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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에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일원으로 중국에 다섯 차례나 다녀왔으며, 그 오야붕 연암 박지원을 추종한 이른바 ‘연암그룹’ 일원이기도 한 이희경(李喜經·1745~1805 이후)이란 사람이 남긴 잡글 모음 필기류인 《설수외사(雪岫外史)》란 책에 나오는 일화다. 




(한양도성) 서문(西門) 밖에 서른이 넘도록 개가(改嫁)하지 않은 과부가 있었으니, 그 이웃에는 아내 없는 홀아비가 살고 있었다. 사내가 결혼하자 아무리 꼬드겨도 여자는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그녀를 정조가 있다고 해서 정려문을 세워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치면서 세찬 비가 내리더니 여자 집에 벼락이 쳤다. 이웃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가서 보니 집은 전과 같이 온전했지만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녀로 소문난 그 여자와 이웃집 홀아비가 한창 잠자리를 하다가 번개가 갑자기 방에 내리치자 남녀가 모두 겁에 질려 기겁한 것이다. 이웃집 사람이 오줌에 약을 타서 먹이자 한참만에야 깨어났다. (진재교 外 옮김, 《설수외사(雪岫外史)》,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1.2, 19쪽)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이르노니, 천둥벼락 치는 날엔 몰래 여자를 만나지 마라. 아님, 피뢰침 시설 잘 완비한 호텔이나 모텔에서 만나든가... 


아울러 위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요즘 한문학계를 중심으로 한창 논의가 활발한 이른바 ‘열녀의 탄생’이라는 그 허망한 보기를 알 수 있거니와, 그에 더불어 벼락 맞고 기절한 사람에게 쓴 약이 '오줌'이라는 사실도 확인하는 부수입을 얻는다. 오줌은 응급처치약이기도 했다.  


덧붙이건대, 편의상 두 사람 행동을 '바람'이라 했지만, 그것은 지극한 인간의 정리 그 발로였으며,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다만, 이 일화를 수록한 까닭은 소문에는 열녀라는 평판이 자자한 여인에 대한 조롱이다. 

또 하나, 저 일화 소재 혹은 배경이 천둥 번개라, 이에 얽힌 경험이 있다. 천둥 번개...난 이걸 찍는 방법을 모른다. 한 번도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언제런가? 터키로 가족 여행을 간 적 있다. 그때 안탈랴인지 어디에 숙소를 잡았는데 밤인지 새벽에 천둥번개가 쳤다. 저 멀리 하늘을 보니 번쩍번쩍이라, 저거 한 번 찍어볼끼라고 카메라 매고 해변으로 나갔다. 경험이 없으니, 이래저래 버벅였다고 기억한다.  TV 모드로 갖다놓고, 연사 촬영 모드로 변환은 하고 기다린 듯한데, 니미럴....번개가 언제 칠 줄 모르니, 방법이 없었다. 다시 그런 기횔 만나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번개 맞아 죽거나, 번개가 나한테 잡아먹히거나. 


종래 제국주의라면 총칼과 가톨릭 신부 혹은 개신교 목사를 앞세운 침략과 약탈이 무기였다면 지금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제국주의를 제창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은 우리는 인정하기 못내 싫을지 모르나 과거 제국주의 팽창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박물관으로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무척이나 높다. 루브르 브리티시 뮤지엄은 말할 것도 없다. 과거 피식민을 경험한 국가 박물관은 거의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국 문화의 영광을 포장하기 마련인데 그런 까닭에 내셔널리즘 색채가 유난히 짙거니와 이를 웅변하는 곳이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그리고 중국의 모든 박물관이다. 


도쿄국립박물관



동경국립박물관 부속 건물 중엔 동양관이 있다. 말이 동양관이지 아시안 갤러리만 표방하지 않아 이곳엔 이집트실이 있다. 동양관이니 중국실 인도실 중앙아시아실 그리고 한국실도 있다. 한데 이중에서 가장 초라하고 가장 볼품없는 곳이 한국실이다. 전시품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 도자기만 해도 요강단지 같은 유물에 유기그릇 몇 점이 전부다. 이런 곳에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유물이 반드시 들어가야는 것은 아니다. 이는 내가 말한 내셔널리즘 경계 정신과 맞지도 않는다. 


