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문화사 관점에서 동아시아 세계 최초의 월드스타는 단연 낙천 백거이였으며, 그 뒤를 이은 이가 동파 소식이라는 말을 나는 여러 번 했다. 백거이가 등장하고, 그가 장한가(長恨歌)를 발표하자, 동아시아 세계는 열광했다. 그는 당대의 기린아였다. 장한가와 비파행(琵琶行) 발표를 비롯해 그가 새로운 시집을 발표하면, 그 시집은 금새 바다를 건너 신라로, 그리고 일본 열도로 퍼졌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보면, 좀 산다는 왜놈들은 병풍마다 장한가 그림으로 떡칠했음을 엿본다.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그의 인기가 시들해질 즈음, 다시 동파 소식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적벽부는 동파를 각인한 최고의 히트 송이었다. 그의 인기는 마이클 잭슨보다, 조용필보다 오래갔다. 동파 이래, 동파를 능가한 월드스타는 없었다. 한때 원굉도(袁宏道)가 나타나 알짱댔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에 비견하는 새로운 월드스타는 20세기 벽두에 와서야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양계초였다. 



사천성 아미산 동파루東坡樓



이규보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는 전란의 폐허에서도 《동파집》을 간행한 사실을 증언하는 글이 있어 아래 전문을 소개한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1권 발(跋) 


전주목(全州牧)에서 새로 중각한 동파문집(東坡文集) 끝에 발함


대저 문집이 세상에 유포되는 것도 역시 각각 한때의 숭상하는 바에 따를 뿐이다. 그러나 자고로 《동파집》처럼 성행하며 더욱 사람들의 즐기는 바가 된 것은 없었으니, 그것은 아마 문장력이 풍부하고 사실을 다룸이 방대하여 그 자액(滋液)이 사람에게 미침이 무궁하기 때문인가?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신진후학(新進後學)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그 《동파집》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그 남긴 향기를 저작(咀嚼)하는 자는 모두 그러하다.

그 모본(摹本)이 전에 상주(尙州)에 있었는데, 불행히 노병(虜兵·몽고병)에게 소실되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완산 태수(完山太守) 예부 낭중(禮部郎中) 최군 지(崔君址)는 학문을 좋아하여 착한 일을 즐기는 군자이다. 그는 이 사실을 듣고 개탄한 나머지 중각(重刻)할 뜻을 두었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호기(胡騎)가 불의에 왕래하여 사세가 위급하므로 주군(州郡)이 소요하여 조금도 편안한 해가 없는지라, 문사(文事)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을 것 같았는데, 태수는 생각하기를,

“옛사람도 전쟁에 임하여 노래를 부르고, 창을 던지고 문학을 강론한 일이 있었으니, 문(文)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이 고을처럼 큰 지방으로서는 이와 같은 사소한 일쯤이야 창졸간에 이룩할 수 있는데, 만일 저 시시한 오랑캐의 일로 해서 우선 미루고 태평한 시기를 기다린다면, 이후 사람도 또 그대로 미루어서 끝내는 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하고, 드디어 단안을 내려 상께 아뢰자, 상도 역시 문학을 좋아하는지라 흔연히 윤허하였다. 그래서 오랑캐가 오지 않는 틈을 타고, 농사 때가 아닌 틈을 이용하여 중각하게 하여 불일 내에 끝내니, 경비가 적게 나고 힘도 여유가 있었다. 대저 일을 견고히 함에 있어 여유작작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러한 시기에 이런 큰 일을 이처럼 신속하게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그의 정치하는 대체도 또한 짐작할 수가 있겠다.

최군이 나에게는 문인이 된다. 그래서 그는 발문을 부탁해 왔고, 나도 역시 최군이 다른 고을의 서적이 유실되는 것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 그 고을을 옮기어 배우는 사람들을 돕는 데 급급한 것을 가상히 여기어, 이처럼 대략 전말을 적어서 그 말미에 쓰는 바이다.

병신년(1236, 고종 23) 11월 일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호부사 태자태보(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戶部事太子太保) 신(臣) 이규보는 서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역) | 1978


全州牧新雕東坡文集跋尾

夫文集之行乎世。亦各一時所尙而已。然今古已來。未若東坡之盛行。尤爲人所嗜者也。豈以屬辭富贍。用事恢博。滋液之及人也。周而不匱故歟。自士大夫至于新進後學。未嘗斯須離其手。咀嚼餘芳者皆是。其摹本舊在尙州。不幸爲虜兵所焚滅。了無孑遺矣。完山守禮部郞中崔君址。好學樂善君子人也。聞之慨然。方有重刻之志。時胡騎倏來忽往。間不容毫。州郡騷然。略無寧歲。則似若未遑於文事。而太守以爲古之a001_515b人。尙有臨戎雅歌。投戈講藝者。文之不可廢如此。以是邑之大也。此一段幺麽事。咄嗟可辦。而若以彼區區戎醜之故。將姑息以俟太平。庸詎知後之來者又因循姑息。便不成吾志耶。遂直斷聞于 上。上亦好文。欣然允可。於是當虜之未來。間農之未作。使之雕鏤。不日迺畢。費不煩而力有餘矣。非夫幹事貞固。綽有餘裕者。孰於此時成大事如此其敏耶。其爲政之大體。亦可知已。君於予爲門人。故託以標識。予亦嘉君之以他邑之亡書。以爲私憂。移之其邑。汲汲於補a001_515c益學子。是以粗書本末。以跋其尾云。時龍集柔兆㴫灘辜月日。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戶部事大子大保臣李奎報序。


*** 내 페이스북 페이지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에 December 25, 2017에 게재한 것을 전재했다.   

Avalokiteshvara with Eleven Faces at the Site of Gulbulsa Temple, Gyeongju
Unified Silla Period (668~935 AD.)

