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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대물大物 이야기] 거근巨根의 창시자 노애嫪毐 (2) 도로아미타불 될 뻔한 여불위

by taeshik.kim 2024.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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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여불위는 만세를 불렀다.

 
진秦 소왕昭王은 재위 50년에 왕기王齮라는 사람을 사령관으로 삼아 조趙나라 서울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했다. 이에 다급해진 조나라에서는 진나라 인질로 한단에서 생활하던 자조子楚를 죽여 복수하고자 했다. 

더 다급해진 쪽은 여불위였다. 공들인 노력이 하루아침에 거품이 될 것을 우려한 그는 다시금 뇌물을 동원해서 조나라 관리들을 구워 삶아 겨우 자초를 탈출케 하고는 진나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자초나 그의 후견인 여불위한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여불위의 경우는 하마터면 개털될 뻔한 투자를 톡톡히 본전 뽑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국시대 말기쯤 대략의 칠국 지도인데 늘 이야기하듯이 혁명은 항상 주변부 비주류 몫이다. 저 서방 촌넘 진나라 친구들이 세상을 갈아엎어 버리기 때문이다. 진과 국경을 접한 한 위 조 3국은 본래 한 집안으로 晉이었다가 세 개 유력 가문이 농가 먹기 해서 저리 되어 나중에 다 먹히고 만다. 춘추시대 최강국은 晉이었다.

 
한단에 남은 자초의 처자식까지 안전을 보장케 하는 데 성공하고 자초와 함께 진나라로 들어간 여불위는 마침내 자초를 태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 대목을 사기 여불위 열전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진 소왕 56년, (왕이) 훙薨하자 태자 안국군이 즉위해 왕이 되고 화양부인은 왕후가 되고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이리 되자 진나라를 두려워한) 조나라 역시 자초의 부인과 아들 영정[政]을 받들어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秦昭王五十六年, 薨, 太子安國君立為王, 華陽夫人為王后, 子楚為太子, 趙亦奉子楚夫人及子政歸秦. 

이에서 보듯이,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애초에는 여불위의 여인이었던 자초의 부인은 이미 한단에서 아들 진영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훗날 진 시황제라 일컬어지는 걸물이다. 

여불위 열전은 시종 시황제가 자초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아들이라 했지만, 이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진 왕조를 대체해 일어난 한漢 왕조에서는 그 건국이 정당했음을 선전해야 했으니, 보통 이럴 때 현재의 왕조가 전 왕조를 비판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식이 해당 전 왕조 왕은 그 왕조 핏줄이 아니라 다른 놈 씨다 라는 수법이니, 고려왕조를 타도한 조선 왕조 역시 이 수법을 동원해 그 쿠데타 정당성을 홍보했다. 

그렇다고 그 진실 여부를 가리고자 DNA 검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혹 모르겠다.

훗날 여산 시황제릉이 발굴되고 그에서 시황제 뼈다구라고 건지며, 또 그에서 DNA를 추출할 수 있다면야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이때도 부대 조건이 더 따라야 하는데 첫째 여불위 뼈를 찾아야 하고, 둘째 자초의 뼈도 같이 찾아서 비교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는 DNA 검사가 아니다. 요는 그렇게 기억이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왜? 거기에 바로 그런 기억을 남긴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있는 까닭이다.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진은 그저고만한 왕조 중 하나였다. 저 촌넘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저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지금의 서안, 장안을 점령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혼동한 많은 역사학자가 DNA 검사라는 유혹에 이끌려 역사를 오도하는 짓을 일삼는다. 이 DNA 유전학 검사가 역사학의 본령이나 된냥 그것이 고등비판이며 사료비판이라는 허울에 이끌려 그것이 역사학도의 바람직한 자세라는 개사기를 쳐가며 말이다. 

묻는다. 역사학자는 CSI인가 심령술사인가? 나는 역사학도는 후자로 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여불위는 하마터면 진짜로 개털될 뻔했다. 그렇게 투자한 자초가 하마터면 개털될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초가 간난 끝에 귀국해서 태자에 책봉되고 그 아버지가 즉위한지 불과 1년 만에 훅 가버렸기 때문이다.

1년이라도 늦게 귀국했더라면 진짜로 여불위는 다 날릴 뻔했다. 

한데 천만 다행으로 자초 아버지가 왕이 되자마자 죽어버려주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겠는가? 곧바로 죽어주니, 이제 여불위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나라에 의한 조나라 한단 공격은 진짜로 여불위한테는 축복 중의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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