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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위는 현행 7인가 8개 분과로 구성되며 사안에 따라 합동분과가 있지만 대다수 안건은 분과별로 진행한다. 분과별로 전문위원 위원이 있지만 전문위원은 꿔다논 보릿자루다. 임명장 받을 때 한번 교육받는게 전부다. 분과별 위원 숫자는 내 기억에 세계유산분과가 7명으로 가장 적고 나머진 열 명 안팎이다. 위원 구성은 문화재청 꼴리는대로라, 성별 지역별 전공별 안배를 한다지만 내실을 보면 정치권 등에서의 낙하산이 많고, 분과 담당과 실무담당 직원이 의외로 지 맘에 드는 사람을 골라 앉히는 일도 절대 과반이다. 


그래서 "어? 저 사람이 왜 문화재위원이냐...문화재의 문자도 모르는 인간이 무슨 문화재위원이냐?" 해서 그 추천 내력을 들여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빈발한다. 문화재 경력 전무에 가까운 놈도 어느날 느닷없이 문화재위원에 진입하는 이유다. 문화재위가 다루는 안건은 문화재 행정 전부다. 거의 모든 문화재행정이 문화재위 심의를 거친다. 


한데 전국 문화재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1. 지역성 

2. 전공성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가 없다. 바로 이에서 한 명이 깽판치는 문화재위 심의 구조가 탄생한다. 예컨대 A라는 지역, 고고학 현장과 관련한 심의가 이뤄진다 치다. 이 경우 A 지역과 관련있는 고고학 전공자가 실제 결정을 독식하는 구조를 이룬다. 나아가 비단 이것이 아니라 해도, 현행 문화재위 의사 결정구조는 한 명이 깽판 치면 결정을 못한다.  문화재위 심의는 아마 다수결로 하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극히 일부 사안을 제외하고 다수결로 이뤄지는 일은 없다.  좋게 좋다 해서 위원들끼리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한 명이 깽판치는 문화재위, 이거 원성이 자자하다. 좀 더 상세한 얘기는 시간나는대로 하기로 한다. 한데 이 한명이 깽판치는 회의.....


이 위원이라는 완장을 찬 이가 문화재 현장을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구토가 난다. 나는 이런 놈들만 팬다. 

"ㅇㅇㅇ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남문지~북문지 성벽 구간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격 규명 등 정비·복원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함"

학술발굴은 거의 예외없이 이런 식으로 이유를 달아 발굴신청을 한다. 한데 그 상당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봉분이 있는 고분 발굴을 예로 들어보자. 발굴을 하건 말건, 어차피 정비 복원은 똑같다. 봉분 흙으로 덮어 봉긋하게 만들고 잔디 심는다. 유물 모조리 꺼내어 빈깡통 만든 다음 엎던 혹은 무너진 봉분 세우는 일이 발굴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성벽 복원 정비? 같잖아서 이건 말이 더 안나온다. 뭐? 정비복원을 위해 발굴해? 그래서 그에서 얻은 정보를 활용해서 성벽 다시 쌓니? 그거랑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쌓자나? 뭐 그렇게 복원한 성벽이 삼국시대 성벽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 발굴을 위한 발굴을 하자나?

말도 안되는 이유 이제는 달지 마라. 그냥 궁금해서 판다 해라.

심심해서 문화재청 홈피에서 문화재위 최근 회의록을 열람했다. 사적 분과를 골랐더니 최신판이 2017년도 문화재위원회 제5차 회의록이다. 이번 문화재위가 새로 선임되고 난 뒤의 첫 회의였다. 회의는 2017. 5. 24 (수요일), 14:00~19:50 원주 한솔오크밸리 리조트 퍼시몬홀에서 열렸다 하며, 출석위원은 이재범, 박광춘, 박소현, 유재춘, 이경찬, 이승용, 이영식, 이재운, 이종욱, 임승빈, 최성락, 한필원, 홍준형의 13명이라 하니, 거의 전원 참석인 듯하다. 역시 첨이라 출석률 좋구만.

그에서 다룬 네 번째 안건이 안건번호 사적 2017-05-004이니, 제목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노출전시관 건립'이다. 우선 제목이 솔깃했다. 그러면서 회의록을 죽 내리면서 그 결정 사안을 보기도 전에 나는 이런 생각했다. 