 경주 굴불사지 십일면관음보살

'오세윤의 photogalle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굴불사지 십일면관음상 Avalokiteshvara with Eleven Faces   (0) 2018.12.12
Autumn Colors  (0) 2018.11.04
Gyeongju  (0) 2018.06.04
Tomb of King Shinmum  (2) 2018.05.25
Gyeongju in Peony Flowers  (0) 2018.05.15
Tomb of King Sinmun in Gyeongju  (0) 2018.04.14




어제인가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전' 출품작 중 천수관음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기회가 닿으면, 프랑스 파리 소재 동양전문박물관인 기메박물관 소장 '진짜 천수관음'을 소개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진짜라고 하는 까닭은 천수관음은 팔이 천 개인 관음을 말하지만, 여러 이유로 실제 그것을 구상할 때는 고작 손이라고 해 봐야 마흔개 혹은 마흔두개에 지나지 않지만, 이건 진짜로 팔 천개를 만들고자 한 까닭이다. 물론 이것도 실제 팔은 갯수 천 개는 되진 않겠지만, 마흔개 어간으로 깔짝깔짝 대면서 천수관음입네 하는 다른 것들을 압도하고 비웃는다. 


그렇다면 이 천수관음 정체는 어떠한가? 박물관 설명문은 이렇다. 

 

Avalokiteshvara à mille bras 

Vietnam

Fin 18e-début 19 siecle

Bois laqué et doré

Don Gustave Dumoutier, 1882 MG 26626


아리까리 하겠지?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저걸 고스란히 구글 번역기로 영어로 돌리니 이렇게 나온다. 


Avalokiteshvara

with a thousand arms

Vietnam

Late 18th-early 19th century

Lacquered and golden wood

Don Gustave Dumoutier, 1882 MG 26626


팔 천 개를 지닌 관음으로, 생산지는 베트남, 제작시기는 18세기 후엽 내지 19세기 초엽이라 하며, 재질은 건칠과 금칠을 한 목재라 한다. 주칠과 황금을 어떤 방식으로 칠했는지 나한테는 묻지 마라. Don Gustave Dumoutier, 1882는 아마 구스타베 어쩌고 하는 사람이 기증한 1882년 기증한 것이라는 뜻일 듯하다. 


자, 대략 확인했으니 세부를 보자. 옆모습과 앞모습부터 보자. 





 

그럼 이젠 뒤를 보자. 




 

뭐 이 정도는 되어야 천수관음이라 하지 않겠는가? 


아래는 이 천수관음에 대한 현지 설명문이다. 불어판과 그 영어 자동번역판을 옮긴다. 


L'iconographie de celui ou celle qui incarne la vertu bouddhique de la Compassion infinie (Avalokiteshvara) a connu au Vietnam un engouement particulier aux 17e et 18 siècles,dans des monastères bouddhiques d'origine royale des environs de Hanoi. Là, une place particulière pouvait être accordée à une forme très spectaculaire de ce bodhisattva Avalokiteshvara, « celle qui a mille yeux et mille mains ». Ici, une couche de laque d'or lui confère une dimension cosmique très spectaculaire. 


The iconography of the one who embodies the Buddhist virtue of Infinite Compassion (Avalokiteshvara) was particularly popular in Vietnam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in Buddhist monasteries of royal origin around Hanoi. There, a special place could be given to a very spectacular form of this bodhisattva Avalokiteshvara, "the one who has a thousand eyes and a thousand hands". Here, a layer of gold lacquer gives it a very spectacular cosmic dimension. 



뭐 이 정도면 이 천수관음, 고스도치관음이라 해야지 않겠는가? 


이제 곧 이곳 소장 고려시대 천수관음을 보기로 한다. 


한시, 계절의 노래(223) 


추운 밤(寒夜)


[淸] 원매(袁枚) / 김영문 選譯評 


추운 밤 책 읽다가

잠조차 잊었는데


비단 이불에 재만 남고

향로에는 연기 없네


고운 사람 화가 나서

서책 빼앗으며


낭군님아 지금 한밤

몇 시인지 아시나요


寒夜讀書忘却眠, 錦衾香燼爐無煙. 美人含怒奪書去, 問郞知是幾更天. 





책 읽기에 미친 사람을 서치(書癡)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책바보’ 또는 ‘책벌레’ 정도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치(癡)’ 자 속에는 매우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멍청하다’, ‘굼뜨다’, ‘미치다’, ‘빠져들다’, ‘천진하다’, ‘병적이다’, ‘집중하다’, ‘정을 쏟다’ 등등... 책에 빠져들어 ‘치(癡)’의 상태에 이르면 이런 각종 증세를 드러낸다. 중국 현대 작가 중에서 서정 수필로 유명한 주쯔칭(朱自淸)은 결혼식 당일 혼례 시간이 됐는데도 예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깜짝 놀라 신랑을 찾아나섰다. 한참이나 찾은 끝에 그들은 서재에서 책 읽기에 빠져든 주쯔칭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오늘 예쁜 신부를 맞이한다는 사실도 잊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가히 애서광(愛書狂)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애서광들에게 겨울은 책 속으로 빠져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기나긴 겨울밤이야 말로 아무 거리낌 없이 깊고 넓은 책의 세계를 유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창밖에 눈이라도 내린다면 말 그대로 “눈오는 밤 문을 닫고 금서를 읽는다(雪夜閉門讀禁書)”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당신의 눈길이 책속에만 머물러 있는 한 당신의 사랑을 갈망하는 고운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을지 모른다. 고운님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시려나? 당장 책을 내던지고 비단 금침 속으로 뛰어드시기를...