하지만 유독 한국실만 왜 이 꼴이 벌어지는가는 생각할 대목이 있다. 저네들이라고 저 따위 유물만 전시하고 싶겠는가? 실제 저보다 훨씬 뽀대나는 유물이 적지 않음에도 전시품 꼬라지를 보면 화딱지가 난다. 왜 저런가?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의 중국실



뽀대 나는 유물 전시하기가 무섭게 약탈문화재 환수를 외치는 자들이 들이닥쳐 내놓으라 겁박하기 일쑤다. 이런 논란에 휘말리는 전시 저들이라고 할 맛이 나겠는가? 이런 논란에 휘말린 유물들이 슬그머니 다 전시장에서 사라졌다. 나는 기왕 한국실이 존재하는 한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 중 뽀대나는 것들 골라 정기적으로 대여해 교체전시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가져오는 일이 능사는 아니다.

이제는 우리 생각을 개조해야 한다. 과거의 약탈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한다. 


반대로 우리 역시 우리것만 자랑하는 나찌즘에서 탈피해 우리가 자랑하는 것만큼의 문화가 다른 지역에도 있었음을 대한민국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본다. 일본고대문화...우리가 다 준 것으로 알고, 또 그리 선전하나 실상과는 전연 딴판이다. 죠몽 야요이 도기 봐라. 고분시대 유물 봐라. 황남대총 부럽지 않은 유물들이다. 불교? 백제에서 줬다고? 그걸로 저들이 구가한 불교문화 설명 못 한다. 


저 정수를 제대로 맛보게 해야 한다. 비단 일본 중국 뿐이랴? 새로운 제국주의는 박물관을 개혁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 국립박물관 부억데기로 전락한 아시아관은 세계 문명관으로 독립해야 한다. 우리가 빌려주고 우리가 대여해야 한다. 거죽데기 몇개 갖다 놓고는 이게 일본 문화요 중국문화요 인도 문화라는 사기 그만 쳐야 한다. 


*** 이상은 3년 전 오늘, 2015년 10월 22일, 내 페이스북 계정 포스팅으로, 그 무렵 나는 도쿄에 있었다. 

저에서 말한 환수운동 말이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말에 고려건국 1100주년 맞아 대고려전 준비하면서 일본이 소장한 고려 관련 유물을 대여하려 했더니, 한국정부가 반환을 보증해야 한다는 문서를 요청해서 난항을 겪는 중이다. 대마도에서 한국 도둑놈들이 강탈한 문화재를 한국정부가 반환하지 않는 데다, 걸핏하면 약탈해간 것이니 내놓으라 겁박하니 벌어지는 일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사고 쏟아내는 연예계. 배우 김지수가 헤롱헤롱 만취 상태로 기자회견 나타나 추태 부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나영석 PD와 배우 정유미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찌라시가 판을 치더니만, 그날 오후 그런 악성루머에 조정석이 가세하더라. 


이런 소동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그날 또 새로운 사건이 터져나오니, 보이밴드 더이스트라이트 멤버 이석철·승현 형제가 4년간이나 소속사 미디어라인터테인먼트 PD한테 열나 얻어터졌다는 흉측한 폭로가 그것이다. 이들은 고등학생으로 알거니와, 그네들 폭로에 의하면, 문제의 PD가 멤버들에 대한 상습 폭행을 일삼았으며, 이를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현 단계에서는 확인이 곤란하기는 하나, 야구 빠따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고 한다. 


이석철 기자회견. 연합DB



이 사건은 그 폭로 내용이 경악이었거니와, 상습 폭행 비스무리한 악행이 있었음은 어느 정도 확실한 듯하니, 그 소속사 대표로 저명한 연예기획자인 김창환 회장도 그런 부분은 일부 시인했고, 그리하여 문제의 PD는 사직하고 나갔다는 것이다. 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양측간 공방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관련 보도를 보면, 우선 이런 사실을 김창환 회장이 인지하고 있었느냐 아니냐가 있거니와, 당연히 석설 승현 측에서는 김 회장이 폭행을 알면서도 방조했다 하며, 그에 대해서는 김창환은 몰랐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김창환은 "아들이 퇴출될 위기에 놓이니 형사인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는 소속사' 프레임을 짜려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를 통해 저들 형제 아버지가 현직 경찰임을 안다. 