"또 보류겠구만"

한데 진짜 보류였다. 내가 왜 보류라고 생각했겠는가? 내가 지금껏 보아온 썩어빠진 문화재위원들 생각이 언제나 그랬기 때문이다. 이 썩어빠진 문화재위원들은 매양 매장문화재 보호를 구실로 해당 매장문화재에는 그 어떤 손상도 가면 아니 된다 하고, 그래서 매양 하는 짓거리라고는 흙 덮고 잔디 엎어 보존하는 것이 최고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말이산 고분군에도 그 내력이 관철되었는지는 나는 자신은 없다. 어떻든 그 내력을 보니, 함안군 소재 사적 제515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노출전시관 건립를 위하여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한 사항을 부의했으니, 그 제안 사유에 대해, 

"말이산 6호분의 1:1 재현전시로 아라가야의 특징적 고분구조와 봉토축조의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는 노출전시관을 건립"이라 했으며, 그 주요내용을 보면 야읍 도항리 527번지 일원에 존재하는 말이산 고분군 중 이미 발굴조사가 끝난 고분 중 6호분을 그대로 노출하여 1:1 재현 전시관을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의결 사항은 

"보류 - 현지조사 후 재검토"

였다. 말이산 6호분은 이미 발굴조사가 끝나 속에 있는 내장은 다 끄집어 낸 빈 깡통이다. 그걸 노출해서 보여준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래 저 전시관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니 안 이루니 한다고 치자.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조건부 가결을 하면 되는 것이다. 전시관을 추진하되,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관리감독을 받는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왜 실제 고분을 노출하지 못하는가? 말이산 고분군 발굴조사 왜 했는가? 안 봐도 뻔하다. 정비학술 활용 차원에서 했을 것이다. 발굴하고 내장 다 빼내고 다시 봉분 입혀 그걸 보라고 발굴했던가? 그럴 거 같으면 왜 발굴했느냐? 보여주지도 않을 거 보물 캐기밖에 더 했느냐? 보물캐기 하려고 발굴했던가?

유적 현장에는 그 어떤 것도 손대지 못하게 하는 저 따위 사고방식 자체를 박멸해야 한다. 보여줘라. 무덤 속 보여줘라. 빈깡통을 내장 가득한 통조림통으로 만들어얄 거 아닌가? 보아 하니 말이산 고분군 중에서도 외지게 떨어진 곳이라 해서 6호분을 골랐나 본데, 이 발상도 바꿔야 한다. 가장 중심되는 공간을 차지한 가장 큰 고분을 골라서 그곳을 전시관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 중요한 국가위원회가 설립 반세기가 넘도록 회의록이 없다. 

요새는 녹취를 하지만, 공개되지는 않는다. 

언제까지 익명성 뒤에 숨어 있으려는가?

실명을 밝히면 소신 있는 발언을 못한다는 이유로 회의록 공개를 막는다. 

어떤 시대인데 이따위 구닥다리 논리를 내세우는가?

위원별 발언록 쏵 공개해야 한다.

Living with the Community. 문화재가 살 길이다. 공동체, 시민과 함께하지 않는 문화재는 설 땅이 없다. 하지만 이 말처럼 오해되는 말도 없다. 공동체와 함께한다 해서, 발굴현장 주민공개회가 그 일환인 줄로 착각하는 이가 천지다. 문화재가 시민 혹은 공동체와 함께하는 길은 고고학도들이 발굴해 놓은 현장을 와서 보고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 그 현장 자체를 함께하는 것이다. 

이 함께하는 행위에는 그 문화재현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하는 결정권에 시민과 공동체가 참여한다는 뜻이다. 쉽게 예를 든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문화재는 국민참여재판과 같다. 국민이 주체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문화재는 국민참여재판과 같아야 한다. 

우리의 문화재는 어떠한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그리고 전문가라들 자들이 던져주는 밥상을 일방적으로 쳐먹으라는 구조다. 이걸로는 택도 없다. 발굴현장 공개하는 것으로 어찌 그것을 Living with the Community 라 할 수 있겠는가? 주민대표 참여시켜라. 결정권 줘라. 주민대표나 시민을 자문회의에 섭외하라. 그들에게 간섭권을 주고 결정권을 주라. 

설악산 케이블카 건은 그 경고가 이젠 거부할 수 없는 시대흐름임을 웅변한다.

