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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보이는 일화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정인지)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빈소(殯所)에서 남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壙中)에서 북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시 빈궁(殯宮)이니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재상은 마땅히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내가 항용 말하듯이 동아시아 죽음은 두 단계가 있으니, 첫째가 생물학적인 죽음이라 이는 말할 필요가 없고, 두번째가 그런 시신을 완전히 땅에 매장하는 순간이니 이를 나는 굳이 상징적인 죽음이라 한다. 두 죽음 사이 기간을 빈殯이라 하며, 그 기간 시신을 모신 공간을 빈소殯所라 하거니와, 흔히 빈전殯殿이라 했다. 

빈전에 있을 적에 죽은 사람 머리는 어디로 둘 것인가? 남쪽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북쪽으로 할 것인가는 문제가 된다. 동아시아 예법에서 상징적인 죽음에서야 비로소 완전한 죽임이 선언되거니와, 이때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으로 간주해서 머리를 남쪽으로 둔다. 상징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죽음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시신 머리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 북쪽을 향하게 된다. 

이 머리 방향을 두침頭枕이라 하거니와, 이 문제는 언뜻 허심하게 보이나 꽤나 중대성을 갖는다. 빈소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다. 한데 필원잡기가 말하는 저 사건은 빈소를 떠나 왕릉으로 매장하러 가는 길에 일어났다. 이에서 정인지가 말하는 논법을 보라! 

저 대목을 이해해야, 왜 무령왕릉 부부가 남쪽으로 머리를 두었는지를 비로소도 해명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건대, 고려 건국시조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음력 5월 29일, 양력 7월 4일에 사망한다. 이틀 뒤에 발상(發喪)하고, 그 다음날 그의 시신은 빈전(殯殿)에 간다. 빈전은 궁궐 정전 혹은 편전이었을 상정전(詳政殿) 서쪽 뜰에다가 마련했다. 빈(殯)을 마치고 그를 장사한 때가 같은 해 음력 6월 26일, 양력 7월 30일이다. 그의 무덤에는 현릉(顯陵)이라 했다. 이로써 본다면 왕건은 죽은 시점을 기준으로 정확히 27일 만에 묻혔다. 나아가 왕건 기제(忌祭)는 매년 6월 1일이다. 

이런 상장(喪葬)제도를 보건대 고려는 이미 건국과 더불어 왕에 대해서는 한 달을 하루로 쳐서 27일간 상장 의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장제를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 한다. 말 그대로 하루를 한 달로 친다는 뜻이니, 27일은 곧 27개월인 셈이다. 이후 왕들도 장송 패턴을 보면 고려에서는 시종일관해서 이일역월제가 관철됨을 본다. 

이와 같은 이일역월제는 말할 것도 없이 삼년상의 폐해를 줄이자는 차원에서 등장했다. 삼년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제도와 관습으로 정착시킨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공자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서 부모 품을 벗어나 아장아장 걷는데 3년이 소요된다는 발상을 장송에 적용해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삼년을 애도하는 기간으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나중에 어찌하여 3년 시묘살이로 치환되었는지는 내가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다만 3년이라 하지만, 햇수로 3년을 말하며, 실제 3년을 꽉 채운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3년을 몇 개월로 삼을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한다. 이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으니, 27개월과 25개월이 그것이다. 전자가 아마 정현(鄭玄)이 주장한 것으로 기억한다. 

25개월이건 27개월이건, 이리 긴 복상(服喪)기간은 언제나 논쟁을 유발했다. 상주가 몸과 마음을 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기간에 모든 길례(吉禮)가 중단 연기되니, 그런 집안에서는 시집 장가도 못 보냈다. 나아가 상주 대부분이 한창 일해야 하거나, 관직에 종사해야 하는데,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는 이미 공자 당대에 공자의 제자들에게도 불만이었다. 이를 두고 공자와 제자가 논쟁을 벌인 일이 이미《논어》에도 보인다. 나아가 틈만 나면 공자의 유가를 씹어돌린 묵자 교단에서도 계속 삼년상을 공격 빌미로 삼았다. 

이 일이 왕으로 옮겨가면 여러 문제가 돌발한다. 한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왕이 아버지가 죽었다 해서 3년이나 정사를 팽개치고 시묘살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묘살이는 안 한다 해도, 매일 미음이나 삼켜가면서 무슨 정사를 돌보겠는가? 

그래서 묘수 끝에 등장한 것이 이일역월제다. 이는 짱구돌리기에서 나온 발상이다. 하루를 어찌 한 달로 칠 수 있겠냐만, 오늘부터 요이 땅! 그리 하자 해서 도입된 것이 바로 이 제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기는 전한(前漢) 초기다. 그렇게 등장한 이 제도가 초래한 각종 편리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뭐, 조선 문종처럼 엄마 아부지에 대한 그리움이 지나친 자식이 가끔 있기는 했지만, 세상 모든 왕은 아버지가 죽어야 왕이 된다. 한비자가 갈파한 인간 본능 중에 세상 모든 마누라와 아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일찍 죽기만을 바란다는 말이 있다. 그런 아들이고 마누라이니, 그들이라고 삼년이나 상복 입는 불편을 감수하고 싶겠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고려가 왕건을 추숭한 방식은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 종묘 신주 안치

둘째 어진 봉안

셋째 소상 제작

넷째 현릉 배알 

이 정도로 정리가능하다. 어진은 여러 곳에 봉안하나 가장 중심 되는 공간은 궁궐 안 어진각과 개성 인근 봉은사라는 사찰이다. 후대 왕들이 태조 어진이나 현릉을 6월 1일 무렵에 집중 배알하는 이유는 이날이 기제사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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