계함이며, 이를 발판으로 삼은 허황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물론 그에 더해 강단역사학이 말하는 유사역사학은 정치성을 고도로 띤다는 말을 덧보태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송산리 고분군으로 볼 적에 첫째, 황당하기 짝이 없고 둘째, 정치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사역사학의 그것에 못지 않아, 무령왕릉 묘권(墓券)에서 그의 죽음을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崩)'으로 적었다 해서, 백제의 주체성, 나아가 한민족의 주체성을 말해준다 해서 그 의미를 허위 혹은 과대 포장한 이가 다름 아닌 강단역사학이라는 점에서 나는 도통 작금 통용하는 유사역사학과 강단역사학을 어찌 구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령왕릉 현실..북쪽에서 입구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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