국립중앙박물관 주최 '대고려전' 매장을 돌다가 이 고려청자 3점을 마주하고선 무심히 지나치려 했다. 상설전시실 있는 걸 내려다봤구만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류 고려청자는 수량이 적지는 하지만, 그 폼새가 뛰어나다 해서 이런저런 자리에 자주 불려나가는가 하면, 특히 국립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품으로 빼는 일이 없는 까닭이다. 



 

 

특히 맨 왼편 소위 '동자 연적(童子硯滴)'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하긴 저들 석 점 다 내 눈에 익기는 했다. 저 비스무리한 연적을 어디서 봤을까나는 차지하고, 그리 무심히 지나치면서 안내판을 읽어보니, 어랏? 석점 모두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서 빌려왔네? 어쭈구리? 여튼 우리 국박은 일본이라는 사족을 못 쓰니, 뭐, 이래저래 교유도 많고, 서로 먹고 살아야 하니, 좋은 물건 빌려왔겠구나 했더랬다. 


정작 내가 주의깊게 본 것은 이 근방 어디인가 전시실 비름빡에 붙은 이규보 시였다. 천상 저 동자 연적과 같은 류 물건을 보고 읊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멋드러진 그의 시가 걸렸더라. 음, 좋군, 하고는 그것을 폰카로 찍어두었다고 조금 전 생각이 나서 그걸 찾아봤다.  





이규보(李奎報, 1169∼1241) 사후 그의 시문을 망라해 나온 문집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13권 고율시(古律詩)가 수록한 '안중삼영(案中三詠)'은 글자 그대로는 서재에서 마주하는 세 가지 사물을 소재로 읊은 연작시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보면 '소분석창포(小盆石菖蒲)'와 '녹자연적자(綠甆硯滴子)', 그리고 '죽연갑(竹硯匣)'이다. 이규보는 시에 환장해 매일매일 시를 써제꼈으니, 놀라운 점은 그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그 작품 대다수가 주옥을 방불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다작 중에서도 작품성이 특히 뛰어난 것만 고른 편집방침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바람에 수준 덜 떨어지는 작품들이야 나가 떨어졌겠지만, 그 막대한 수작秀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 '안중삼연'도 그렇다 할 만하니, '소분석창포(小盆石菖蒲)'는 작은 화분에 키우는 석창포라는 식물을 노래함이요, '녹자연적자(綠甆硯滴子)'는 푸른 색깔 나는 자기 연적을 제재로 삼았으며, '죽연갑(竹硯匣)'은 확실치는 않으나 벼루 보관함 같은데, 그걸 대나무로 만들었나 보다. 혹 아시는 분은 교시 바란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두 번째 '푸른 자기 연적'이다. '녹자(綠甆)'란 푸른 빛이 나는 자기를 말함이니, 말할 것도 없이 요새 청자라 부르는 기물이다. '연적자(硯滴子)'란 연(硯), 곧 벼루에 물을 따르는 도구를 말한다. 기물 중에 子를 접미사처럼 붙이는 일이 많거니와, 요새는 주전자라 하는 주자(注子)가 대표적이다. 이를 줄여 흔히 연적(硯滴)이라 하거니와, 옛날 먹 글씨를 쓸 적에는 반드시 벼루에다가 물을 부어 먹으로 갈아야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 터이거니와, 그 물을 대는 주전자가 바로 연적이다. 


먹 가는 일....이거 고역이다. 요새는 이조차 편리를 추구해, 아예 먹물을 병에다가 담가서 판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먹 가는 일도 무슨 거창한 수양이 되는양 해서 지질이 똥폼을 잡았지만, 글쎄, 실상은 글을 쓰는 놈이 먹을 직접 간 일은 없고, 이 고된 일은 언제나 동자나 종놈 차지였다. 쉴 새 없이 먹을 갈아야 했으니 그 고통 말해서 무엇하랴? 더구나 그 주인이 시 쓰기에 환장한 이규보 같음에랴? 


그렇다고 종놈이 고분고분했겠는가? 사극이나 사극 영화를 보면, 으레 종놈은 주인한테 옴짝달짝 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일이 많으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라, 그것도 주인 성향에 따라 달라, 예컨대 주인이 후덕하면 종놈도 요래조래 주인을 갖고 논다. 이 고역을 피하는 고전적인 수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단 튀고 보자다. 


한데 이규보 이 시에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무척이나 정겹게 등장한다. 그러면서 그가 사용한 연적이 어떤 모양이고, 그 효능이 무엇인지도 익살스럽게 읊었으니, 이규보를 괜히 천재라 하지 않는다. 마침 이 시 일부 구절을 국립중앙박물관이 근자 개막한 '대고려전' 한 코너 비름빡에 걸쳐 놓았으니, 그것이 무척이나 재미가 있어 그 전문을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서 찾아 옮긴다. 다만, 그 번역은 내가 왕창 뜯어고쳤음을 밝힌다. 