나아가 김창환은 "최근의 일은 이승현의 인성 문제가 발단"이라고 했거니와, 이에서는 내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인성이 문제가 있다 해서 애를 두들겨 팰 수는 없다. 그 발단에서 비롯된 문제에 야구 빠따가 포함됐음을 김창환이 인정했는지 여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저와 같은 생각이라면, 저들의 주장대로 혹 김창환이 방조하지 않았느냐 하는 혐의를 둘 수도 있겠다. 


울음 터뜨리는 이석철. 연합DB



공방이 가속하면서, 피해자측은 그 주장을 입증할 자료들을 속속 공개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고민 끝에 그 사진 공개는 보류하기로 했다.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서가 아니라, 굳이 그런 자극적인 것들을 만천하에 언론이 드러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까닭이다. 혜량 부탁한다. 아래 링크하는 기사는 그 최신 진행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이석철 측 "본질은 폭행"…소속사 주장 반박·추가 증거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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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재야 문단의 영수지만, 실은 노론 적통에 재산 졸라리 많은 부자요 권력자였다. 뭐, 과거로 출사하는 길을 포기하고, 그러면서도 안의현감인지는 잘해 잡수시면서, 박제가 놀러 오니 안의현에서 관리하는 기생 중에서도 가장 앳된 애를 골라다 수청 들게 해 주는가 했으니, 이런 식으로 수하엔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또릿한 똘마니들 몇몇 거느리고 재야를 호령했거니와, 박제가 말고도 유득공도 있었다. 나이도 젤로 많고, 그 자신은 적통이지만, 똘마니들은 다 서출이라, 대장 노릇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럼에도 저이를 높이쳐야 하는 까닭은 그 속내가 무엇이었건, 그래도 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인간 대접했다는 점이다. 뭐 이런 동호회 그룹을 요새는 백탑 근처에서 많이 놀았다 해서 백탑파 그룹이라 하는 모양이다. 





한데 이런 연암으로서도 자존심 왕창 상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 똘마니 시다들이 모조리 중국 가서 선진문물 맛보고 온 데다 그걸 기초로 《북학의》니 하는 책 먼저 내서 왕창 성공을 거두었는데, 정작 오야붕인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도 나중에 연행길 나서는 육촌형님인지 쫄라서 쫄래쫄래 종사관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따라나선다. 


부담이 컸다. 엄청난 부담이었다. 왜인가? 이미 먼저 다녀온 박제가 유득공은 물론이요, 그 선배들이 기라성 같은 연행록을 냈기 때문이다. 늦게 갔으니, 그들을 모조리 뛰어넘어야 했다. 


그의 《열하일기》는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고충이 토로한 기행문이다. 이 《열하일기》를 대할 적에 나는 그의 이런 부담감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데 이런 그에게 천만다행인 점은 《열하일기》로 전대를 모조리 갈아 엎었고, 후대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하일기》는 글자 그대로 선풍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에 구사한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 해서 정조한테 쿠사리 쫑크 먹고 협박까지 받는 처지에 내몰렸지만, 그는 알았다. 정조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유배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조는 성질이 더럽고 욱하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지만, 그는 역시 호학의 군주요, 그런 까닭에 재목들은 잘 알아보았으니, 그러면서도 내가 저런 연암 같은 놈 유배 보내거나 죽여 역사의 오점을 남길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연암은 참말로 시대를 잘 만났다. 

연암처럼 공식 사절단 일원이 아니면서, 문물 맛보러 가는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강박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문명으로 이름 떨치는 한 놈쯤은 사귀어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세계의 간판급 주자라는 점을 각인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대개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시문 중에서도 짱꼴라들한테 내놓아서 부끄럽지 않은 것을 골라 여러 장 베껴가야 했다. 이걸 내밀며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소개하고, 그런 공작이 성공하면 "아! 동방에 이런 군자도 있었네"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니, 이런 방식으로 연암보다 후대에 대성공을 획책한 자가 추사 김정희다. 


그렇다면 연암은 무엇을 가져갔는가? 자기 자랑할 글을 한 편 골랐으니, 이것이 바로 아래 내가 2006년 기사에서 소개한 누이 제문이다. 이 제문은 그야말로 명문 중의 명문인데, 하필 연암이 이 글을 골라 베껴 간 까닭이 바로 이 정도 글이면 중국 식자층에서 뻑 갈 것이라 확신한 까닭이다.  


북역본 열하일기. 헌책방에 나온 것을 내가 쌔벼왔다.