이영훈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된 직후 나는 카톡을 보냈다. 

두 가지를 요청했다. 

개중 하나가 유리건판 사진 고화질 제공이었다. 

국박에는 식민지시대에 소위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생산한 적지 않은 유리건판 사진이 있다. 

이런 유리건판 사진들 고화질로 무료 제공하면 그걸로도 적지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한 어떤 사업이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걸 내가 다시금 요청하기에는 사정이 마뜩치 않았고, 

더구나 퇴임을 대비해 대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영훈 관장도 느닷없이 관장이 되었다가, 당초 예정 혹은 예상보다는 반년 이상 퇴임이 가까워졌기에 설혹 내가 요청한 사업에 관심이 있었더라도 그럴 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었으리라고 본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박 관장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가 누구건, 유리건판 사진을 필두로 하는 국박 소장 무수한 문화재자료들은 봉인을 풀고 국민 앞에 다가서야 한다. 

국박이 이런 일에 그간 적지 않은 행보를 보인 것은 안다. 

유리건판은 꽤 기초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안다. 

다만 그것이 지금은 공개와는 거리가 멀어, 고화질 건판 사진들이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 

신임 관장에게 이 일을 기대해본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불편해서 미칠 지경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기 마련이다. 

나는 새로운 관장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할 것이다.

유리건판만이 아니라 이미 공개를 시작한 식민지시대 고문서들과 

식민지시대 고적조사 관련 모든 자료를 고화질 서비스를 요구할 것이며 

그것을 체크할 것이다.

기자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말이다.

위태위태하게만 보이던 문화재 행정이 설악산 케이블카 사태로 초토화에 직면했다. 중앙행심위는 지난 15일 위원회를 열어 지난해 12월 문화재청이 내린 설악산 오색케이블카사업 문화재현상변경허가 불허가 처분이 부당하다며 양양군이 제기한 행정심판에 대해 인용 처분을 내렸다.

행심위는 문화재청 행청 처분이 '문화재보호법의 입법취지상 보존·관리 외에도 활용까지 고려하도록 되어있는 바, 문화재청이 이 사건 처분을 함에 있어 보존과 관리 측면에 치중한 점이 있고, 문화향유권 등의 활용적 측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으며, 사업으로 인한 환경훼손이 크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거부한 이 사건 처분은 재량을 잘못행사하여 부당하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당연히 문화재청은 당혹 일색이다. 

이와 같은 행정처분을 뒤집는 행정심판이 다른 데서도 잇따르면서 국가 행정 자체가 중대한 위기를 맞고는 있지만, 이번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심판은 문화재 행정 전반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규제 위주인 문화재 행정이 그간 지나치게 자의적이며 임의적이라는 비판에 줄곧 시달린 데다, 이번 심판이 여타 문화재 행정 전반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내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문화재 현상변경에만 국한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을 줄로 안다. 하지만 이번 심판은 그뿐만 아니라 문화재 행정 전반에 핵폭탄이다. 이에 따라 문화재 행정 전반을 근간에서 뜯어고쳐야 시점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춘천 중도 유적을 보자. 

이 유적은 레고랜드 부지 조성 예정지다. 하지만 발굴결과 청동기시대 유적이 쏟아지면서, 문화재청은 각종 브레이크를 걸어 이전복원하라느니, 일부 구간은 현지 보존하라느니 하는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그 내실을 뜯어보면, 이런 조치들은 하등 법적인 효력을 구비하지 못한다. 해당 지역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아닌데, 더구나 그것을 새로 지정한 것도 아닌데, 오로지 매장문화재 보호라는 이유를 달아 이런 행정조치들을 취한 것이다.

이런 조치들이 앞으로는 모조리 행정심판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문화재현상변경 문제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의 문화재 행정은 구시대의 산물이요 적폐의 덩어리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라는 방어막을 치고는, 그 모든 행정 결정을 위원회에 미루어 버리고는 자신들은 그 방패 뒤에 숨는 짓을 해왔다. 그런 모든 행정조치는 문화재위원회 결정이라는 오로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책임을 회피하곤 했다. 그렇다면 문화재위원회는 어떤가? 