푸른 옷 작은 아이 

흰살결 백옥 같네 

꿇은 모습 무척 공손하고

이목구비 뚜렷하네 

종일토록 게으름 없어 

물병 들곤 벼룻물 주네

난 본디 읊조림 좋아해 

시 쓴 종이 날마다 천 장  

벼루 말라 게으른 종 부르니

게으른 종 부러 귀먹은 척  

천번이나 불러 대답 없어

목이 쉬어서야 그만두네 

네가 옆에 있어 준 뒤로 

내 벼루 마를 날 없다네

네 은혜 어찌 갚을까나

고이 지녀 깨지 말아야지


幺麽一靑童。緻玉作肌理。曲膝貌甚恭。分明眉目鼻。競日無倦容。提甁供滴水。我本好吟哦。作詩日千紙。硯涸呼倦僕。倦僕佯聾耳。千喚猶不應。喉嗄乃始已。自汝在傍邊。使我硯日泚。何以報爾恩。愼持無碎棄。


이 시 일부 구절을 박물관에서 따서 걸어놓은 것이다. 덩그러니 번역만 붙이고, 그것도 일부만 싹뚝 짤라내니 영 그렇다. 이리 한 까닭이야 뭐 안봐도 야동이라, 한자 덕지덕지하고, 전문을 소개하면 관람객들이 질색한다 해서 그리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를 통해 이규보 절창 하나를 만나고, 그것을 새기에 되었으니, 고맙고 고맙도다. 


  1. 연건동거사 2018.12.12 14:33 신고

    잘 봤습니다. 재미있군염.

인월대(隣月臺)


[高麗] 진각 혜심(眞覺慧諶)


높디높디 솟은 바위 몇길이나 되는지 

위에 선 높은 누대 하늘 끝과 닿았네

북두로 은하 물 길어 차 달이는 밤 

차 끓는 김 찬 달속 계수나무 감싸네


巖叢屹屹知幾尋, 上有高臺接天際. 斗酌星河煮夜茶, 茶煙冷鎖月中桂. 



고려의 다실茶室?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전'에서.




인월대가 어딘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그 의미를 미루어 달[月]과 인접[隣]하는 곳에 세운 누각이라 했으니, 아마도 제법 높은 언덕이나 산꼭대기에 세운 건축물 아닌가 한다. 혹 그 실체를 아는 분은 가르침 구한다. 이 시 첫 두 구절 '巖叢屹屹知幾尋, 上有高臺接天際'는 제목도 그렇고, 그 묘사하는 내용으로 보건대 인월대라는 누각을 묘사한 것이어니와, 이로써 보건대 인월대는 바위산 꼭대기에 세웠다. 


이런 곳에서 어느날 밤 혜심은 차를 달였나 보다. 마침 밤하늘엔 보름달 가까운 달이 휘영청 뜬 모양이다. 달에는 옥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서 불사약을 찧는다 했거니와, 이런 풍경은 보름달 가까운 때가 성립가능한 까닭이다. 초승달이나 그믐달에 무슨 옥토끼나 계수나무가 보이겠는가? 


이 시 압권은 3, 4구이거니와, 차를 끓이는데 부은 물을 작자는 북두로 길어온 은하수라 했다. 북두란 곧 북두칠성이니, 그 모양이 흡사 자루 달린 바가지, 곧 국자다. 이 북두칠성으로 은하를 흐르는 물을 퍼왔다 했으니 말이다. 은하銀河는 글자 그대로는 은빛 큰강물이거나, 별무리가 길게 늘어선 모양을 따라 이리 묘사한다. 


그렇게 물에다가 찻잎을 넣고 차를 끓이는데 김이 모락모락한다. 그 김이 마침 달을 가린 모양이다. 달은 이글거리는 해에 견주어 항용 그것을 온도로 묘사할 때는 冷 혹은 寒으로 본다. 그 찬 기운을 응축한 달에 뜨거운 찻물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맺힌 것처럼 보인 것이다. 


이런 점들로 볼 때 이 시는 분명 선시禪詩에 속한다. 


이 시는 1993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소장 필사본(筆寫本)을 저본으로 편찬한 《한국불교전서》 제6책 소수所收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에 수록되었다.  


그렇다면 혜심은 누구인가? 그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혜심'이라는 항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178년(명종 8)∼1234년(고종 21). 고려 후기의 승려. 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법명은 혜심(慧諶).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완(琬)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사주(社主)가 되어,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면서 수선사의 교세를 확장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출가하기를 원하였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다음해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를 만들어 교화 활동을 하고 있던 지눌(知訥)에게 가서 어머니의 재(齋)를 올린 다음,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힘써 정진하였으며, 지눌은 혜심의 재능을 아꼈다. 


1210년 지눌이 입적(入寂)하자 혜심이 수선사로 돌아가 개당(開堂)하였다. 1212년 강종(康宗)이 수선사를 증축시키고 불법을 구하므로 그가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고, 당시 문하시중 최우(崔瑀)는 그에게 두 아들을 출가시켰다. 고종(高宗)은 왕위에 올라 혜심에게 선사(禪師)에 이어, 대선사를 제수하였으며, 1220년(고종 7)단속사(斷俗寺) 주지로 명하였다. 1234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문인에는 몽여(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다. 


저서로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 『심요』 1편,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1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2권, 『금강경찬(金剛經贊)』 1권, 『선문강요(禪門綱要)』 1권이 있다. 


고종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浮屠)의 이름을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전라남도 강진군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현재 비문은 잔비(殘碑)만이 전해 오고 있으며, 『동국이상국집』, 『동문선』, 『조선금석총람』 등에 그 글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동문선(東文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조선총독부,1919)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 이능화 ,신문관,1918)

집필(김위석,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개막한 '대고려전' 중 한 코너가 고려시대 차문화 섹션이라, 개중 한 구석에 고려인들이 사용한 다기茶器를 비롯한 차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했거니와, 마침 그 벽면에 저 시가 걸려있어 인용해 본다. 번역은 내가 나름대로 다시 했다. 

한시, 계절의 노래(222)

눈을 마주하고(對雪)

[唐] 고변(高駢) /  김영문 選譯評

육각형 눈꽃 날려
문 안으로 들어올 때

청죽이 옥 가지로
변하는 걸 바라보네

이 순간 기쁜 맘에
높은 누대 올라 보니

인간 세상 온갖 험로
모두 희게 덮여 있네

六出飛花入戶時, 坐看靑竹變瓊枝. 如今好上高樓望, 蓋盡人間惡路岐.

