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일제시대의 키워드는 "수탈"이 아닌 "차별"이다

by 초야잠필 2023. 6. 20.
반응형

일제시대의 키워드는 "차별"이다. 

해방이후 한국 독립의 당위성은 "차별"에서 찾아야 옳다. 

일제하 교육제도의 문제점이 해방 후 폭발적으로 시정되었다면, 바로 그 부분이 독립해야 할 당위가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의 연구가 "수탈의 증명"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 

제국주의국가가 식민지를 유지하는 이유는 "수탈"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일제시대는 모종의 이유로 전 기간 동안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 차별은 해방 국면까지도 시정되지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재생산되었다. 

식민지 연구를 "수탈의 증명"으로 할 것인가 :"차별"로 할 것인가는 상당히 델리키트한 측면이 있는데, 

"차별"로 키워드를 잡아간다면 이를 증명하는 방법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어렵다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수탈"보다 "차별"이 훨씬 부정적 의미가 약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미국 식민지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도 사실 동기는 "수탈"이 아니었다. 

"차별"이었다. 

식민지에서는 수탈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지법 등) 사실 차별의 이유가 더 컸다. 

일본의 조선식민 통치도 수탈보다는 차별의 측면에서 더 문제점을 많이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수탈 때문에 독립했을까 차별 때문에 독립했을까. 미국인들 스스로는 수탈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차별의 측면이 더 컸다. 차별은 많은 식민지를 독립으로 이끄는 불쏘시개 같은 것으로, 수탈 때문에 각성한 식민지가 독립을 하게 된 경우보다 아마 훨씬 많을 것이다. 한국의 일제 식민지사 규명은 처음에 수탈에 촛점을 맞춤으로써 스토리를 잘못 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Editor's Note *** 
 
이 문제는 편집자가 필자와 잠깐 나누기도 한 대화록 일부이기도 한데, 필자는 줄곧 식민지시대 문제를 교육에 주력해서 차별성을 부각하는 데 집중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식민지 조선 자체가 아니라, 제국 일본의 시각에서 봐야 그 국면이 제대로 보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필자는 이 문제에 천착하면서 작금 한국 학계의 식민지시대 연구가 왜 저런 전체의 시각에서, 그것도 철저히 증거주의에 입각하고 비교사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선험적으로 일본 욕을 하면서 시작하고 일본 욕을 하는 일로 끝내는 논조가 왜 그리 많은가를 분통한다. 

필자는 수탈보다는 차별이라는 시각에서 식민지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면서도 이 문제는 델리키트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을 빼놓지 아니하는데, 그에 대해 편집자는 이런 요지로 논급했다. 

차별론에 입각한 연구는 자칫하면 "그렇다면 너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더 잘 했어야 한다는 말이더냐"는 논란을 필연적으로 부르는 까닭에 그런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 수탈론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는 필자의 시각에 전적으로 찬동하며, 저에 대해서는 하등 이론이 있을 수는 없다. 

수탈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참말로 웃기는 짬뽕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수탈성이라는 측면에서 조선왕조가 극심했겠는가 제국 일본이 극심했겠는가? 전자가 후자보다 몇 곱절 몇 십배는 더 혹독했다. 

이 수탈론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조선왕조는 잘 망했다. 왜?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수탈적인 권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편집자더러 굳이 조선왕조로 갈 것이냐 식민지 일본으로 갈 것이냐를 묻는다면 편집자는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수탈론이 지닌 결정적인 맹점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수탈론은 저 문제는 쏙 뺀다. 제국 일본보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이 더 혹독하게 수탈을 일삼았다는 그 증거는 침묵한다.

비교사적인 접근은 이 수탈론 역시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 일정 부문 타당성을 지닌다. 

이 식민지근대화론을 필자는 시종 일관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맹폭하는데, 이 지점에서는 편집자는 필자와 생각이 다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압도적인 내셔널리즘적 수탈론이 결코 줄 수 없는 강점이 있다. 나는 그 강점을 취하고 싶을 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차별론이 자칫 "너 그렇다면 일본이 식민통치를 잘 했어야 한다는 말이냐?"는 반론을 필연적으로 불러낸다 했거니와, 저 논리를 오독하면 틀림없이 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 그런 식으로 매도당한 사람이 한둘인가?

편집자가 왜 이 문제에 더 민감한가 하면, 편집자를 매양 공격하는 논리가 바로 저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는 글이나 강연 등을 통해 거의 빠짐없이 식민지시대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편집자는 그의 이야기가 당신들한테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전제를 하고선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러면서 예컨대 당신들이 조선총독이 되어 봐야 한다고 매양 역설한다. 

당신이 조선총독이 되어 조선에 부임할 때 어떤 생각으로 현해탄을 건널 것 같은가? 저 조선놈들 어찌하면 다 뺏어 거지 만들고, 어찌하면 이쁜 조선여자들을 내 첩으로 만들 것인가 이딴 생각으로 오겠는가?

내가 조선총독이라면 나는 이렇게 결심하며 현해탄을 건널 것이다. 

"어찌하면 저 조선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해 줄까?"

내가 일본 총독이 되어 도쿄로 부임한다면 나는 그런 생각으로 대한해협을 건너갈 것이다. 

당신들이 식민지시대를 바라볼 때 총독이 되어 봐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식민지시대가 보인다. 

이런 얘기를 하는 그 순간은 그런 대로 뭔가 조금은 수긍하는 눈빛도 있지만, 어떤 청중은 자리를 박차고 떠나거나, 혹은 "그렇다면 당신 논지가 뭐냐?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한 일이 잘했다는 거냐 뭐냐?" 이런 식으로 매양 반박한다. 

편집자는 매양 이런 식으로 전투적으로 식민지시대상을 어찌 볼 것인가를 두고 상식과 싸웠다. 

식민지시대는 필자가 말하듯이 수탈보다는 차별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옳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