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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대물大物 이야기] 거근巨根의 창시자 노애嫪毐 (3) 김치양의 대선배

by taeshik.kim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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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나저네나 죽기만 기다린 아버지 소양왕이 재위 56년 만에 죽자 그 아들로 다음 보위를 이을 재목으로 점지된 태자 안국군이 즉위했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다 기쁨에 계워 그랬는지, 그는 재위 불과 1년 만에 죽고마니, 이를 효문왕孝文王이라 한다. 

다음 보위는 당연히 자초 몫이었다. 안국군 아들로 볼품 없다 해서 조나라에 인질로 던져졌지만, 장사꾼 여불위가 장래를 보고 대투자를 감행한 안국군 아들 그 자초子楚 말이다.

죽은 뒤 그를 높여 장양왕莊襄王이라 하니, 그가 바로 시황제 아버지다. 

자초는 왕이 되고 나서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해준 화양왕후를 화양태후로 높이는 한편, 그를 진짜로 낳아준 엄마 하희夏姬는 하태후라 해서 높였다.
 



다음으로 자초는 기원전 249년, 즉위와 더불어 자신을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한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는 한편 문신후文信侯라는 이름으로 높여주고, 낙양雒陽 10만 호를 식읍으로 내리는 대파격을 단행한다.

낙양 10만 호 세금은 너가 거두어 일부는 중앙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네 맘대로 먹고 살아라 한 것이다. 

하지만 자초 시대 또한 오래 가지는 않았으니,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이것이 여불위로서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자초가 오래 보위에 있었으면, 거기서 다 뽑아먹고 그 자신도 호화롭게 일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지만, 역사는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장양왕 자초 뒤를 이어 그의 태자 태자 영정[政]이 즉위하니, 그 스스로가 나중에 장년이 되고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중국 역사상 첫 황제라 해서 시황제라 일컫게 되는 걸물이다. 

하지만 이때 영정은 너무 어렸다. 그래서 태후가 섭정을 했다. 어느 태후가 섭정을 했는지는 지금 당장 내가 확인을 못하겠다.

암튼 영정 등극과 더불어 여불위는 상국相國으로 한 단계 더 격상하고 중보仲父라 일컬었다. 이 중보라는 표현은 보통 태자보다는 더 높은 대접을 받는다. 그가 얼마나 극진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진정 생모인 조 태후는 계속 남몰래 여불위와 사통했다 한다. 이 무렵 한창 주가를 올린 여불위는 식객들을 불러모아 여씨춘추하는 책을 완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라, 또, 진정이 장년이 되었는데도 조태후는 음행을 그치지 않았으니, 툭하면 여불위를 불러댄 모양이다.

이 무렵이 되자 여불위도 위기감을 갖기 시작한다. 이때 일을 여불위 열전은

여불위는 일이 발각되어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 음경이 큰 사람인 노애嫪毐를 사적으로 구하여 사인舍人으로 삼아 때때로 광대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한편 노애한테는 음경에다가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걸고 걷게 함으로써 조태후가 이를 듣게 함으로써 태후를 꾀어내고자 했다. [呂不韋恐覺禍及己, 乃私求大陰人嫪毐以為舍人, 時縱倡樂, 使毐以其陰關桐輪而行, 令太后聞之, 以啗太后.]

역시 대물은 과부를 일으키는 모양이다. 이 공작에 태후가 마침내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수레바퀴를 매달아도 끄떡없는 고려 천추태후의 남자 김치양, 그 출전은 바로 이 사기 여불위 열전이다.  

이 대목을 여불위 열전은 조태후가 그 소문을 듣고는 과연 은밀히 노애를 얻고자 했다. [太后聞, 果欲私得之.] 라고 묘사한다. 
대물왕 노애가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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