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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조선 후기 언제부터인지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미명하에 조선후기 지성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흐름이 있다. 필자도 조선후기의 흐름 자체를 이유 불문 부정적으로 보거나 자기 비하적 비판은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조선후기 지성사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느냐의 문제가 있겠다. 예를 들어 숙종대 이후 왕실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소위 황극에 대한 강조, 탕평책 등은 그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노론 중심의 세계관과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자체는 근대적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오랜 유교의 역사에서 흘러오던 두 개의 큰 세계관 중 하나는 이쪽이 잡고 다른 하나는 저쪽이 잡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소위 말하는 실학-. 이른바 중농학파의 토지개혁은 지나친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2024. 1. 26.
아부는 거룩한 충성, 죽일 수 없다 바로 앞에서 거란군에 사로잡힌 고려군 수뇌부 넘버 원 강조와 넘버 2 이현운이 걸은 너무나 다른 길을 소개했거니와 아부는 거룩한 충성이라는 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기자 초년 시절, 아부로 출세가도를 달린 공장 선배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태식아, 너 아부 말이다. 그거 첨에 들으면 참 거북해, 한데 말이야, 자꾸 들으면 그렇게 이쁠 수가 없다?" 결국 자신한테 아부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나는 아부를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줄 몰랐다. 그러니 해고까지 당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 해서 내가 무슨 절의 절개남? 웃기는 소리, 똑같은 놈이다. 거란 성종 야율융서가 진짜로 대인이라면 고려왕한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강조를 풀어주어야 했다. 대신 "제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으.. 2024. 1. 26.
민족의 반역자 이규보(?), 단재가 봤더라면 외국이 중국에 복종하지 않은지 오래됐음으로, 당唐 태종太宗이 장차 만국萬國을 복종시키고 문궤文軌를 통일하려고 하여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불행히도 말을 우리나라에 머무른 채 돌아가지 못하였으므로 사당이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외국이 복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건만 문황제文皇帝는 오히려 분연히 노하여 군사들을 원정遠征에 내보내어 고달프게 하였고 끝내는 몸소 진두에 서서 경략經略하기까지 한 것은 장군도 아는 일이며, 하물며 동경東京은 우리나라의 배읍陪邑인데 감히 군사를 일으켜 국가를 배반함에리까. 입을 벌리고 주인을 향해 짖는 것은 개짐승도 하지 않는 법인데, 모르겠습니다만 장군의 생각에는 이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고금에 하국下國을 정벌하는 .. 2024. 1. 26.
인간 심연을 후벼파는 죽음의 공포, 이현운의 경우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은 강조를 고려사 편찬자들은 당연히 반역叛逆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그의 충절은 높이 살 만했으니, 통주성通州城 남쪽 전투 현장에서 거란군에 사로잡힌 그는 투항하라는 거란군주 야율융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앉힌 강조는 그것을 구실로 토벌을 앞세운 거란 40만 대군을 맞아, 30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당시 고려 조정 최고 실권자로서 직접 전장에 뛰어든다. 보통 최고 권력자는 최전선에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데 견주어 그 자신이 직접 나섰다는 점이 이채롭다. 다만 이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어처구니 없는 판단 미스로 그 자신이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다는 점에서 그는 지장智將이라 볼 수는 없으며, 우직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 2024. 1. 26.
고려거란전쟁 시기에 대한 생각 이 시기는 무신정변 이전이다. 고려 거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이미 고려는 전시과 제도 체제 하에 있었다. 고려거란전쟁에 동원되는 그 많은 고려군은 뭘 먹고 살던 사람들일까. 조선처럼 병농일치 병사들일까 아니면 직역이 세습되는 병사들일까. 고려는 무과도 없었다는데 무과가 있었던 조선시대 군인보다도 더 잘 싸우는 저 고려의 무인들은 도대체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땅에서 솟았을까. 마지막 의문-. 고려거란전쟁에서 저렇게 싸우는 군인들이 결국 무신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싹슬이 해버린 군인들의 직계 조상일까? 만약 그렇다면 거란과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고려의 군인들이 불과 백여년 후에는 그 칼을 문신들에게 돌려 고려 정부를 절단 낸 셈이다. 거란과 고려의 통쾌한 전쟁사 이면에 저 군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한 .. 2024. 1. 26.
고려거란전쟁과 초조대장경 대장경 목판은 어마어마한 문화재다. 필자 생각으로는 이건 한국 같은 크기의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볼륨의 문화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금속활자만 해도 적은 카피수를 다양하게 찍고 싶다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가. 한국적인 인쇄 전통이라 할 것이다. 금속활자는. 반면에 고려시대 대장경 사업은 그 무지막지한 분량. 게다가. 초조대장경은 조판이 1011-1877까지 만들었다는 설이 옳다면 993-1018년의 고려거란전쟁의 후반기와도 겹치는 것이니, 전쟁하랴 대장경 만들랴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대장경을 두 번을 만들고 그 사이에 의천의 교장까지 있었으니 이 당시의 고려는 싸우고 남는 시간에 목판을 죽도록 팠던 셈이겠다. 참고로 지금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1236-1251년에 조판한 것으로 1231-125..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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