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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12

글이 안 되자 붓을 던져버린 최온崔昷 고려 중기를 살았던 최온崔昷(?∼1268)이란 사람이 있었다. 당대 문벌인 철원 최씨 출신으로 그 자신 재상까지 올랐던 사람이었는데, 자기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좋게 말하면 문벌답게 행동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콧대높은 안하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문한관이 되어 임금의 문서를 담당하는 고원誥院에 들었다. 그때 이순목李淳牧, 하천단河千旦이라는 이들이 같이 근무했는데, 그들은 지방의 향리 출신이었다. 그러니 최온의 눈에 찰 리가 있나. 서로 경이원지하던 중... "이웃나라에서 견책譴責하려 보낸 조서詔書에 대한 답서答書를 작성하여 올리라는 명령이 있어, 최온이 붓을 잡았는데, 머리를 긁으며 고심을 해도 뜻대로 글이 되지 않자 붓을 집어 던지고 욕을 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시골구석의 포.. 2020. 12. 23.
남수문南秀文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직후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니,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 성과라, 다만 절요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후자의 절록이라 생각하기 쉽고, 실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나, 세밀히 살피면 둘은 별도 별개 사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거니와, 그 이유를 편찬진이 다른 점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2018. 2. 19.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4편 고려 충숙왕 시대의 쇼생크 탈출 - 금마군 무강왕릉 도굴범, 감옥을 탈주하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 시간은 016년03월02일 14시00분이다. 이 《독사일기》 맨 처음에 나는 원나라 공주 눌륜의 무덤이 도굴된 일을 다루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이다. 한데 이보다 한 달 전에는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고려사절요》 충숙왕 해당 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馬韓) 조상 호강왕의 능을 도굴했다. (도둑을) 붙잡아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했지만 달아났다. 정승 정방길(鄭方吉)이 전법관(典法官)을 탄핵하고자 했지만 찬성사 임중연(林仲沇)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이 옥에 갇힌 지 2년이 되었지만 드러난 장물(贓物)이 없는데도 죽은 자가..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3편 왕건, 죽어도 죽을 수 없던 神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며 기사 입력시간은 2016년 02월 22일 14시15분이다. 고려를 창건한 신라인 왕건은 고려 왕조를 개창한 까닭에 그 이름만 들으면 우리는 대뜸 ‘고려인’으로 단정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뼛속까지 신라인이다. 그가 태어나기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이니 이해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이다. 청장년기를 신라에서 배반한 궁예에서 복무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발적 헌납이라는 형식으로 신라를 접수한 때가 59살 때인 935년이며, 그로부터 8년 뒤인 943년 향년 67세로 눈을 감는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왕건은 신라인이다. 이런 그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 혹은 국가를 만들 때 그 절대적 토대는 신라의 그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죽어 묻힌 곳을 현릉(顯.. 2018. 1. 20.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입력시간은 2016년02월01일 13시41분이다. 비봉 기슭의 절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우뚝 섰던 북한산 비봉 서쪽 기슭에 불광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서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인 향로봉 정상을 향해 40분쯤을 올라가면 향림담(香林潭)이라는 작은 웅덩이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40m가량을 오르다가 갈림길 왼쪽으로 돌아가면 제법 넓은 대지가 나타난다. 이 일대에는 누가 봐도 그 옛날에는 제법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웅변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제법 잘 남은 2단 축대가 있는가 하면, 7단인 돌계단도 있고, 대지를 비롯한 주변에는 건물 주초 혹은 탑과 같은 건축물 일부였을 법한 다듬은 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더불어 기와에 대한 조예가 좀 있다면, 고려.. 2018. 1. 18.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1편 묻힌 다음날 털린 원 제국 공주의 무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다. 기사 입력은 2016년01월25일 12시16분이다. 근자에 《고려사절요》를 통독하며 고려사 500년을 훑다가 중·말기로 갈수록 짜증 혹은 분노가 치솟는 걸 보니 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한국 사람이다. 고려가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원나라 간섭을 무려 100년간이나 받으며 왕을 필두로 하는 고려인들이 갖은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데다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주는 고통까지 덤터기로 썼으니 아마도 이때가 한국사 가장 참혹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감정은 비단 지금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줄로 안다. 굴곡의 근현대 한국이 겪은 참상이 아마도 고려 시대 그때로 오버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나는 한국사가 이때만큼 세계를 향해 더.. 2018.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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