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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320

신형준에 깨끗이 물 먹고는 깨끗이 엎어 버린 수촌리 대롱옥 2005년 공주 수촌리 백제 무덤 두 곳에서 대롱옥 한 점을 일부러 두 동강 내고는 그 무덤에다가 각각 한 조각씩 넣은 사실이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는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독점 보도였다. 문제의 기사를 접한 나는 이건 깨끗이 내가 물을 먹었다고 판단했다. 나는 쓰지 못했는데 다른 기자가 쓴 것으로 첫째 그것이 팩트에 기반하고, 둘째 충분히 다룰 만한 중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할 때, 언론계에서는 이를 물 먹었다고 한다. 그랬다. 나는 신형준한테 물을 깨끗이 먹었다. 다른 기자한테 물 먹은 기사는 대개 아주 간단히 처리하고 말거나, 아니면 아예 다루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이다. 이는 비단 한국 언론만의 특징이 아니라 세계 어느 언론계나 있는 현상이다. 다만, 이 건은 내가 아주 다르게 생각했다. 받아.. 2024. 1. 27.
[문화재청장 정재숙] (2) 임명과 더불어 연판장 돌린 고고학계 중앙일보 현직기자인 정재숙을 임명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문화재 업계 일부에서는 연판장이 돌았다. 역시나 고고학계였다. 이 놈들은 지들이야말로 문화재 업계 전부라 착각하는 놈들이다. 그 연판장은 그놈들 소행이었는데, 성명서를 내기 위한 초고 상태로 바로 나한테 들어왔다. 보니 가관이었다. 첫째 어떤 놈이 썼는지 문장이 주술관계도 맞지 않았고 둘째 주술관계는 고사하고 앞뒤 문맥도 없고 논리도 없었다. 어떤 교수놈이 썼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초고를 누가 썼는지 확인은 못했다. 저런 중구난방 연판장이 주장하는 요지는 결국 이거였다. 문화재는 전문분야이니 전문가가 해야 한다. 중앙일보 기자 정재숙은 문화재 전문가가 아니다. 그 연판장 초고를 막 취임한 정재숙한테 보냈더니, 이 누님 여걸이라 .. 2024. 1. 25.
걸레가 되어 돌아온 불후의 저서 이런 독자도 있다. 반영할 건 하고 그냥 놔두어도 대세 지장없는 건 놔두었다. 《직설 무령왕릉》이 걸레가 되었다. (2017. 1. 24) *** 저 졸저는 내가 해직되고 나서 반년 뒤쯤인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를 통해 출판한 것이라, 그 책을 숙독한 어느 독자가 저와 같이 걸레를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아마 초판이었을 텐데, 저 지적 사항 중에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본 것들은 놔두고, 명백한 오류나 오타 같은 데는 2쇄에서 바로잡았다고 기억한다. 저런 독자가 당연히 감사하기 짝이 없다. 한데 곰곰 생각하면 예컨대 저런 독자가 내 상관이라면? 아찔해지기도 한다. 돈다. 저런 엄청난 일을 벌인 사람은 임형진 이라고 박아둔다. 동명이인으로 저 호남땅 고고학을 독식하는 그 임형진일 수는.. 2024. 1. 24.
어쩌다 검색에 걸린 2015년 [단독] 기사 나는 설혹 단독이라 해서 [단독] 이런 식 개뻥치기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기자랍시고 가끔 저런 짓을 하기도 했으니, 개중 하나로 아래와 같은 기사가 검색에 우연히 걸린다. 다른 자료 찾다가 이것이 걸려들었다. 〔단독〕풍납동식 한성백제 와당 용인 출토 송고시간 2015-06-02 08:31 주거지서 평기와와 함께…풍납토성 바깥에선 처음 〔단독〕풍납동식 한성백제 와당 용인 출토 | 연합뉴스(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성도읍기 백제(BC 18~AD 475)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똑같은 백제 와당(瓦當)이 용인...www.yna.co.kr 저 기사 작성시점이 2015년 6월 2일이라 하는데, 저런 비스무리한 기사를 쓴 기억은 나지마는, 그것이 단독이었는지 어땠는지까지 내가 기억할.. 2024. 1. 22.
발굴보고서 발간 2년 강제화, 그 의미 과거 문화재보호법, 그리고 현재 그에서 분리한 매장법, 더 정확히는 그 시행세칙인지로 기억한다만, 발굴은 완료한지 2년안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 있다. 과거에도 있었지만 이는 사문화하다시피 했지만, 이를 정말로 법적으로 강제화하기 시작한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를 처음 도입할 적에는 반대 일색이었다. 그 내막을 이해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보고서를 제때 내지 않는 발굴 기관과 발굴자는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믿음, 나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2년이라는 기간도 그에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한 차례 연장을 하는 걸로 기억한다. 언젠가 고백한 적이 있지만, 발굴완료 후 2년 안에 보고서 강제화에 나 역시 생각보다 더 깊이 관여했다. 내 신념이 옳다는 믿음 지금도 변함이 없다. 왜 2년안에 .. 2024. 1. 21.
와당과 이형토기異形土器 사이, 배기동 굴욕사건 70년대 중반, 아마도 76년 무렵으로 기억하거니와 당시 서울대박물관에서 석촌동 발굴조사를 했다. 3호분인가 4호분을 배기동 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님이 팠다. 그 무덤앞 아마도 조선시대로 치면 정자각 같은 제사 부속 건물이 있었다. 거기에서 한성백제시대 와당 1점이 튀어나왔다. 크기는 손바닥만하고, 거기에는 생판 보도 듣도 못한 문양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성백제에 기와? 개소리였다. 더구나 와당? 역시 개소리였다. 배기동 선생이 당시 보고서에다가 이 와당을 소개하기를 이형토기異形土器 라 큼지막하게 썼다. 나는 선생님 만나면 지금도 이걸 갖고 놀린다. "와당도 모르는 양반이 무슨 선생질하세요?" 그때마다 선생은 시대의 한계를 논하지만 어쩌리오. 이것이 숙명인 것을... 그래서인가? 한때 백제고고학..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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