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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골동상이 가져와 구입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국보 청자

by taeshik.kim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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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번듯하게 독립건물채를 갖추고 자리를 잡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이런 대학부설 박물관은 김활란의 꿈이었다. 그는 왜 이리 박물관에 집착했을까?

 
1946년 4월 1일, 인천시립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만 27세에 그 초대 관장으로 복무한 이경성은  1954년 3월 31일, 36세에 그곳을 사임하고서는 활동 무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긴다. 

그 자신의 이력서에는 이 무렵 홍익대 연세대 한양대 서바벌예대, 수도여사대, 덕성여대를 전전한 보따리 강사 시절로 묘사하거니와, 이로 보아 무슨 뚜렷한 대안이 있어 관장직을 사임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왜 사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회고록에는 거의 드러나지 아니하는데,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강하게 준다. 

이러한 세월 속에서 인천이 고향인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벌일 수 있었는데 서울에 있던 친구들이 그만큼 인천을 위해 봉사하였으면 되었지 그만 올라와서 전국적인 바탕에서 일을하고 미술 평론가로서의 길을 시작하라고 권고하기도 해서 마침내 10년 동안 있던 인천시립박물관을 1954년 36세에 사임하였다.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시공사, 1998. 2, 51쪽) 

그런 그의 삶을 바꾸게 된 일이 일어난다. 

(보따리 장사로서의)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던 1년 후 1956년 어느날 나는 우연히도 거리에서 골동상 장규서를 만났다. 그는 인천시립박물관 시절에 작품을 대기도 하여 가까이 지내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대에 박물관을 만드는데 와서 도와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며칠후 장규서와 더불어 이대에 간 나는 김활란 총장과 방용구 교무처장을 만나게 되었다. (상게서 55쪽)

이 면담에서 김활란이 이경성을 좋게 봤는지, 이내 예술대학 조교수로 발령받음과 동시에 박물관 참사를 겸직하게 된다. 

내가 이대 조교수 겸 이대 박물관 참사가 된 것은 1956년 38세 때였다. 첫 번째 면접에서 나는 카톨릭 신자이니 채플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하여 두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만든다 하니 그것이 끝나면 내가 이미 강사로 몸을 담고 있던 홍대로 옮긴다는 것을 밝혀 두었다. (상게서 55쪽)
 

이화여대박물관 도자실. 최근 재개관했다는데 그 직전 모습이다.

 
당시 이대 박물관이 있기는 했지만 전쟁통에 피해가 막대한 여파가 있던 때라 본관 아래층에 작은 진열실 형태로 있었으니, 그 개관 준비단으로는 이경성과 장규서, 그리고 서무 담당 여직원 셋으로 꾸려졌다. 이경성은 유물 대장과 카드를 만드는 일을 했고 장규서는 유물 수집을 담당했다. 

그는 매일 11시쯤 되면 출근했는데 반드시 보자기에 싼 골동품을 직접 손으로 나르곤 하였다. 물론 사전에 김활란 박사와의 의논 끝에 수집했지만 어떤 때는 별안간 문화재를 가지고 와서 보여 드리고 수집을 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장안의 사람들은 장규서 씨를 이대를 상대로 해서 장사한다고 흉보는 사람도 있었으나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본 나로서는 이해 관계를 떠나서 김활란 박사를 도와 좋은 박물관을 만들려는 열의가 앞선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59쪽)

이경성을 김활란과 연결해 이대 조교수로 만들어 준 골동상 장규서. 그에게 김활란은 큰손이었으니, 자기랑 맞은 이경성을 갖다 놓아야 여러 모로 이대 사업을 하기 좋겠다는 계산기를 두들겼을 것이다. 왜? 장사꾼이니깐. 
 

순화4년명 청자 호

 
1957년 어느날 장규서 씨가 가져온 작품 중에서 놀란 것은 순화 3년의 銘이 있는 항아리(순화4년명호淳化四年銘壺 보물 237호)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수리가 된 작품으로서 기년이 있는 고려청자로는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것이었다. 이것 역시 일본 사람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해방과 더불어 거리에 흘러 나왔고 그것을 6.25전쟁 때 서울 수복 후 청계천시장에서 수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수집한 작품 중에는 보물 416호로 지정된 청자투각돈, 보물 644호로 지정죈 백자청화송하인물문호, 보물 645호로 지정된 백자철화용문호, 그리고 국보 107호로 지정된 백자철화포도문호 등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명품들이 있었다. (59쪽)

작금 이화여대박물관이 자랑하는 이른바 명품들은 모조리 이 시절에 골동상 장규서 씨 손을 타고 흘러들었음을 본다. 

김활란은 왜 이리 박물관에 집착했을까? 또 장규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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