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15462

한국에서 목판인쇄가 번성한 이유 필자가 보기엔 두 가지다. 첫째는 과거제. 과거제가 시행되어 한적을 읽어내릴 수 있는 식자층 숫자가 확보됨가 동시에 이와 관련된 교보재 서적이 많이 필요해져 목판인쇄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두 번째는 대장경 조판. 대장경이 불교신앙심의 발로로 국가적 규모에서 조판되어 목판인쇄 수요를 계속 창출했다고 본다. 일본의 경우에는-. 첫째로 과거제가 없었다. 헤이시 이후 무가 정권은 과거제로 책읽을 필요도 없고 싸움으로 날밤을 샌 터라 자연히 식자층은 서울에 사는 공경과 산속의 스님들로 국한되기 시작하여, 책의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고, 이러한 상황은 불경에도 영향을 미쳐 신앙심의 발로로 사경을 많이 했지만, 장경 조판까지는 가지 않았고 국가적 규모의 조판사업이 진행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무가 .. 2024. 2. 27.
에도시대 이전 일본의 식자층과 인쇄문화 에도시대 이전 일본 문헌의 특징은 필자가 보기엔, 에도시대 이전에는 목판이건 활자이건 일본에서 찍어 낸 인쇄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없는건 아니고 있긴 있는데 현존하는 에도시대 이전 인쇄물의 태반은 한반도나 중국에서 인쇄본을 들여오거나 (불경이나 인쇄서적 등) 일본 국내에도 사찰에서 목판 인쇄등을 했다고는 하는데, 불경을 제외하면 Printed in Japan은 그다지 그숫자가 많지 않은 것 같고, 인쇄본의 수요는 거의 해외에서 인쇄본 도입으로 충당한 것 아닌가 한다. 고려대장경 인쇄본이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 고사기, 그리고 칙찬와카슈 등은 에도시대 이전 것으로 남아 잇는 것이 거의 필사본인 듯 하다. 한국의 경우 남아 있는 전적의 다수가 그것이 목.. 2024. 2. 27.
붕어를 출판하고 국화를 인쇄하는 틀 난 붕어빵보다는 붕어빵을 찍는 틀을 먼저 본다. 저걸 주시하는 이유는 떡판 다식판이 진화한 형태인 까닭이다. 저걸로 모양을 내는데 그래서 같은 종류의 빵을 틀이 망가지기 전까지는 무한히 찍어낸다. 이 찍어냄이 바로 인쇄印刷다. 그러니 빵을 찍어내는 행위는 출판이다. 국화빵이라고 다르겠는가? 이 역시 국화를 인쇄하며 출판한다. 인쇄도 출판도 이젠 영역을 확대할 때다. 2024. 2. 27.
작은 창에 빛이 밝으니 [小窓多明] 작은 창에 빛이 밝으니 小窓多明 나로 하여금 오래 앉게끔 使我久坐 추사가 남긴 그 숱한 필적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씨다. 칠십이구초당이라 했으니 북청으로 귀양가기 직전 만년 글씨인데, 그 뜻도 뜻이거니와 글자 구성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그야말로 현판으로 만들어 창 위에 걸고 싶은 글귀다. *** related article *** 제주추사관-小窓多明 제주추사관-小窓多明2021.06.17.(목) / 제주추사관 소창다명사아구좌 小窓多明使我久坐 작은 창문에 많은 광명의 빛이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한다. 제주추사관은 생각을 좀 더 정리한 다음 포스팅하도록 하historylibrary.net 2024. 2. 27.
거란의 수도 방위군 앞서 거란군 수도 방위 시스템을 논급했으니 이는 그 시스템을 간단히 도해화한 것이다. 오행五行에서 비롯하는 오방五方에 기초해 중앙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사방에다 호위군을 배치했다. 이 호위군을 피실皮室이라 했으니 황제를 보호하는 피부막과 같은 조직 군대라는 뜻이다. 左피실은 곧 東피실이며 右피실은 곧 西피실이다. 가운데 黃피실이 내 추정에 의하면 아마도 천운군天雲軍이라 별칭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와는 별도로 움직이는 기무사령부였을 것이다. 그런 증언이 없지만 틀림없이 저들은 각기 오방색을 따라 깃발이나 군복 색깔을 달리했을 것이다. 곧 계절로는 봄 기운 싹트는 해 뜨는 동쪽 좌피실은 청색, 남방 자오선 태양이 지나는 여름의 남쪽 남피실은 이글거리는 태양색깔인 주색, 해가 지는 서쪽 우피실은 가을에.. 2024. 2. 26.
복원전의 불국사 복원 전 불국사 사진을 보면 아무리 봐도 원래 신라 때 원래 모습은 일본의 뵤도인平等院[평등원]의 원형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 Editor's Note *** 불국사 담장 앞마당에는 본래 연지라 해서 연못이 있었다. 이는 창건 당시에 이미 그러했고 70년대 발굴조사에서도 흔적은 확인했다. 다만 전면조사를 하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물론 현재도 연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근대에 새로 만든 것이다. 2024. 2. 2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