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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인태(金仁泰)

by taeshik.kim 2018.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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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용태(龍泰)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아버지가 즉위하자 각간이 됐고, 백제를 멸하고는 그곳에 진주했다. 고구려 정벌전쟁에는 장군으로 출전했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龍春公) 전 : (용춘의) 서자 5인 중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은 대씨(大氏)가 낳았다. 용귀(龍貴)는 미생공의 딸 매생(梅生)이 낳았다.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은 비보랑공의 딸 홍주(紅珠)가 낳았다. 서녀 18인 중 용산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을 섬겨 인태(仁泰) 각간을 낳았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2년(655) 봄 정월에…고구려가 백제ㆍ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으므로,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3월에 당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7년(660)...9월3일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써 사비성(泗城)에 남아 지켰는데,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천 명으로써 그를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ㆍ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에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 중지(中知) 등이 그와 함께 갔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 7년(667) 가을 7월에…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고 요동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 황제가 대아찬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는데, 왕은 [일원에게] 명하여 칙명을 왕궁의 뜰에서 받도록 하였다. 대나마 즙항세(汁恒世)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를 따라, 또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다. 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를 따라, 또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다. 8년(668) ...6월...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ㆍ흠순ㆍ천존ㆍ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ㆍ개원ㆍ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과 죽지를 경정(京停)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ㆍ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9월21일에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을 보내 영공을 찾아 뵙고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ㆍ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갔는데, 인태ㆍ의복ㆍ수세ㆍ천광ㆍ흥원 등도 수행하였다.


삼국사기 권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1년(671)…가을 7월에 대왕이 답서에서 말했다. 『…현경(顯慶) 5년(660)에 이르러…선왕께서는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상의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역시 아우 인태(仁泰)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후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웅진]부성(府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에워싸 지키니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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