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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요사遼史 소배압蕭排押·소항덕蕭恆德(소손녕蕭遜寧) 형제 열전

by taeshik.kim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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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배압蕭排押은 자가 한은韓隱이다. 국구國舅 소부방少父房의 후손이다. 지략이 많았고 말을 잘 탔다. 

통화統和 초년(983)에 좌피실상온左皮室詳穩이 되어 조북阻卜 토벌에 공을 세웠다.

통화 4년(986)에 송나라 장수 조빈曹彬과 미신米信의 군사를 망도望都에서 깨뜨렸다.

무릇 군대와 관련한 일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매번 결정에 참여하였다.

조금 지나 영흥궁永興宮 몫의 규糾와 사리舍利와 예랄拽刺과 이피실二皮室 등의 군대를 총괄하여 추밀사樞密使 야율사진耶律斜軫과 함께 연산燕山 서쪽 지역 함락되었던 고을들을 수복했다.

이해 겨울에 송나라를 칠 때 선봉이 되어 만성滿城을 포위 공격하여 소속 군대가 먼저 성에 올라가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로 바뀌었다.
 



위국공주衛國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동정사문하평장사同政事門下平章事가 더해졌다.

통화 13년(995)에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의 선휘사宣徽使를 역임하면서 조목조목 당시 정치의 잘잘못과 부역법賦役法에 대해 말씀 올리자 황제가 가납하였다.

통화 15년(997)에 정사령政事令이 더해지고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옮겼다.

통화 22년(1004)에 다시 송나라를 공격하면서 발해渤海의 군대를 거느리고 덕청군德淸郡을 함락했다.

뒤에 소달름蕭撻凜이 죽자 남쪽 지역의 일을 전담하었다.

송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자 북부재상北府宰相이 되었다.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할 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길을 통해 진격하여 개경 서쪽 고개에 격파하고 수천 수급을 베었다. 고려왕 순詢[고려 현종]이 두려워하며 평주平州로 달아나자 소배압이 개경에 들어가 크게 약탈을 하고 돌아왔다.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난릉군왕蘭陵郡王에 봉하였다.

개태開泰 2년(1013)에 재상으로 지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使 일을 보았다.

개태 5년(1015) 동평왕東平王이 되었다.

소배압은 정사가 너그럽고 여유로우면서도 잘 결단하여 각 부족이 어려워하면서 사랑하여 백성들이 풍요로워지자 당시 여론이 좋게 평하였다.

개태 7년(1017)에 다시 고려를 쳐 개경까지 진격하자 적들이 달아나 무너졌다. 군사를 풀어 마음대로 포로를 잡고 약탈하
게 한 뒤 돌아오다 다하茶河와 타하陀河를 건너려는데 적들이 양쪽에서 활을 쏘니 소배압은 갑옷과 병장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이 일로 관직에서 면직되었다.

태평 3년(1023)에 다시 빈왕豳王이 된 뒤 훙서하였다.

아우는 소항덕蕭恆德이다.


12 蕭排押,字韓隱,國舅少父房之後。多智略,能騎射。
13 統和初,為左皮室詳穩,討阻卜有功。四年,破宋將曹彬、米信兵於望都。凡軍事有疑,每預參決。尋總永興宮分糾及舍利、拽刺、二皮室等軍,與樞密使耶律斜軫收復山西所陷城邑。
14 是冬,攻宋,隸先鋒;圍滿城,率所部先登,拔之,改南京統軍使。尚衛國公主,拜駙馬都尉,加同政事門下平章事。
15 十三年,歷北、南院宣徽使。條上時政得失,及賦役法,上喜納焉。十五年,加政事令,遷東京留守。二十二年,復攻宋,將渤海軍,下德清軍。後蕭撻凜卒,專任南面事。宋和議成,為北府宰相,聖宗征高麗,將兵由北道進,至開京西嶺,破敵兵,斬數千級。高麗王詢懼,奔平州。排押入開京,大掠而還。帝嘉之,封蘭陵郡王。開泰二年,以宰相知西南面招討使。五年,進王東平。排押為政寬裕而善斷,諸部畏愛,民以殷富,時議多之。
16 七年,再伐高麗,至開京,敵奔潰,縱兵俘掠而還。渡茶、陀二河,敵夾射,排押委甲仗走,坐是免官。
17 太平三年,復王豳,薨。弟恆德。



소항덕蕭恆德은 자字가 손녕遜寧이다. 담략이 있고 모사에 능하였다. 통화 원년(983)에 월국공주越國公主한테 장가들어 부마도위가 되었고 남면임아南面林牙로 옮겨졌다.

