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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젊은 소정小亭, 폭포를 그리다

by taeshik.kim 2023.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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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화단에는 숱한 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그림솜씨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는 적고, 또 그 중에서도 처신을 흠잡을 구석이 드문 분은 더욱 적다. 그 적은 사례 중 한 분이 바로 소정 변관식(1899-1976)이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의 제자뻘인 소림 조석진(1853-1920)의 외손으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도기과陶器科에 입학해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를 마친 뒤엔 외할아버지가 간여하던 서화미술회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운다.

1920-30년대 변관식은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작품을 내는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두 차례 특선을 거두면서 기량을 널리 인정받는다.

1925년부터 4년간은 일본에 건너가 고무로 스이운(1874-1945) 문하에서 당시 유행하던 신남화를 익히고, 돌아와서는 조선 전역을 유람하며 실경을 사생한다.

특히 그는 금강산에 푹 빠져서, 금강산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생에 몰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변관식은 해방 이후에도 금강산을 특히 즐겨 그렸고, 금강산 그림 중에 명작이 많다.

방랑벽이라고 할까, 야인 기질이라고 할까. 변관식은 어디 한 군데 구속받거나 제도권에 안주하는 걸 꺼렸다.

어떤 자료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나, 현재까지는 그가 별달리 친일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선전 특선도 친일적 행동이라 하면 할 말이 없겠으나).

또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곧 국전 초기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는데, 국전 심사를 주도하던 심산 노수현(1899-1978)을 비판하며 점심으로 먹던 냉면그릇을 던지고 나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뒤 변관식은 국전과 인연을 끊고 이른바 야인이 되었다.

변관식 그림의 특징을 꼽자면 우선 사생에 바탕한 한국 산야의 재현, 그리고 적묵積墨-곧 마른 붓으로 짧은 선을 여러 겹 치듯이 그어가며 '먹을 쌓아나가듯' 그리는 화법을 들 수 있다.

화면 가득 거칠면서 묵직한 느낌을 자아내는 변관식 특유의 이 화법은 1960년대 만개하지만, 뒤에서 말하겠으나 그 전부터 조짐이 보인다. 과연 야인의 그림답다고 할까.

또 노란 도포 입고 걸어가는 인물이 많이 들어가는데, 팔과 다리가 꼭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조선시대 풍속화를 참조했다고도 하지만, 무거운 화면에 약간의 경쾌함을 주는 효과가 있어 변관식이 애용하지 않았나 한다.

아래 작품은 신미년, 그러니까 변관식이 서른세살 되던 1931년에 그렸다. 신정에 그렸다니 실상 1930년에 그렸다고 해도 될 텐데, 받는 분이 '유당酉堂'이라고 되어있다.

유당은 김희순(1886-1968)이란 이다. 전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스로가 서화에 상당한 솜씨를 지닌데다 인심이 좋아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변관식이 일본에서 막 돌아와 주유천하할 때인 1930년 12월, 전주 김희순 집에 들렀던가 보다.

마침 양력으로 해가 바뀌는 시점이라, 객은 주인에게 그림 하나를 그려 드리기로 한다. 가을 정취가 느껴지는 폭포이다.

세로로 긴 화면을 쭉 가르는 듯한 폭포는 금강산 구룡폭을 연상시킨다. 엷게 물을 탄 채색을 살짝살짝 넣어가며 바위 곳곳에 포인트를 주되, 천고의 세월이 낸 듯한 틈은 먹을 묻힌 붓을 눕혀 그어가며 만든다.

짧게 친 붓자국이 쌓여가며 바위의 음영을 자아낸다. 거기에 소나무가 자라난다. 폭포의 기세 못지않게 강인해보이는 등걸들이다.

그린 시점이 시점이어서인지, 담묵을 번지게 하여 분위기를 우려내는 일본 신남화의 여운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 그리고 만년 작품에 비해선 좀 가벼워보이고 점경인물이 없는 등 특징이 덜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이른 시기부터 변관식이 '적묵'을 시도하며 자기 화풍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또 그의 인간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낮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또 흥미로운 건 화제글씨다. 변관식은 유달리 글씨를 잘 못썼다. 그 외할아버지 조석진도 글씨는 영 아니올시다인데 이런 것도 유전인가?

어쨌건, 그래서 그의 그림엔 화제가 아주 제한된다.

호만 쓰는 때도 많고, 산 이름이나 이백 또는 왕유 시 몇 구절을 쓰는 정도이고 필체도 대개 투박한 해서다.

그런데 여기선 (몇 글자 안되지만) 정중한 예서를 구사하고, 옆의 작은 글씨는 흘림기가 약간 가미된 것이 약간 멋을 냈다는 느낌이다. 아마 열네살 위 선배에게 드리는 것이라 글씨에 좀 더 힘을 줬던 것일까.

'소정 변관식'이라고 굳이 이름까지 쓴 것도 그렇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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