문화재위원회는 권한만 있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 어떤 누구도 잘못된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법이 없다. 집합명사이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그 구성을 보면 모조리 교수 중심이라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만을 일삼는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이번 설악산 건만 해도, 천연기념물인 산양 보호를 구실로 내세웠지만, 케이블카 건설이 산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전문가가 어떤 보고서를 냈으며, 그것이 정작 유효한지도 전연 검증이 되지 않았다. 질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문화재행정은 문화재위원회에 지나치게 비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 권한은 아무런 법적인 효력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들 맘대로 어떤 기준도 없이 어떤 곳은 보존하라, 어떤 곳은 이전하라고 결정한다. 이 따위 국가행정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아무런 책임도 없는 문화재위원회는 이제 생명이 다 했다. 혁파해야 한다. 혁파해서 단순 자문위로 격하하고 규모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

더불어 문화재위원회에 떠넘긴 권한은 청이 직접 회수하고, 그런 행정조치들을 담보하는 법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내가 예로 들었듯이 발굴허가를 왜 문화재위가 심의한다는 말인가? 지들이 무슨 권한이 있다고 발굴허가까지 관장한다는 말인가? 

이를 두고, 특히 그 사업을 무산시킨 주범으로 지목된 도종환씨가 문체부 장관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이를 주도한 역사학계에서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사업에 관여했다가 그 된서리를 맞은 몇 분이 내 주변에 포진한다. 이를 빌미로 국가의 역사 간섭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은 것도 안다. 이를 추진한 역사학계는 정부나 국회는 지원만 하고, 간섭을 하지 말았으면 했겠지만, 이 사업은 원천에서 문제를 안았으니, 그것은 바로 그 재원이 국민세금이었다는 사실이다.

정부 예산이 집행되는 모든 곳에는 그것을 집행 감독하는 정부기관과 국회의 간섭이 필연적이다. 그 구체적 방법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도종환이 대표하는 국회가 간섭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역사학계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나는 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을 감시감독할 책임은 국회에 있다. 그 감시감독을 도종환이 했거니와, 그 감시감독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사태를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이 사업 동북아역사재단이 국민세금으로 집행했다. 나는 언제나 말했듯이 인문학에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 사업 성격에 따라 정부 예산이 지원되어야 하는 곳이 있다. 그것을 구별 못할 정도로 내가 바보는 아니다. 동북아역사지도..이걸 왜 동북아역사재단이 했는가? 

나는 언제나 이를 물었다. 이 사업을 왜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창구를 빌린 국민세금을 투입해야 했는가? 나는 이를 매양 의심했다. 학문의 자유는 첫째도 둘째도 권력에서의 독립이 관건이다. 그 독립을 언제나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 역사학은 정부를 향해 돈달라 아우성쳤다. 국민세금이 투입되는 한, 외부 간섭, 특히 국가권력은 언제나 개입한다. 이덕일을 욕하지만, 이덕일은 그에 간섭할 자유가 얼마든지 있다. 

왜? 국민이니깐. 

거꾸로 말해보자. 이 일을 예컨대 한국고대사학회 자체로 했다면, 이덕일이건 도종환이 뭐라 했겠는가? 국가에 기댄 사업은 언제나 국가의 간섭을 받기 마련이다. 

국가권력 간섭 없는 역사지도....나는 그것을 고대해 본다. 국민세금이 투입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추인하며 국회가 인준한 동북아지도. 그건 바로 국정교과서의 다른 이름이다. 

보도에 의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근자 가야사 복원을 들고 나왔다. 이에 의하면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그는 “국정자문위원회가 지방정책 공약을 정리하고 있다”면서 “그 속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꼭 포함시켜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보도로 새어나온 그의 지시 사항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 고대사가 삼국사 중심으로 연구되다 보니 삼국사 이전의 고대사 연구가 안 된 측면이 있고 가야사는 신라사에 겹쳐서 제대로 연구가 안 됐다”고 했는가 하면 “가야사가 경남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친 역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더 넓다”거나 “섬진강 주변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 남원 일대가 맞물리는데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고 한다.   

왜 가야사인가? 

