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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1498

필사와 활자 우리의 활자가 대량인쇄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왕조실록처럼 달랑 5부에 교정용으로 한 두 부 더 찍는다 해도 많아 봐야 6-7부 정도 찍을 책까지 활자로 인쇄한 것은 왜 그랬을까? 필사보다 활자로 인쇄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어서 그랬을까? 필자 생각에는 활자로 5부를 찍는 것보다 필사를 하는 편이 실록 5부 만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숙련된 사람이 필사하면 활자로 찍는 것 못지 않은 속도가 났을 것이다. 실제로 왕조실록에는 활자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필사본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 도대체 왜 활자로 찍었을까? 필자 생각에는 이렇다. 교정을 위해서일 것이다. 5부를 찍되 교정은 한 장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장에서 오탈자 등 고쳐야 할 부분이 나오면 판을 엎지 않은.. 2024. 5. 1.
중국의 농경 양식을 거울처럼 비추는 요하 이동 위 그림을 보자. 근간 2019년인가 중국 쪽 고고학자들이 보고한 도작, 혼합, 잡곡 문명 유적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대략 초록색과 빨간색 점선 사이 지역이 도작과 잡곡이 함께 일어나는 혼합농경 유적지에 해당한다.  요하유역 인근을 보면, 북쪽은 모두 시뻘건 잡곡농경유적이되 요동반도 남쪽에 혼합농경과 도작 농경의 유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유적들이 산동반도 쪽에서 건너온 혼합 농경과 도작농경 유적들로서 이 흐름이 한반도로 들어와 평양 인근과 한강 유역 일대에서 북쪽에서 내려와 있던 잡곡 농경과 만나 한반도의 혼합농경이 탄생한 다음이 혼합농경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까지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쌀과 잡곡은 별개의 기원으로 이 둘이 만나 완성된 혼합농경이 된 곳은 한반도 북부와 중부.. 2024. 4. 30.
한국사와 중국 남북조 중국사에서 강남으로 이주가 본격 시작된 것은 동진 때부터로 안다. 그리고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남송 때부터로 알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화북지역 사람이 남쪽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화북은 잡곡농경, 화남은 도작농경 지역이며 그 사이인 회하 유역이 혼합농경지대에 해당한다. 동진과 남송이 강남으로 옮겨 간 후 다시는 화북과 통합되지 않고 동진과 남송이 계속 유지되고, 그 후 동진과 남송이 북벌과 고토회복을 계속 꿈꾸며 살았다고 치자. 그게 한국사다.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한국사는 잡곡농경지역과 혼합농경지역이 병존하고 있었는데 삼국통일 과정에서 잡곡농경지역이 이민족에게 함몰되어 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거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는 두 지역은 합쳐지지 않고남쪽 혼합농경.. 2024. 4. 30.
필자 근황 뭐 필자 근황이야 대부분의 사람에게 안물안궁이겠지만, 어차피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기록 삼아 써둔다. 필자가 요즘 하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전에 이야기한 대로 지금까지 해온 작업의 정리. 이를 위해 네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사실 그 네 번째 책 외에 고기생충 관련한 서적을 하나 더 준비하고 있어서, 내년 상반기에 하나, 하반기에 하나가 출판될 예정이다. 상반기에 나올 책은 서울대출판부, 하반기에 나올 책은 Springer 다. 둘 다 영문판이다. 영어판 아마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섯 번째 책까지 나가면, 대략 필자가 지금까지 벌여온 작업의 정리는 거의 다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리 작업을 하면서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일은, 역시 이 블로그에 자주 쓰고 있는.. 2024. 4. 30.
사슴과 꿩: 돼지와 닭의 대체재 역사적으로 사슴과 꿩은 돼지와 닭의 대체재로 기능했다. 사슴과 꿩이 풍부하게 잡히는 사회에서는 돼지와 닭 사육이 흔하지 않았다. 유적에서 사슴 뼈가 많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돼지뼈가 없다. 반대로 돼지뼈가 많으면 사슴뼈가 없다. 날짐승은 경우 꿩이 많으면 닭이 없다. 닭이 많으면 꿩을 들에서 얻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사슴과 꿩이 많이 잡힌다는 이야기는 인구밀도가 높지 않은 황무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 previous article ***  부여 고구려 문명의 기초로서의 잡곡 농경 2024. 4. 29.
부여 고구려 문명의 기초로서의 잡곡 농경 우리는 한국사에서 도작 이전의 잡곡농경을 매우 저평가하면서도부여와 고구려 문명이 한반도 남부보다 빨리 일어났다는 점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것 모순이 아닌가? 부여 고구려 문명은 고구려의 남천 이전에는 도작에 기반한 적이 없으며남천 이후에도 한강유역을 획득하기 전에는도작이라는 것의 맛을 제대로 보았을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결국 부여 고구려 문명은 남만주-한반도 북부 일대의 잡곡농경에 기반한 문명일진대, 이는 사실 쌀만 제대로 된 곡식으로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생산성에 의문을 가질지 모르나, 사실 찬란한 황하문명도 바로 조, 수수, 기장에 기반한 잡곡문명이었다는 점을 하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본다. 여기 여러 번 쓴 것 같지만, 도작문명과는 별개의 잡곡문명권을 도작문명사 만큼이나..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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