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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고려군은 나노리名乗り를 했을까?

by 초야잠필 2024.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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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리名乗り라는 것이 있다. 

일본사에서 흔히 보는 것으로

무장들이 서로 싸우기 전에 자기 관등성명을 대는 것이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공명을 높일 수 있고, 

져도 지는대로 싸우다 죽었다고 알릴 수 있으므로 

전장에서 꼭 필요한 의례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적인 의례같지만, 

일본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역사상의 나노리는 

한국과 관련이 있다. 

바로 성왕의 아들 부여창이 고구려군과 다툴 때 서로 나노리 하는 장면이 나온다. 


겨울 10월 庚寅 초하루 己酉 百濟 왕자 여창餘昌(明王의 아들 威德王註 001이다)이 나라 안 모든 군대를 내어 高麗國을 향했는데,註 002 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餘昌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빈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騎, 징을 꼽은 자鐃자는 자세하지 않다 2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餘昌이 “姓은 (高麗 왕실과)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 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百濟는 高麗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高麗軍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때 百濟軍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高麗王註 003을 東聖山註 004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일본서기 흠명기 [553년] 국사편찬위) 


위에 부여창과 고구려 장군은 명백히 나노리를 주고 받고 있다. 이러한 전통이 헤이안시대 이후 일본의 나노리에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반도에도 매우 이른 시기에 무장들 사이에 나노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고려거란전쟁이라는 사극이 인기인 모양인데,

이때 고려는 전장에서 나노리를 했을까?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고려와 몽골의 일본 원정 때

일본의 장수들이 처음에 려몽 연합군 상대로 나노리를 하려다가 그딴 것 없이 공격하는 려몽군에 맞아 죽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몽전쟁기에는 고려에는 이미 나노리 따위는 없어진 모양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시 나노리가 사라진 것은 대략 언제 부터였을까?

이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 같아 한마디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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