<산문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2006.04.05 15:36: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수채화 같이 명징(明澄)하면서도 레퀴엠만큼 장중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손윗누이를 실은 상여가 배에 실려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읊고는 다시 노래한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하지만/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  적시거늘/이 외배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오리/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다시 돌아온다 약속하지만, 그 떠남이 죽음이며, 그가 떠나는 길이 상여이고 보면 어찌 떠난 자가 돌아오겠는가? 


300자에도 모자라는 이 짧은 만가(輓歌)에서도 왜 연암(燕巖)인지가 드러난다.


연암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이런 글을 명문이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글을 명문이라 할 것인가?"


하지만 이 글을 강평한 그의 문하생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만만치는 않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37세가 된 영조 37년(1773) 무렵, 박지원(朴趾源)은 이덕무 등과 함께 통행금지가 내려진 밤 12시가 넘어 운종가(雲從街)로 나아가 종각(鍾閣)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거닐다가 수표교(水標橋)에 이르러 다리를 죽 뻗어 걸치고는 야경을 감상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듯하고, 매미소리는 엄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만 같고, 닭의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배의 목소리만 같았다."


절친하게 지내던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1730-72)가 죽었다. 당파로는 소북(小北)이며 남인(南人) 계열 이가환(李家煥)의 처남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정언(正言)과 같은 간관직에 있었으니 친구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이에 그의 죽음을 두고 연암은 이런 제문(祭文)을 지었다.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어버려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한편) 세상에는 참으로 삶을 한낱 꿈으로 여기며  이  세상을 노니는 사람도 있거늘 그런 사람이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 말할 텐데, 하도 크게 웃어 입안에 머금은 밥알은 벌처럼 날고 갓끈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고 말테지."


사람이 죽는 일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해 부인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장자(莊子)의 우화를 빌려 연암은 석치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돌베개)는 박지원을 영문학의 셰익스피어나  독문학의  괴테에 비견하는 한국문학의 대문호로 간주하는 박희병 교수가 그의 산문 20편 가량을 골라 우리가 왜 연암을 다시금 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말로만 "연암! 연암!"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를 외면하는 현재의 우리에 대한 저돌이기도 하다. 연암의 문학이 이토록 천의무봉(天衣無縫)한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이걸 모르느냐는 박 교수의 분통이 느껴진다. 464쪽. 1만5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1. 연건동거사 2018.10.21 19:57 신고

    이런 심리는 2018년 오늘날도 한반도에 사는 식자층에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좀전 남영동 밥상 머리에서 나만 뺀 온가족이 PC방 살인사건을 이야기하며 분통을 터뜨린다. 장모님 마누라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재학생인 아들놈까지 가세했다. 난 무슨 소린가 했다. 나로선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기자란 놈이, 것도 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언론사에서 문화부장질이라고 하는 놈이, 나중에 알고 보니 발생 일주일이 지나고, 지금도 한창 논란 중인 그 PC방 살인 사건조차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우리 공장 편집국 문화부 바로 옆이 담당 사회부인데 그 옆에서 그런 일을 다룬다는 사실도 몰랐으니 말이다. 


강서 내발산동 PC방 살인사건 현장에 놓인 헌화. 연합DB



그래, 바빠서 라고 해둔다.

내 일에 치여서라 해두자.

문화부 일만으로도 치어서 죽을 판이라 옆부서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해두자.

까꾸로 저들이 BTS가 그제 파리공연을 끝으로 유럽투어 대미를 장식하고는 곧 귀국해 24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리는 '2018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참석해 화관문화훈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를 가능성 99%니깐, 뭐 피장파장 아닌가 말이다. 


얼마나 바쁜가 물어보면 졸라 정신없다고만 해둔다. 우리 문화부에서만 생산하는 문화기사만 하루 60~70건이요, 그걸 하루 죙일 정신없이 데스킹 보다 보면, 옆동네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니냐 항변해 둔다. 내꺼 챙기기도 바빠 죽을 판이니, 그 내꺼를 조금만 벗어나면 등신이 된다.


그래도 슬그머니 서재로 들어와, 네이버 포털로 'PC방 살인사건'이란 검색어를 넣어본다. 아뿔싸....지난 14일 강서구 내발산동에서 발생했고, 이 때문에 청와대 국민청원인지 뭔지가 난리라네? 벼락같이 읽고는 벼락같이 이 사건 개요를 갈무리해둔다. 다시는 등신 취급 받지 않으려 말이다.  


