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2094 호주 인류 정착은 5만 년을 넘지 못해 호주 원주민 문화는 오랫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현존 문화로 여겨지며, 과학 문헌에서는 이들이 호주 대륙에 도착한 시기를 6만 5천 년 전으로 추정한다.그러나 현대인에서 네안데르탈인 DNA 흔적을 분석한 새로운 유전학 연구는 이러한 기존 연대 측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도착 시기가 5만 년을 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유타 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인 제임스 오코넬James O'Connell이 호주 라 트로브 대학교La Trobe University 고고학자 짐 앨런Jim Allen과 공동으로 수행한 이 연구는 학술지 오세아니아 고고학Archaeology in Oceania에 게재되었다.이들의 연구 결과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현재로부터 43,500년에서 51,500년 전 수천 년에 걸.. 2025. 9. 7. 균역법 줄어든 세수의 충당 앞에서도 썼지만, 균역법은 일반 평민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 손실분을 충당한다, 이것이 요지다. 교과서적인 설명을 보자면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는데앞에서도 썼지만 선무군관 운운은남아 있는 호적을 바탕으로 정밀한 검토를 바란다. 균역법 이후에 선무군관이 되어 새로 군포 1필을 납부하게 된 이 숫자가 많지 않다. 이 숫자로는 전혀 세수 부족분을 메울 수 없다. 게다가 몇 년만 지나 다시 만든 호적을 보면그나마 있던 이들도 전부 다시 유학이나 업무 등 양반 직역으로 복귀하여선무군관이라는건 불과 몇 년만에 껍데기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균역법이라는게 정말 취지대로 평민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였다면그 세수 부족분은 막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무군관이 무력화했다면도대체 어디서 .. 2025. 9. 7. 순조 연간의 호적과 인구 감소 1807년(순조 7년)의 경우 에 나온 당시 인구는 7.561.463명이었는데 그보다 18년 후인 1835년(헌종 원년)에는 6.615.407명으로 거의 100만명 정도가 줄었다. 18년 동안 일어난 거의 100만에 가까운 인구감소는 주로 역병과 기근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인구감소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위와 같은 이야기가 있는 바, 물론 순조 연간이 전통적 감염병에 콜레라까지 성하여 매우 사람이 많이 죽었던 시기임은 분명한데, 저 인구 감소는 단순히 사람이 죽어서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저 시기의 호적을 보면 부실 그 자체다. 원래 있었던 가구가 사라지고, 아예 마을 전체의 호구가 1/3도 기록이 안 된 동네도 나온다. 이것이 물론 감염병 때문에 죽어서 사라졌을 수.. 2025. 9. 7. 백년 정도 빨라 보이는 지주전호제 16세기 말엽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병작제는 배타적 소유권의 확립을 배경으로 하였다. 병작의 운영 원리는 계약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요소로서 작개제와 달리 경제 외적 강제주7에 의해 유지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토지 매매가 활성화되고 지주가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며 강제력 없이 지대를 수취하는 병작제가 위치를 공고히 해나갔다. 15세기까지 주변부에 머물렀던 병작제는 16세기 후반부터 확대되었고, 17세기 중엽을 거치며 급속히 진행되었다.위는 지주전호제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이다. 필자가 호적을 들여다 본 소견으로는우리나라 지주전호제의 확대, 급속한 진전은18세기 중엽 이전은 어렵다고 본다. 왜냐. 18세기 전기만 해도 동네마다 노비 사역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지주전호제가 중심적으로 떠오를 상황이.. 2025. 9. 7.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서얼금고 우리나라의 서얼금고庶孼禁錮는 유별난 데가 있다.이 서얼금고의 이유를 유교 때문,혹은 태종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만,사실 서얼을 몇 대가 지나도 대물림으로 몽땅 금고해버리는 짓은어느 유교 경전에도 없는 일이고,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드문 일이며더우기 태종은 그 스스로 서얼 금고를 명했다기보다,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금고의 전통을 재확인한 데 불과하다.오히려 이전보다 태종의 금고는 그 정도가 완화된 측면이 있다는 점요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서얼 금고가 집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이 되었는지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교나 태종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건 일종의 책임회피이고서얼금고가 된 이유는 어떤 사회적 이유에서 계속 유지.. 2025. 9. 7. 절반도 파악 안 된 1801년 조선 인구 700만 순조실록3권, 순조 1년 12월 30일 임신 4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한성부에서 오부와 팔도의 원호와 인구를 아뢰다한성부(漢城府)에서 민수(民數)를 올렸는데, 오부(五部)와 팔도(八道)의 원호(元戶)가 모두 1백 75만 7천 9백 73호이었고, 인구는 남녀가 모두 7백 51만 3천 7백 92명이었다. 실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1801년 경 호적을 보면, 실제 인구의 절반도 호적에 안올라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7백 만 명? 그렇다면 이때 이미 인구가 필자가 보기엔 1500만 명 넘었다. *** [편집자주] ***누누이 말했다.전근대 인구통계는 믿을 수 없다고.인두세 피하려 틈만 나면 누락했다.세금이다.조선총독부가 비로소 근대적 인구센서스를 하는데 이 친구들이 할 때마다 놀랬.. 2025. 9. 6. 이전 1 ··· 204 205 206 207 208 209 210 ··· 368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