선휘사宣徽使 야율아몰리耶律阿沒里를 따라 고려를 정벌하고 돌아와 북면임아北面林牙로 옮겨졌다.

이때 송나라 장수 조빈과 미신이 연 지역을 침공하자, 야율휴가耶律休哥가 소항덕과 군사 관계 일을 상의하였는데 크게 믿음을 사 동경유수로 옮겨졌다.

통화 6년(988)에 황제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사퇴沙堆를 포위했을 때 소항덕이 한 쪽 공격을 홀로 맡았다. 성 위에서 화살과 돌들이 비오듯 쏟아지는테 소항덕은 얼굴색이 평소와 하나도 다름없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그들의 성첩을 빼앗았다. 성이 함락된 후 날아오는 화살에 맞자 태후가 친히 찾아와 살피고 약을 내렸다.

장성長城 어귀를 공격할 때도 다시 제일 먼저 성에 오르자 태후가 그 공을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이때 고려가 아직까지 귀부하지 않아 소항덕이 조서를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그 나라 변경 성들을 함락시키자 그 왕 치治(고려 성종)는 두려움에 표문을 울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통화 12년(994) 8일에 계성같력공신啟聖竭力功臣이 하사되었다. 도부서都部署 화삭노和朔奴를 따라 올야兀惹를 토벌하는데 아직 싸우기도 전애 올야가 항복을 청하였으나 소항덕은 그곳의 포로와 노획물들을 노리고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울야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성을 함락시길 수가 없었다.

화삭노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는 것을 논하고자 하자 소항덕이 말하기를, "저들이 너무 드세 우리가 조서를 받들고 토벌하러 온 것입니다. 아무런 공도 없이 되돌아간다면 여러 부족이 우리를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만일 깊이 공격하여 많은 노획물을 얻는다면 빈손으로 돌아가는 짓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라 해서 화삭노가 부득이 남동쪽 여려 부족을 찾아 공격하여 고려의 북쪽 변경까지 이르렸다.

돌아올 즈음에 길이 멀다 보니 군량미가 끊겨 많은 군사와 말들이 죽고 다쳤다. 이로 인해 공신 호칭을 삭탈당하였다.

통화 14년(996)에 행군도부서行軍都部署가 되어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를 쳤다. 돌아오자 (부인인 월국) 공주가 병이 들었다. 태후가 궁인宮人 현석賢釋을 보내 병간호를 하게 하였는데 소항덕이 그와 사통하니 공주가 분통이 터져 홍서하자 태후가 역정을 내고는 사사賜死했다.

뒤에 난릉군왕에 추봉되었다. 아들은 소필적蕭匹敵이다.

18 恆德,字遜寧。有膽略而善謀。
19 統和元年,尚越國公主,拜駙馬都尉,遷南面林牙。從宣徽使耶律阿沒里征高麗還,改北面林牙。會宋將曹彬、米信侵燕,耶律休哥與恆德議軍事,多見信用,為東京留守。
20 六年,上攻宋,圍沙堆,恆德獨當一面。城上矢石如雨,恆德意氣自若,督將士奪其陴。城陷,中流矢,太后親臨視,賜藥。攻長城口,復先登,太后益多其功。時高麗未附,恆德受詔,率兵拔其邊城。王治懼,上表請降。
21 十二年八月,賜啟聖竭力功臣。從都部署和朔奴討兀惹,未戰,兀惹請降。恆德利其俘獲,不許。兀惹死戰,城不能拔。
22 和朔奴議欲引退,恆德曰:「以彼倔強,吾奉招來討,無功而還,諸部謂我何!若深多獲,猶勝徒返。」和朔奴不得己,進擊東南諸部,至高麗北鄙。比還,道遠糧絕,士馬死傷者眾,坐是削功臣號。
23 十四年,為行軍都部署,伐蒲盧毛朵部。還,公主疾,太后遣宮人賢釋侍之,恆德私焉。公主恚而薨,太后怒,賜死。
24 後追封蘭陵郡王。子匹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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