그나저나 저 내발산동은 뭐냐? 꼭 말죽거리처럼 언제나 호러 무비 무대가 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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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철이다. 그런 대명사로 내장산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 내장산에 백양사가 있다. 


조선초기 사가정 서거정의 다음 증언은 현재의 내장산 백양사 내력 중 고려말~조선초 일단을 증언하거니와, 이에 의하면, 당시에는 백암사라 일컬은 백양사가 실은 행촌 이암 집안 고성이씨 원찰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 성격이 언제까지 지속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가정 당대까지 100년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을 소홀히 보아넘길 수는 없다. 이는 당대 불교사를 고찰할 때도 여러 문제의식을 고취하거니와, 불교가 일방적인 탄압대상이었다는 데 대한 반론 역시 요즘 만만치 않거니와, 불교가 그리 호락호락하니 당하지는 아니했다. 강고한 유교사회에서도 불교는 여전히 효용이 있었으며, 특히나 가정 주도권을 장악한 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성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승 판서도 바깥에서나 정승 판서였지, 집안에서는 종에 지나지 않았다. "애비는 종이었다"? 모든 남자는 종이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백암사로 돌아가는 도암 상인(道庵上人)을 보내다[送道庵上人還白奄寺]〉


백암사는 고려(高麗) 시중(侍中) 행촌(杏村) 이 문정공(李文貞公·이암(李嵒))의 원찰(願刹)인데, 그의 아들 평재(平齋) 문경공(文敬公 이강(李岡, 1333~1380))과 손자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 국로(國老)가 각기 선인(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조행(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혹은 승려 중에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다. 지난번에는 행촌의 외증손(外曾孫)인 판선종사(判禪宗事) 송은(松隱) 몽대사(蒙大師)가 이 절을 주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가 바로 도암(道庵) 성 상인(成上人)인데 송은이 도암에게 이 절을 전하였으니, 도암 또한 산문(山門)에서 숙망(宿望)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이 절에 머무른 지 지금 거의 30여 년에 이르는 동안, 도풍(道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명성 높은 고승(高僧)이 마치 비린내를 좋아하여 달려드는 개미처럼 도암을 흠앙(歆仰)하여 서로 다투어 달려왔다. 거듭 생각하건대 거정(居正)이 예전에 흥천사(興天寺)로 송은을 찾아뵈었더니, 송은이 거정을 족질(族姪)이라 하여 정성껏 대우해 주고 이어 송은에 대한 설(說)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송은이 다시 백암사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거정이 설을 지어 도암을 통해 부쳐 드렸더니, 뒤에 송은이 거정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설이 노승(老僧)의 기본 취지에 잘 부합한다.” 하고는 도암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송은이 시적(示寂)하였으므로 지금은 송은을 생각만 할 뿐 만날 수가 없었는데, 도암을 만나니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가 된다. 

도암은 본디 양주(楊州) 불암리(佛巖里) 사람인데, 거정의 별업(別業) 또한 그 이웃에 있었다. 도암은 나이 나보다 다섯 살이 아래인데, 왕래하며 서로 종유한 지가 거의 50년이 되었다. 상인은 항상 백암사에 머무르다가 혹 경사(京師)에 오거든 반드시 먼저 나를 방문하곤 했는데, 금년 봄에는 흥천사에 와서 결하(結夏)를 하고 가을 기후가 점차 서늘해지자 또다시 산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재차 찾아와서 나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백암사는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의 자손들이 대대로 수호하는 원찰인데 공(公) 또한 행촌의 외현손(外玄孫)이니, 공의 한마디 말씀을 얻어서 길이 산문의 광영으로 삼고 싶습니다.” 하므로 거정이 말하기를 “행촌의 내외 자손으로 지금 조정에서 벼슬한 이는 수천 수백 인이요, 심지어는 왕실의 외척이 된 이도 있으니, 거정 같은 하찮은 외손(外孫)이 아니라도 반드시 그 일을 크게 빛내 줄 이가 있을 터인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우선 절구(絶句) 5수를 써서 보내 드리고 겸하여 지주(地主) 조 사문(曺斯文)에게 부치는 바이다.