눈이 내리면 대개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눈을 처음 보는 아이들조차 즐거워한다. 왜 즐거워할까? 거의 육십 평생을 살아왔지만 잘 모르겠다. 빙하시대의 어떤 기억이 인류의 유전자 속에 남이 있는 것일까? 비보다 가볍고 포근한 느낌 때문일까? 차별 없이 펼쳐지는 드넓고 흰 천지에서 안온함과 평등함을 감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이유가 작용하는지 혹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눈이 내리면 하늘과 땅이 모두 온통 하안 빛깔로 덮인다. 눈 자체에는 아무 특징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눈송이가 모두 보석 같은 육각형임을 알 수 있다. 육각형 안의 결정은 조금씩 다르다. 어릴 때 눈송이의 육각형을 발견하고 매우 신기해한 기억이 난다. 이 때문에 한문으로는 눈을 ‘육출(六出)’이라고도 부른다. 천지를 뒤덮은 하얀 눈 세상은 이렇듯 조그만 보석 육각형이 이뤄낸 거대한 기적이다. 인간 세상의 험한 갈림길과 견디기 힘든 고통은 잠시나마 보석 육각형 아래 감춰진다. 우리는 하얀 눈 세상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소중한 평안이다. 

*** 이 시 저자 고변은 최치원 고용주요 오야붕이라, 종교 관점에선 격렬한 도교 신도다. 그래서 단약, 마약 많이 고아 드셨다.(김태식補) 


수(隋) 제국 마지막 황제인 황태주(皇泰主)는 글자 그대로는 ‘황태皇泰’라는 연호를 쓴 왕조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수 제국 마지막 황제지만, 실은 허울에 지나지 않은 꼭두각시였다. 본명은 양동(楊侗), 죽은 뒤에 얻은 이름인 시호諡號는 공황제(恭皇帝)였으니, 황제 시호에 ‘恭’자가 들어간 글자 치고 끝이 좋은 이가 없다. 604년, 수 제국을 개창한 문제(文帝)의 증손이면서, 2대 황제 양제(煬帝)의 손자로 태어나 619년 7월에 사망했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618년 6월 22일 이래 이듬해 5월 23일이니, 11개월 남짓하다. 재위 기간 황태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아버지는 원덕태자(元德太子) 양소(楊昭)이니 그의 둘째 아들이다. 어미는 소유량제(小劉良娣)다.



사약 마시는 단종. 연합DB



양동은 월왕越王에 책봉되어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에 있었다. 그러다가 618년 4월 11일, 양제煬帝가 우문화급(宇文化及)한테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런 소식이 동도에 전해진 뒤인 같은 해 5월 24일 무진일에 이 일대 실력자 왕세충(王世充)이 원문도(元文都), 노초(盧楚) 등과 더불어 황제로 옹립하니, 이에서 그를 황태주皇泰主라 일컫는다.


황제 취임과 더불어 왕세충을 이부상서吏部尚書로 삼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했다. 세충과 더불어 진국공陳國公 단달段達, 내사령內史令 원문도元文都, 내사시랑內史侍郎 곽문의郭文懿, 황문시랑黃門侍郎 조장문趙長文, 내사령內史令 노초(盧楚), 병부상서兵部尚書 황보무일(皇甫無逸)이 새로운 황제를 보필하며 국정을 장악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칠귀七貴’라 불렀다.


하지만 왕세충이 전횡하자 공신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원문도가 세충을 암살하려다가 그 계획이 단달段達에게 누설되고 이를 통해 세충에게 역습을 받아 패몰했다. 원문도는 죽음 직전 황태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오늘 아침에 죽습니다만 폐하는 저녁에 그리 될 것입니다”고 하니 황태주 역시 흐느껴 울었다.


그런 그가 황태(皇泰) 2년 4월 초 계묘일에 마침내 왕세충에게 밀려 폐위되고 함량전(含涼殿)으로 유폐됐다. 그 이틀 뒤 왕세충은 “대정황제大鄭皇帝”라 자칭하고는 “개명開明”이라 연호를 확정하고는 황제에 취임했다. 그러고는 황태주 양동을 격하해 노국공(潞國公)으로 삼으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양동은 부처에게 의지할 뿐이었다.


5월에 이르러 배인기(裴仁基)와 배행엄(裴行儼) 부자가 왕세충을 시해하려다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화근이 양동에게 있다고 판단한 왕세충에게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그해 6월, 왕세충은 조카 왕인(王仁)과 가복家僕 양백년(梁百年)을 황태주 처소에 보내 짐독으로 죽음을 내렸다. 이 자리에서 황태주는 왕세충이 나중에 황제 자리를 돌려준다는 약속을 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죽음을 피하려 했으니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하게 남아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황태주는 짐독을 마셨지만, 죽지 않자 목졸림을 당해 생을 마쳤다. 죽음에 이르러 황태주는 향을 사르고 예불하면서 “부디 제왕의 존귀한 가문에서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이때가 겨우 16세였다. 



천수관음千手觀音은 팔이 천 개나 달린 관음보살이란 뜻이다. 그의 팔은 가제트의 그것이다. 팔이 그만큼 많으니, 그 팔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데 이 천수관음을 흔히 영어로는 Thousand-armed and Thousand-eyed Avalokiteshvara라고 하거니와, 아발로키테슈바라가 관음보살에 대한 산스크리트어에 가까원 소리 표기다. 이를 보면 이는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인 셈이다. 두 개의 싸우전드 중 어디에서 방점을 두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나는 후자에다가 방점을 더 짙게 찍고 싶다. 관음보살을 흔히 지혜의 상징으로 간주하거니와, 그의 이런 특징은 arm보다는 eye에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다. 





