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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복원한 도산 춘원 민세 단재 나혜석 AI 증폭 기술을 이용해 저화질 구린 서비스 사진 서비스가 이뤄지는 근세기 안재홍 안창호 이광수 박한영 신채호 나혜석 을 증폭해 봤다. 다른 데서는 문제가 안 생기는데 나혜석 할매는 얼굴 그림자를 수염으로 인식한다. 저런 건 후손질 포토샵을 활용해야 한다. 나머지는 그냥 써먹어도 왜곡 논란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2024. 2. 13.
[문화재 기자 17년] (2) 사천성 대지진과 도강언 2008년 중국 사천성이 무너졌다. 이해 5월 12일 오후 2시28분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 희생자는 사망자가 약 6만9천 명이요 부상자가 약 37만4천 명, 행방불명자가 약 1만8천 명에 붕괴 가옥은 21만6천 동이라 하니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내 기억에 구조 활동에는 한국 사람들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그 직후 중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 이명박은 현지를 찾아 구조활동을 응원하기도 했다. 이런 자연의 대참사에는 으레 그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을 즈음에는 문화재 피해 상황에 대한 후속보도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 발생 얼마 뒤 문화재 역시 피해가 적지 않다는 외신 인용 보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 내 기억에 가장 생생한 문화재 피해 현장이 도강언都江堰이라는 곳이었다. 전국시대.. 2024. 2. 13.
일본어 출판에 대한 생각 최근 필자가 연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영어권과 일본어 출판을 함께 병행하고 있는데 일본어 출판의 경우 출판 후에도 도서관에 거의 잡히지가 않아서 출판과 동시에 원고가 고립되어 사장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반면 영어권 출판은 아무리 작은 출판사에서 출판해도 전 세계에 출판 당일 온라인 서점에 정보가 뜨며 몇 달이면 서울대 도서관에도 그 정보가 나타나서 E book을 제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어 출판의 경우 한국어 출판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이므로 비영어권 출판은 한국어 출판의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며 무조건 학술출판의 최종형태는 영문 출판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 출판은 현재로서는 그 자체 출판과 함께 고립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024. 2. 13.
왕가도, 거란 선제공격을 주장한 매파(2-2) 두 건의 찬반투표 현종이 죽고 그의 아들 덕종德宗이 재위하던 시절 이야기다. 왕가도는 덕종의 장인이기도 하다. 덕종이 칭제하기 시작한 그 원년 1031년 6월 3일, 내내 고려와는 문제를 일으킨 거란 6대 황제 성종聖宗이 사망하고 그 아들 야율종진耶律宗眞이 즉위하니 이가 7대 황제 흥종興宗이다. 종주국으로 섬기는 왕조 황제가 사망했으니 공식 사절 조문단을 파견해야 했다. 그 소임을 공부낭중工部郞中 유교柳喬와 낭중郞中 김행공金行恭이 뽑혀 가게 됐다. 한데 거란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 이를 틈타 부마駙馬 필제匹梯가 동경東京을 근거지로 삼아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태를 어찌 할 것인가? 이때 왕가도는 대 거란 강경파 선두주자에 서서 “거란은 우리와 우호를 맺고 예물도 교환하지만 매번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2024. 2. 13.
거란과 여진, 정복으로 성장한 왕조는 정복이 끝나면 몰락한다 정복왕조는 거의 비슷한 성장 곡선을 겪는데 창업주가 한창 개고생하며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힘의 제국을 이룩하며 이를 바탕으로 두어 세대가 지난 다음에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급속도로 몰락한다. 창업기는 겨를이 없어 거개 땅 따먹기에 주력하고 그러다가 두어 왕이 지난 다음에 거개 재위 오십년 안팎에 달하는 군주가 등장해 그 정복을 완성하고는 내실 다지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모든 정복왕조는 이 전성기를 지나면서 그 성장보다 빠른 속도로 곳곳에서 분열을 일으키다 결국 자멸하고 만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성장동력을 상실하는 까닭이다. 정복왕조 빛나는 급성장 비결은 말할 것도 없이 정복 그 자체다. 하지만 언제까지 마상馬上정치를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또 무엇보다 이제는 내실을 다질 때라 해서 내정에 골몰하나 그.. 2024. 2. 13.
왜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은 이색을 개망신 주었는가? 역성혁명에 동참도, 동의도 못한 목은 이색은 충신의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신왕조 개창에 죽음으로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성계에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막중해 이미 당대에 유학의 종장, 오야붕으로 통했다. 역성혁명 무렵 이색을 죽이라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이성계가 죽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명분이었다. 죽여서 골치 아픈 지식인 한 명 처단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여진족에 다름 없는 성계는 찬탈이란 오명을 두려워했다. 그 찬탈을 선양으로 미화하려면 목은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역시 목은은 거부했다. 실로 소극적이었지만 그는 결코 찬동하지 않았다. 이런 그는 씁쓸히 고려가 패망하는 장면을 목도하고는 4년인가를 더 살다 생을 마감..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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