白奄寺, 高麗侍中杏村李文貞公願刹也。子平齋文敬公, 孫容軒國老, 承先志, 擇子孫之出家有操行者, 或選緇徒之有聲望者, 主寺, 相傳護守, 百有餘年。頃者。杏村外曾孫判禪宗事松隱蒙大師, 住是寺。其高弟曰‘道庵成上人’, 松隱傳之道庵, 道庵亦山門之有宿望者。駐是寺, 今幾三十餘年, 宣揚道風, 高禪韻釋, 歆仰爭趍, 如蟻慕羶。仍念居正昔謁松隱興天寺, 松隱以居正爲族姪, 待遇欵至, 仍索松隱說, 松隱還向白庵。居正作說, 因道庵奉寄。後松隱語居正曰:“子之說, 深得老僧本趣。” 顧語道庵曰:“當誌之。” 未幾, 松隱示寂, 今思松隱不得見, 見道庵, 聊復自慰。道庵本楊州佛巖里人, 居正別業, 亦在其鄰。道庵, 弟於我五歲, 往復相從, 幾五十年。上人常駐錫白庵, 或來京師, 必先訪我, 今春, 來興天寺結夏, 秋序漸凉, 亦復還山, 再來留別。且曰:“白庵, 鐵城子孫世守之願刹, 公亦杏村之外玄孫, 願得一語, 永爲山門之榮。” 居正曰:“杏村內外子孫, 今簪紱立朝者幾千百人, 至有貴接椒房戚里者, 雖非眇末外孫如居正者, 亦必有張皇者, 復何言哉?” 姑書絶句五首奉送, 兼寄地主曹斯文云。

 

 

남쪽에 이름난 가람이 이곳 백암이거늘   南國名藍是白庵,

누대엔 조금쯤 옅푸른 이내 서리었겠지   樓臺多少間晴嵐。

언제나 짚신 버선 차림으로 스님을 찾아  何時鞋襪尋師去,

밝은 달밤 쌍계에서 상냥한 얘기 나눌까  明月雙溪共軟談?* 

* 이 절에 쌍계루(雙溪樓)가 있는데, 이 목은(李牧隱) 선생이 그 기문을 썼다.   

 

가을바람 잦아들어 호수는 잔잔하거늘     秋風欲落湖水澄

머나먼 길 행장은 등나무 지팡이 하나      去去行藏一瘦藤。

온 산에 원학이야 당연히 창망할 테고      猿鶴滿山應悵望

청산은 전과같이 흰 구름 겹겹이겠지       靑山依舊白雲層。

 

천하에 명성 드날렸던 행촌 이 선생의      天下聲名李杏村

원찰을 지켜 길이 보존해야 당연하지       宜教願刹鎮長存。

자손들 나라 가득 얼기설기 하 많지만      子孫滿國多於織

묻노니 어떤 이가 성실하게 수호하리       且問何人衛守勤。

 

송풍과 나월이 이 산문 보호하여주거늘    松風蘿月護山門,

더구나 지주의 깊은 은혜까지 받았어라    何況深蒙地主恩。

사문 조 태수에게 한마디 알려드리노니    為報斯文曹太守,

나 역시 행촌 선생의 외현손이 된답니다   杏村吾亦外玄孫。

 

목은의 힘찬 문장 절 누각 잘 표현했고    牧老雄文賁寺樓,

삼봉의 뛰어난 필치도 풍치있고 멋지네   三峯妙筆亦風流。 

내 졸렬한 시구 소리높여 읽지마오         莫將拙句高聲讀,

산신령이 고개 끄덕이지 않을 줄 안다오  知有山靈不點頭。

 

《사가집(四佳集)》 권45 〈백암사로 돌아가는 도암 상인(道庵上人)을 보내다[送道庵上人還白奄寺]〉

한시, 계절의 노래(207)


중국 강소송 양주 수서호瘦書湖



죽림사에 부쳐(題竹林寺)


[唐] 주방(朱放) / 김영문 選譯評 


세월은 사람 삶

재촉하는데


안개와 노을

이곳에 많네


은근한 죽림사

여기 절집을


다시 또 몇 번이나

올 수 있으랴


歲月人間促, 煙霞此地多. 殷勤竹林寺, 能得幾回過.