천수천안관음은 불교의 여러 갈래를 말할 적에 흔히 밀교 전통이 강한 것으로 본다. 이른바 초기 불경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 관음이 득세를 구가하고, 이윽고 보살 신분으로 때로는 그 권능이 실은 부다의 그것을 능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위력 만땅한 변종으로 후대에 등장한 것이 천수천안관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개막한 '대고려전'을 통해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금동십일면천수관음상金銅十一面千手觀音菩薩坐像은 우선 이름부터 풀어야겠다. 이는 금동/십일면/천수/관음상으로 끊어 읽는다. 이 긴 명명법에서 core는 관음이 아니라 '像'이다. 적어도 구문상으로 그렇다는 뜻이거니와, 이는 우리네 미술사 명명법이 얼마나 패착 투성인인 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像이 중요한가? 관음이 중요한가? 당연히 후자다. 그럼에도 무게 중심은 像으로 가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는 단군조선 이래 없다. 


그러니 저런 길다란 명명법은 像을 주축에 세워놓고, 그 앞 수식어들을 이해해야 한다. 금동이란 그 상의 재질을 말함이요, 십일면이란 얼굴이 11개라는 뜻이며, 천수란 팔이 천 개요, 관음이란 그 상의 정체를 말함이다. 따라서 저 말은 금동으로 만들었으며, 얼굴은 11개요, 팔은 천 개인 관음의 조각이라는 뜻이다. 





이 천수관음은 현장 설명문과 그 도록 원고에 의하면, 14세기 고려말 작품으로 간주하거니와, 높이는 81.8cm라 하고, 그 소장품 내역을 '덕수4046'이라 적었으니, 애초에는 대한제국에서 수집 소장한 것임을 미루어 안다. '덕수'란 덕수궁을 말한다.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다가 박물관이 받아간 유물 중 하나다. 그 설명을 이 특별전 도록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천수는 천 개의 손이라는 의미로 이 보살의 능력과 그 표현 방법이 매우 다양함을 상징한다. 천수관음 신앙은 밀교가 발달했던 일본은 물론 순수밀교적 전통이 거의 없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도 관음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 후기에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기 위해 천수관음을 모신 법석法席이 열리기도 했기 때문에 천수관음상과 천수관음도가 상당수 제작되었을 것이나 고려시대 조각상으로는 이 상과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상 2점만 전하고 있다. 천수관음 조각상으로 표현할 때에는 이 상처럼 천수를 대표하여 40수나 42수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에 전부 다른 지물을 들고 있는데, 두 팔로 머리 위 높이 받친 화불을 비롯해서 왼손에 해(日精摩尼), 삼고저(抜折羅), 인장(寶印), 금륜(金輪), 촉루장(髑髏杖), 궁전(宮殿), 경책(寶經), 그릇(寶鉢), 활(寶弓), 소라(寶螺), 포도(葡萄), 보병(寶甁), 견사(羂索), 오른손에 달(月精摩尼), 금강령(寶鐸), 보석으로 장식된 보협(寶筴), 여의주(如意珠), 거울(寶鏡), 군지(軍遲), 염주(數珠)가 확인된다. 모두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 천수경(千手經) 등 천수관음 계통 경전에서 규정하는 바와 일치한다. 선정인을 규정한 경전은 섭무의대비심보타락해회궤(攝無礙大悲心補陀落海會軌)(T1067) 외에 드문데 선정인과 십일면, 그리고 지물의 구성에 있어 이 상과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천수관음도>가 도상적·양식적으로 유사하여 주목된다. 각 지물과 이를 든 손의 손목까지 별도로 주조한 뒤 각 팔에 조립하고 고정을 위해 철못을 가로질러 박은 모습이 확인된다.(양희정)


양희정은 이 원고 집필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 중인 학예직으로 미술사 전공이려니와, 도록 원고들을 일별하니, 비교적 젊은 친구들한테 품빠이를 한 모양이다. 

  




양희정의 저 원고에서도 말했듯이 고려시대 천수관음으로 전하는 실물은 거의 없다. 이런 것으로 압권은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품이 압권으로 꼽히나, 국박이라고 그걸 왜 빌려오고 싶지 않았겠는가? 사정이 여의치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불교 갈래 중에서도 밀교가 무엇이냐 하는 논란은 간단치는 않다고 본다. 뭐, 나는 간단히 생각한다. 푸닥거리 중심이라고 말이다. 양희정이 말했듯이, 이런 밀교 전통이 동북아 삼국 중에서는 특히 일본에서 매우 강하거니와, 이런 면모는 실은 동아시아 3국 박물관을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일본 박물관을 돌다보면 우리가 부럽게 바라보는 점 중 하나가, 그 불교조각의 다양성이거니와, 그 다양성은 실은 밀교가 남긴 것이 절대다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수관음은 액면 그대로 구현하자면 팔 천개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무엇보다 팔 천개를 붙이려면, 그것을 만드는 장인이 못할 짓이다. 천개를 어떻게 만들어 꽂는다는 말인가? 더불어 이걸 주문하는 측에서도 문제다. 돈이 졸라 문제다. 천수관음이라 해서 팔 천개 만들어붙였다간 그 발주자 파산하기 십상이다. 천수라고 하고는 대개 40개, 혹은 42개 만들어 붙인 까닭은 뭐 거창하게 생각할 거 없다. 돈 때문이다. 금강산 1만2천봉이라 하지만, 무슨 봉우리가 만개가 넘겠는가? 사기다. 하지만 이게 순전히 사기가 아닌 까닭은 '약속'이 동반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진짜로 팔 천개를 붙인 천수관음은 없을까? 천개까진 안 되는데, 내가 일전에 기메박물관 소장품을 돌아보니, 진짜로 천개 가까운 팔을 붙인 관음을 봤다. 무식하기 짝이 없어, 이건 뭐 말미잘도 아니요, 산초도 아닌 것이, 온몸에 화살박힌 고슴도치 같았다. 






