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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athology

서울 사대문 안 지하의 비밀 (6)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육조거리. 서울역사박물관 디오라마.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양편에 중앙 정부 관청들이 배치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조선왕국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이다. 




광화문쪽에서 육조거리를 바라본 장면. 서울역사박물관 디오라마. 

광화문 궁장아래에서도 기생충란이 나왔다.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파괴된 후 대원군때 다시 중건되기전 까지 기간 동안 퇴적된 기생충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기생충란은 발굴 현장 아무곳에서나 발견되지는 않는다.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짐작되는 지역, 행정치소 등의 유적에서 기생충란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기생충란이 많이 보이는 곳에서도 아무 구역이나 파면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나올 만한 곳에서 나온다


아래 예를 보자. 





이 유적지는 창녕화왕산성 발굴현장이다. 여기서는 산성 안의 연못자리에서 기생충란이 많이 나왔다. 




산성 안 지표면을 흐르던 유수가 이 연못자리로 모여 고여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실 이는 나올 만한 곳에서 기생충란이 나온 것이다. 


아마 이 산성 안에는 한때 많은 사람이 살았을 테고 그들 중 많은 이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대변을 통해 배출된 충란이 토양에 섞였을 것이다. 이때 많은 비가 오게 되면 이 충란과 오물은 산성 낮은 곳에 위치한 이곳 저수지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저수지 바닥면 지층에서 발견된 기생충란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유적지에서 이런 상황을 확인되지는 않는다. 


곳에 따라서는 나올 만한 곳, 그렇지 않은 곳 할 것 없이 인근 지역이 몽땅 기생충란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곳이 있다. 예를 들어 백제 최후 수도 사비성이 그렇다. 


사비성 안 유적은 지금까지 우리가 몇 곳을 조사했는데 그중 많은 곳에서 충란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유적지 특징 중 하나는 위에 서술한 것처럼 나올 만한 특정 지역에 충란이 선택적으로 발견되지 않고 여기저기 구별없이 발견되는 비특이적 분포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경우라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황이 있다. 


바로 홍수다. 


홍수 때문에 도성 일대가 범람한 물이 휩쓸고 지나가며 이때 도성 곳곳에 자리잡고 있던 분뇨 구덩이에 쌓여 있던 오물이 평상시라면 오염되어 있지 않았던 지역까지 퍼져 나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구역에서도 충란이 발견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왼쪽 그림이 백제 사비성 (부여) 지도. 사비성은 조사 구역 대부분에서 충란이 발견되었고 그 분포도 특정구역에 국한되지 않는 비특이적 양상을 보였다. 우리는 이것을 사비성이 반복적으로 홍수 피해를 당했던 증거의 하나로 본다. 후술 하겠지만 사비성 곳곳에는 용도 불명의 오물 구덩이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화장실일 수도 있다) 홍수때 마다 이 오물구덩이나 변소에서 흘러나온 오물이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위 그림 A에서 검은색 화살표는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사비성 내 하천의 흐름이다. 빨간색 점이 우리가 기생충란을 발견한 유적이 위치 한 곳이다. 파란색 점이 아마도 당시 백제인이 홍수를 방어하기 위해 저수지를 인공적으로 조성했을 것이라고 보는 지역이다. 사비성이 반복적으로 홍수피해를 당했고 이를 막기위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고고학적으로 어느정도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림은 심상육 선생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자 이제 서울로 다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서울의 충란 오염 상황이 바로 홍수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상황과 아주 유사한 패턴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조거리 한복판에서도 기생충란이 발견되는 이러한 상황은 당시 서울을 습격한 반복된 홍수 때문이었을까? 


기호철 선생은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성민에게 인분 오염물의 접촉 가능성을 한층 높게 한 것은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 빈발한 홍수였다. 한성부 사대문 안은 조선후기 인구가 급증하고 늘어나는 토사가 청계천 등 하천의 순조로운 흐름을 막으면서 폭우 때마다 잦은 수해를 경험하였다. 홍수 때문에 사대문 내 민가가 자주 표몰漂沒되었으며 홍수가 끝난 후에도 수몰된 지역은 토사로 뒤덮이기 마련이어서 홍수로 토사가 한성부 내 여러 구역을 뒤덮은 일이 당시 기록에서 많이 보인다. 