오늘은 매화산 청량사에 들르는 날이다. 가을 단풍 속 선경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다. 경향 각지의 도반들과 오랜만에 두런두런 격조했던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한시 몇 수를 준비하여 조촐한 저녁 시간을 즐길 것이다. 가을 저녁 산등성과 산골짝으로 두루 퍼져가는 그윽한 범종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아마 하늘에서는 반달을 지난 가을 달이 수만 골짝 개울을 비출 것이고, 어쩌면 그 공산명월을 스치며 날아가는 이른 기러기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을벌레 소리는 이미 다 잦아들었겠지만 잎새마다 스미는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고즈넉한 산사를 그윽히 채우리라. 젊은 시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집을 나서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젖곤 했다. 특히 산행을 떠날 때는 더욱 그런 생각이 심했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는지 까닭을 모르겠다.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오히려 꼭 다시 오리라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다짐 역시 터무니없는 생각이긴 마찬가지였다. 가야산과 매화산 일대는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이 은거한 곳이다. 최치원 선생은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나는 이제 서쪽으로 떠난다. 여기 내 지팡이를 꽂아두겠다. 이 지팡이에 새싹이 돋아 무성한 나무로 자라면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라. 짜이젠!” 그 지팡이가 아름드리 고목으로 자라나 여전히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오늘 어쩌면 최치원 선생을 만나 한 수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라 향가를 읊으시고, 당나라 때 중국어를 하시려나? 제목의 죽림사는 학림사(鶴林寺)로 된 판본도 있다. 죽림사면 어떻고 학림사면 어떠랴... 또 청량사라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한시, 계절의 노래(206)


논산 명재고택



술이 익다(酒熟) 첫째


[明] 굴대균(屈大均) / 김영문 選譯評


빚은 술 원액 새로 내와

그 맛이 달콤한데


아이들은 지게미 먹고

아버지는 술 마시네


안타까워라 추수 끝나도

붉은 찰벼 드문지라


포의 선비 더 이상

동쪽 울로 가지 못하네


酒娘新出味如飴, 兒女餔糟父啜醨. 恨絕秋收紅糯少, 白衣無復到東籬.


이런 시를 올리면 틀림없이 어떤 분은 왕조 시절 한가한 유생의 비현실적 신세타령이라고 비웃을 것이다.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벼슬할 것 다 한 후 시골로 내려와 고고한 은사인 척 폼을 잡는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판하는 분들 대부분도 현재 노동자 농민의 현장에서 동떨어진 삶을 사는 분들이다. 책상 앞에 앉아 관념 속 색깔론에 물들어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자들이 프롤레타리아연 하지 말라고 엄히 추궁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런 추궁을 한다면 그래도 이해할 만하지만 대개는 부르주아나 프티부르주아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하는 체 한다. 하지만 이들이 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편을 든 적은 거의 없다. 늘 양쪽 중간에서 눈치를 보다가 대개 돈과 권력이 있는 쪽으로 빌붙곤 했다. 흥미롭게도 그 입장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봉건시대 유생과 거의 다를 바 없으니 이건 무슨 아이러니인가? 1980년대에 민중문학론이 유행할 때 민중이 문학창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강력하게 대두한 바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영향 때문인지 일부 고고한 지식인들은 지금도 왕조시대의 벼슬아치들에게조차 민중 또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을 요구한다. 자신들은 민중문학론 자체를 부정하면서 말이다. 물론 왕조시대 유생들의 가식적 경향을 덮어두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본적으로 ‘이민위천(以民爲天)’의 민본주의를 정치의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의 허실을 지금 현실로 끌어오는 문제는 또 다른 토론 주제에 속한다. 현재의 논리로 과거의 현상을 재단하여 남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현재에도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비민주적 행태를 일삼는 인간들이 부지기수다. 어릴 적 농번기가 되면 우리 집 안방 아랫목에는 늘 술단지에서 술이 괴는 소리가 뽀글뽀글 들리곤 했다. 봉건 조선시대 가장 말기에 태어나신 우리 아버지는 그 술을 드시며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우리도 몰래 술단지에서 그 술 원액을 떠마시며 술에 취해 비틀거리곤 했다. 이 시를 지은 굴대균이 어떤 사람인지는 인터넷에 자세하다.

  1. 연건동거사 2018.10.21 12:25 신고

    저런 류의 민농시가 백프로 그렇다고는 할수 없겠지요. 그 안에는 사람이 측은지심을 느끼듯 측은함때문에 시를 남긴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민농시는 그렇게 모든 시를 평가하기에는 너무 숫자가 많습니다요.

  2. 연건동거사 2018.10.21 12:34 신고

    https://www.green-grace.com/sites/default/files/styles/colorbox_full/public/products/img/00%E8%AA%BF%E6%95%B4%E5%A4%A7%E5%B0%8F00%E7%B4%85%E7%B3%AF01%E8%AA%BF%E5%85%89.jpg?itok=SyzkPDql

    붉은 찰벼.