그렇다면 팔 마흔개, 혹은 마흔두개라고 어디 쉬운 일인가? 이 천수관음 뒤를 돌아보면, 그것을 어찌 박음질했는지가 대략 드러나거니와, 뭐 이런 박음질 혹은 이음질에 지나치게 미술사가니 고고학도들이니 하는 친구들이 매몰되어 그것이 무슨 거창한 발견인양 대서특필하는 일을 자주 보거니와, 사기다. 뭐 몸통 하나에다가 이리저리 말뚝 박듯이 박았다 하면 그뿐이지,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 분은 관음 중에서도 얼굴이 11개다. 그래서 11면이라 하는데, 메두사도 아닌 분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팔 마흔개보다 실은 얼굴 11개 만들어 붙이는 일이 더 보통이 넘는다. 뒤에서 바라보니, 이 천수관음 가제트 팔을 자랑하신다. 두팔 머리 위로 치켜올리고는 또 하나의 얼굴을 들고 계신다. 한데 그 손목을 보니 팔찌를 차셨다. 그 폼새 보아하니 천상 수갑 같기만 하다. 언뜻 보아 포박당한 듯한 손목 모양새다. 


천수천안관음....손이 천개요, 눈이 천개라는 이 분. 그렇다면 실제 팔이 천개요 눈이 천개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는 마음을 말한 것이다. 마음의 손, 마음의 눈을 말한다. 그 마음이 어찌 실제 팔로, 눈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바로 이에서 언설의 역설을 마주한다. 추상을 구상으로 해체하고야 말겠다는 그 원력 또한 간단치는 않아, 마음의 관음을 사람들은 내가 실제로 보고 말을 걸고, 만지는 관음으로 해체하라고 아우성을 치게 된다. 저 조각은 그런 염원이 발동한 결과다. 마음? 마음? 이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걸 구상으로 해체하니, 저런 모양이 되었다. 


한데 이 천수관음 역시 다른 불교조각이나 마찬가지로, 그 구상의 양태는 문화권별로 많이 달라, 우리는 저런 천수관음을 선호했지만, 다른 문화권으로 가면, 좀 이상야시꾸리하다. 


기메박물관 고려 천수관음과 실제 팔 천 개를 꼬나박은 다른 문화권 천수관음은 기회를 엿보아 소개하기로 한다. 


많다. 몇 점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시품이 많다. 지나치게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전시품이 지나치게 많으면 그에 따른 피로감도 없지는 않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고, 나아가 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과 그에 따른 '민족통합'의 당위성을 선전 홍보하는 도구로 역사에서 고려만한 안성맞춤한 소재가 있었던가? 그런 시대 정신에 부응하고자 했음인지, 이번 전시는 '대고려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으니 말이다. '大'한 고려전이라 했으니, 그에 걸맞는 전시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인지, 그와 직접 관련하거나 그럴 법한 명품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가져다 놓았으니, 이를 어찌 소비할지는 순전히 관람객 몫이리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입구.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 '대고려전' 특별전시실은 특별전이 아니라, 상설전시실 고려 코너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상설전시실 고려실이나 고려청자실, 혹은 불교미술실에서 고려라고 딱지가 붙은 것으로 이른바 괜찮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빼어다고 이곳에다 모아놨으니 말이다. 



기린 장식 청자 향로. 상설전시품을 옮겨온 경우다.



중앙박물관 자체 소장품과 외부 대여품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보니 3대 1 내지 3대 2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대여품은 다시 국경을 기준으로 나누건대, 물건너온 것이 제법이다. 특히 보스턴미술관(보스턴박물관)이니 메트박물관이니 하는 미국 쪽에서 대여한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 의외이거니와, 일본 쪽은 의외로 적으니, 이는 이미 알려졌듯이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도둑넘들이 대마도로 쳐들어가 한반도에서 유래한 불상 2점을 훔쳐들여왔으나, 말도 안 되는 내셔널리즘 논리로 한국정부와 한국 사법부가 개중 1점만 달랑 돌려보내고 나머지 한 점은 포로로 잡은 박제상마냥 그 반환을 거부하는 데 따른 반작용이라, 대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헤이안시대 아미타(왼)와 대일여래(오른). 도교국립박물관 소장.




주최 측에 의하면, 이번 특별전 출품작 총수량은 450여 점이라 한다. 특별전은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들한테는 언제나 갈림길에 서게 한다. 양으로 승부할 것이냐 질을 내세울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기 마련이다. 물론 막상 현장에서 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런 선택에 강요받지 않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양으로 승부한다는 말이 그들한테는 치욕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은 그들이 의도했던 하지 않았건 말할 것도 없이 수량으로 겁박하고자 한다. 상다리 부러지도록 음식 차려놓았으니 골라서 드십시오, 맘껏 드십시오, 배 터지도록 드십시오. 이에 초점이 간 전시라고 나는 본다. 그래서 나쁘다? 그런 말은 하고 싶지도 않다. 때로는, 아니,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 양으로 압도하는 전시가 의외로 효과는 큰 법이다. 




