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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일본 무가武家 "나노리 名乗り"는 기원이 한반도인가

by 초야잠필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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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리 名乗り라는 일본 무가武家 전래의 전통이 있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名乗り(なのり)とは、戦において武士が味方や敵に向かって自分の姓名・身分・家系などの素性、戦功、戦における自分の主張や正当性などを大声で告げること。武士の作法として、名乗りが行われている間に攻撃することは良しとされなかった。戦場では自分の勇名や戦功を喧伝するためなどに行われ、味方の士気を上げるためや相手方の士気を挫いたり挑発するためにも行なわれた。

 

간단히 말하자면 싸움 전에 상대편에 관등 성명을 대는 것이다. 나는 누구누구의 자손 누구인데 어쩌고.. 하는 것인데 이건 상대편 들으라고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편, 정확히는 자신에게 상을 내릴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상대편 성을 공격할 때 선착하면 마찬가지로 나노리를 한다. 내가 누군데 누구 성에 선착을 했노라!! 이렇게...

이리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전쟁이 끝나면 상을 (구체적으로는 땅이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노리를 못하면 전쟁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일본 무가라고 해도 전국시대쯤 되면 이미 거기도 개싸움 막싸움인지라 나노리고 뭐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을 테고, 대략 나노리 하다가 박살난 몽골 습래 시기 전후해서 나노리 전성기는 막을 내리는 것으로 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에는 나노리가 성행하던 전성기로 당시 일본 무사들이 어떻게 나노리 하는지 잘 나타나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한장면. 조우한 두 무사가 서로 나노리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필자가 아는 한 나노리 기록으로 일본에서 가장 이른 것은 한반도 관련 기사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겨울 10월 庚寅 초하루 己酉 百濟 왕자 여창餘昌(明王의 아들 威德王註 001이다)이 나라 안 모든 군대를 내어 高麗國을 향했는데,註 002 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餘昌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빈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騎, 징을 꼽은 자鐃자는 자세하지 않다 2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餘昌이 “姓은 (高麗 왕실과)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 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百濟는 高麗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高麗軍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때 百濟軍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高麗王註 003을 東聖山註 004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일본서기 흠명기 [553년] 국사편찬위) 

 

이 기록에 나와있는 방식: 즉, 서로 관등성명을 대고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는 것까지 거의 정확히 일본 무가의 싸움 방식에 일치한다. 여기 나온 장면은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고구려군과 싸울 때 전쟁을 시작하기 전 장면인데,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말을 주고 받는 방식을 보면 이 당시 한반도 무사들 사이에는 이러한 방식이 상당히 보편화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아마도 이러한 풍습이 일본으로 전해져 헤이안, 겐페이전쟁 시대 나노리 전통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한다. 

 

*** 편집자注 ***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에서 어디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알 수는 없다. 영화 황산벌을 보면 계백이가 이끄는 백제군에 진군이 막힌 김유신 휘하 신라군이 발분發憤을 통한 사기 진작 차원에서 혼자서 돌진해서 죽기 작전을 쓰는데, 그리하여 이 전쟁에서 김유신은 자기 사위이자 조카인 김반굴을 희생하고 또 다른 신라군 수뇌부 장군 아들인 관창을 제물로 삼는다. 

영화는 이 둘이 백제군 진영에 뛰어들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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