18세기 중엽에는 도성 인구가 증가하여 산림을 훼손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산사태가 빈번하여 하상河床 퇴적이 가속화되어 범람이 잦아지게 되었는데 이때문에 청계천 물이 궁궐 일대로 역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상황에 대한 영조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홍봉한이 아뢰기를, “소신이 심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성 안 의 모든 교량이 다 막혀 큰물이 지면 도성 백성이 휩쓸릴 우려가 있으니 반드시 준설하여 통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궐의 연못과 교량도 많이 막혔다. 이는 산에 나무를 기르지 않아서 그렇다. 대체로 도성 안의 인민이 너무도 많다고 할만하다. 육조거리는 예전에 인가를 짓지 못하게 하던 곳인데, 지금은 인가가 많다. 종로 앞길이 이처럼 되풀이되니 기강이라는 것을 도무지 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홍봉한이 아뢰기를, “들어선 인가를 헐어 내야 합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헐어 내면 어찌 잔인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홍봉한이 아뢰기를, “준천(濬川)하는 일은 온 도성과 삼군문(三軍門)의 인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준천을 하더라도(파낸 흙은) 어디에 두겠는가. 전부터 있던 골칫덩이에 새로운 골칫 덩이를 더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홍봉한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으로(파낸 흙은) 천변 좌우에 쌓고 산에는 나무를 심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에 실시할까요?”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풍각(觀豐閣) 근처가 전에는 막히지 않았는데 지금은 모두 막혔다. 이는 필시 응봉(鷹峯)의 토사가 흘러내려 그런 것이다. 옛날 ‘말을 타고 광통교(廣通橋) 아래로 오간다.’는 말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홍수가 나 범람하더라도 꼭 물에 잠길 우려는 없었고, 외적이 침입하여 도성을 수공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큰 물줄기라면 배가 살곶이[箭串]까지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물을 대어도 흥인문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지금의 상황을 보자면 노량진은 태반이 막혀 모래사장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홍봉한이 이르기를, “수구문도 메워져 물이 청량교(靑梁橋)로 빠져나가지 못하니, 고인이 된 참판 이중협(李重協)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오간수문에 시신이 걸려 건져냈습니다.”라고 하였다."


특히 위에서 청계천에서 빠져 죽은 사람이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고 궐내의 물이 청계천으로 흘러나오는 오간수문에 시신이 걸렸다고 말한 것은 중요하다. 이는 곧 큰물이 지면 하수구인 오간수문으로 청계천 물이 궁궐로 역류하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홍수로 역류하여 침수된 도성 일대가 토사로 뒤덮이면 도성 내 어딘가에 모여 있던 인분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기왕의 고기생충학적 연구에서 조선시대 사대문 안 육조거리 등 많은 사람의 통행이 있었을 지역의 토양에서 기생충란이 많이 발견되었던 사실(Shin et al., 2011b: 3555-9)은 홍수로 말미암은 기생충란의 지리적 확산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사실 별로 없다. 


서울의 경우 주요 큰길은 소설군(掃雪軍)이 있어 눈을 치우고 길을 청소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당시 육조거리를 비롯한 대로에 똥이 많이 버려져 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 도성 안 토양은 기생충란 오염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리라 판단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도성 내 거주민에 있어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을 증가시키는데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당시 홍수로 흘러내려 청계천을 막아버린 토사 양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다. 


다음은 승정원일기 영조 24년 5월 9일조 기사다. 


上曰, 自東門來時, 歷見鍾在處乎? 彦儒曰, 見之矣。上曰, 其鍾埋土幾許? 彦儒曰, 埋一尺許。而問其埋土之由, 則鍾在渠邊, 每當潦水, 爲水所沈, 而埋於土中云矣。


이 기사는 영조 당시 보신각 종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종이 토사에 1척이나 묻혀있다고 한다. 그 연유를 물은 즉 개천도랑이 매번 넘을 때마다 침수되어 그 토사 때문에 파묻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 




서울역사박물관 디오라마. 가장 앞에 있는 건물에 보신각종이 있다. 보신각 종에서 가까운 개천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종이 토사에 파묻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