맹호연의 죽음을 곡한다[哭孟浩然] 


[唐] 왕유(王維)


죽은 친구 다시 볼 수 없는데

한수는 오늘도 동쪽으로 흐르네 

묻노니 양양 땅 늙은이여   

채주엔 강산이 텅 비었는가  


故人不可見 

漢水日東流 

借問襄陽老 

江山空蔡州




맹호연은 당대 중기 저명한 시인으로, 동시대를 살다간 왕유와는 절친이었으니, 둘은 소위 전원시라 해서 전원을 소재로 하는 시들로 일세를 풍미했거니와, 그런 까닭에 이 둘은 항용 왕맹(王孟)이라 병칭되었다. 양양 땅 늙은이란 맹호연이 지금은 호북성에 속하는 양양(襄陽) 출신임을 빗댄 말이거니와, 그가 죽어 허무 허탈하기 짝이 없는데 하염없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한수(漢水)란 장강 지류 중 하나로 섬서성 남부 미창산(米倉山)에서 발원해 호북성을 통과해 무한(武漢)에서 장강에 유입한다. 

채주(蔡州)란 일명 蔡洲라 하는 곳으로, 바로 맹호연 고향이다. 《전당시全唐詩》에 이 시를 수록하면서 이르기를 “岘山 동남쪽 1리 지점에 채주蔡洲가 있으니, 채모(蔡瑁)가 산 곳이라 해서 그리 부른다”고 했다.  

그런 땅 늙은이요, 절친 호연이 죽었으니, 이젠 그곳 강산은 텅비었다고 말했으니, 상실에 대한 슬픔이 절절하기만 하다. 

《전당시》에 이르기를 “이때 (왕유는) 전중시어사이자 지남선으로 양양에 이르러 이 시를 지었다(时为殿中侍御史,知南选,至襄阳有作)”고 했으니, 이에 근거할 때 이 시는 唐 玄宗 開元 29年(741)에 썼음을 안다. 




머릴 쳤다. 오늘 그리해야 할 작은 까닭이 있어서다. 

요저납시, 공장에서 한참 조는데 어딘지 전화가 와서는 아리까리한 기관 누구라 하면서 이르기를 블라블라 북콘서트를 하니 나와 달래나 어쩌래나, 음냐음냐 그러마 하고는 오로지 전화 빨리 끊고 다시 달콤새콤 오수에 접어들 생각에 덜커덩 승낙했더니, 이후 이런저런 연락이 추가로 더 와서 알고 봤더니 난 시다라,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나는 그 주인공 시인 장단맞추기를 해야 한단다. 
그래도 꽤죄죄 덮수룩한 모습으로 나가긴 못내 저어해 만원 주고 동네 이발관서 급하게 친다.

머리를


가시개 전동바리깡 슥삭슥삭하는 소리, 토끼 풀 먹는 소리 같고 한밤중 누에 뽕 갉아먹는 소리 같다. 생살을 떼어내고 뭉탱이로 잘라내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아니하니, 난 드디어 그 어떤 고통 절통도 이겨내는 어벤져스 일원이 되었나 보다.

바닥에 뒹구는 내 살덩이들을 본다. 까만색 하나도 없어 온통 백색이라, 이게 다 조락의 계절 탓이라 해둔다. 

정신없이 훑어대는 수건으로 머리카락 물기 대략 제거 증발케 하곤 주인장 어른 요구르트 하나 내놓는다. 쪽 빨아 마시는데 아침공기 타고 쏴 하니 요구르트 가슴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내린다.

피대 치는 소리, 거품 발라 수염 쳐바르고 면도하는 자취 감춘지 오래지만, 시침은 어찌하여 사십수년전 그때로 뚝딱 거슬러 올라가 바리깡에 뜯기고 뽑히는 내 머리카락에 순감 몸이 움찔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나도 꼰대인가 보다.

쓰레빠 질질 끌고 이발소 나서는데 벼락에 나팔꽃 자주빛 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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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파트담보 2018.10.20 12:20 신고

    글 잘 감삼하였습니다. 가을이 깊어 길수록 내공이 깊은 글이 발표되는 것 같습니다.

  2. 연건동거사 2018.10.21 12:17 신고

    쓰신 글을 보니 가을을 아주 많이 타시누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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