나란히 앉은 고려 불상님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이번 전시가 수량이 많다고 비판적으로 내가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요리했는지, 포장을 잘 했는지, 홍동백서는 맞는지, 그런 점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 않다. 이 측면에서 분명 이번 전시는 아쉬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국박 전시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인데, 나는 국박 사람들이 전시를 할 줄 모른다고 본다. 그네들은 적어도 국내에선 최고라 자부할지 모르나, 그 전시기법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거니와, 이번 전시에서도 이 전시기법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다. 국박은 배워야 한다. 전시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처절히 배워야 한다. 


전시품이 많은 까닭에 질은 당연히 묻힐 수밖에 없다. 나는 좋은 전시란 보물찾기 혹은 편식이 아니라 본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유물이라 해도, 그 전체에서 그것이 빛나게 하는 그런 전시야말로 최고의 전시로 꼽는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전시, 모든 전시품이 전체의 완결품에서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필수품으로서 빛을 발하는 그런 전시를 최고의 전시로 꼽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버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편식이 너무나 많다. 전시 자체가 편식을 유도한 까닭이다. 



문공유 묘 출토 유물.



이번 전시가 끝나면 이번 전시품 중 적어도 '본관 소장'이라 붙은 것들은 도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 도로 제자리는 상설전시실을 말한다. 특별전이 꼭 수장고에 쳐박힌 유물, 혹은 평소에는 구경이 쉽지 않은 전시품만을 선보이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안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 출품작에는 비단 이 자리가 아니라 해도 언제나, 같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을 채우는 유물이 너무나 많은 점은 분명 흠결이라 할 만하다. 이런 흠결은 자칫 왜 이런 자리를 굳이 특별전이라 해서 이름 붙였는가 하는 반론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대여품이다. 왕건상 논란에 참 가오가 상하게 되긴 했지만, 희랑대사상 같은 전시품은 그 자체로도 빛을 보아야 한다. 나는 왜 희랑대사상을 북한에 있는 왕건상과 짝지으려 했는지, 그 까닭을 지금도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왜 이렇게 하고자 했는지, 나아가 이를 통해 국박이 무엇을 선전하고 홍보하며 무엇을 노리고자 했는지는 내가 잘 안다. 기록에 의하면 희랑은 왕건이 스승으로 섬긴 신라말 고려 초 고승이라 하거니와, 그에 착목해 남쪽 해인사에 계신 희랑대사와 북쪽 개성 왕건 무덤 현릉에서 파낸 왕건을 짝지워 줌으로써, 남북 화해 혹은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선전하고자 했을 터이지만, 나는 이런 정치성의 연출에는 생득적인 반감이 있는 사람이다. 



비운 왕건상, 머쓱한 희랑대사.



희랑대사상 그 자체로도 얼마든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왕건인가? 그에 대한 반발이 나로서는 있다. 물론 국박이 기획한 대로 왕건상이 왔더래면 금상첨화였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왕건 보위를 비워두고, 그 자리에 부러 연꽃 종이작품 덩그러니 놓아야 했는지, 그 취지엔 동의하고픈 생각이 없다. 희랑대사만 우습게 만들지 않았나 하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의 과거 고려를 기억하는 사람들한테 이번 전시는 오버랩의 잔영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알기로 국박이 소장한 자체 회화는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이번 전시작 대부분은 국내외 대여품으로 채웠거니와, 개중 상당수가 실은 국박기 개최해 국내외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고려불화대전' 찬조출연품이다. 어제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보스턴박물관 소장 치성광여래강림도를 맞닥뜨리고는 "이 불화가 또 왔네" 했더랬지만, 이런 것이 좀 많다. 



897년 제작 치성광여래와 오성도. 돈황 천불동. 브리티시 뮤지엄.



마침 전시장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이수미 국박 미술부장이 하는 말을 들으니, "좀처럼 만나기 힘든 전시품이 많으니 유의해 달라"면서 "이들 외국 대여품 대부분은 12월까지만 전시하고는 돌려줄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작품이 제법 된다. 고려시대에 고려사람들이 직접 제작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 시대 불교미술과의 비교라는 측면에서 영국에서 대여한 돈황 미술품도 그런 보기 중 하나다. 브리티시 뮤지엄에서 대여한 이런 불교회화 중 수월관음도는 돈황 천불동 수거품이라, 10세기 무렵 작품으로 평가되거니와, 나로서는 관음 손에 든 양류, 즉 버드나무 가지가 무척이나 뚜렷해서 인상으로 남는다. 



10세기 양류관음(서월관음). 돈황 천불동. 브리티시 뮤지엄.



나아가 몇년 전인가? 이탈리아 어느 미술관이 고려불화가 소장되었다 해서 한바탕 화제가 된 적이 있거니와, 이번에 보니 이 작품이 덩그러니 와 있더라. 이걸 기억하는 국박 사람들이 이것만은 빌려와야 한다 해서 대여했을 것이다. 


고려문화와 동시대 다른 문화권 비교라는 측면에서 동원한 전시품들도 충분히 눈길을 줄 만하거니와, 예컨대 미국 메트박물관 소장 11-12세기 대리국 천수관음상은 동시대 고려 천수관음상 같은 데가 이에 해당한다. 천수관음은 그것이 설파하는 불교 정신이야 같겠지만, 그것이 추상을 헤치고 구상으로 해체될 적에는 그 시대 니즈needs에 부합할 수밖에 없거니와, 그 다른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질이 되고, 그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그랜드 디자인을 보면, 문화의 구현 양상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11-12세기 대리국 천수관음. 브리티시 뮤지엄.

 



차후 더 기회를 엿보아 이 특별전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이 기획전에 대한 소개는 아래 기사를 클릭하라. 


세계에 흩어진 문화재 450여점으로 고려를 조명하다(종합)


  1. 아파트담보 2018.12.10 23:57 신고

    화려하진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분 하다고 하면 맞을까요?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