다시 보도를 보면 문 대통령은 “그렇게 넓었던 역사이기 때문에 가야사 연구 복원은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며 “국정기획위가 놓치면 다시 과제로 삼기 어려울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충분히 반영되게끔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의 이런 지시가 상당히 뜬금없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대통령 자신도 그리 말했다고 하며, 참석자들도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하거니와, 그들이 이러했으니, 나는 오죽 더 하겠는가? 보도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지금 국면과는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운을 떼면서 가야사 복원 사업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꺼내자 참석자들은 “가야사”라며 다소 생뚱맞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이런 지시가 나온 그날, 나는 이 소식을 그날 늦게 접했다. 해직기자니깐 역시 정보 습득이 느린 모양이다. 그날 오후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기환 형이 느닷없이 나랑 동명이인인 홍익대 교수 김태식의 연락처를 문자로 물어오기에, 속으론 “아니 이 영감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기사를 쓰려냐” 하고 의아해 하기도 했다. 홍익대 김태식은 국내 고대사학계에서는 드물에 가야사 전공자로 독자적인 연구영역을 구축했다고 평가된다. 이런 그를 찾는다고 하니, 웬일인가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곳저곳에서 관련 소식이 마구잡이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도대체 대통령 지시의 진의가 뭐냐는 문의도 있었다. 그네들도 모르는 숭고한 대통령의 뜻을 해직기자가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소식이 분명해진 이상 그간 활로를 개척하지 못한 가야사가 이상 붐을 형성할 것이며, 더구나 가야사 전공자들이 바빠질 날이 왔다는 점은 분명했다. 나아가 대통령 지시사항을 보면 이 사업은 아무리 봐도 문화재청이 주무부처가 되어야 하는데, 문화재청으로서는 존재감 각인할 절호의 기회가 역설적으로 주어졌다는 생각도 떨치기 힘들었다.   

실제로 그런 듯하다. 대통령 지시가 나오기가 무섭게 내 주변 인사 중 가야사 전공자인 인제대 이영식 교수는 이곳저곳 불려다니고 인터뷰 요청을 받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내 생각했다. 도대체 가야사 복원을 대통령에게 꺼낸 이가 누구인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시가 나온 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의문을 풀지 못한다.   

내가 아는 문 대통령은 역사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던 사람이다. 그가 유력한 대권 후보로 부상하면서, 나는 이런 점들을 그의 측근에 포진한 사람들을 통해 알아봤지만 대통령은 이런 쪽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에 대한 교양 수준 또한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실은 이런 점들이 못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가야사 복원을 들고 나왔다. 누군가가 분명히 대통령에게 가야사 복원을 펌프질한 것은 분명하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했을까? 

대통령이 거제 출생에 부산 경남을 기반으로 삼는 경남고 출신이라, 혹 이쪽 동문 출신 중에가야사 언저리에 종사하는 이들이 어떤 통로로 모종의 요구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대통령이 속한 경남고 졸업생 동기회장이 마침 고려사 전공인 박종기 국민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이고, 다른 동기 중에는 고고학도로 구석기가 주된 관심사인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도 있어, 나는 내심으로는 이들이 그 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한데 대통령 발언에서 유의할 대목이 있다. 앞서 보았듯이 대통령은 “가야사가 경남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친 역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더 넓다”거나 “섬진강 주변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 남원 일대가 맞물리는데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들이 남아 있다”고 발언했다. 

이 말을 허심히 넘길 수 없는 까닭은 가야 고고학의 최신 성과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의 영향 범위가 경남을 벗어난다는 사실은 실은 주로 최근 고고학 10년래의 성과다. 한데 저 말을 다름 아닌 대통령이 그대로 하고 있다. 분명히 가야사 복원 필요성을 대통령에게 제기한 이가 가야사 전공자임을 말해주는 증거로 보아도 대과가 없을 듯하다.   

대통령 주변에 가야사 복원을 진언할 이가 누구일까? 아무래도 부산 경남을 기반으로 삼는 가야사 전공자들이거나 혹 그쪽 향토사학자들일 수도 있다고 나는 본다. 마침 대통령이 당선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경남을 다녀오기도 했으므로, 이때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가야사를 그가 들고 나온 배경에서 정치적 목적도 무시할 수 없다. 저 얘기를 하면서 대통령은 분명히 영호남 화합을 이야기했다. 가야사 복원이 뜬금없거나 느닷없다 해서 나는 그 필요성을 폄훼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이 가야사건 뭐건, 저런 일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은 거부하고픈 생각이 나는 없다.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움직임은 멈출 수 없다.   

가야사를 복원하라! 

이런 대통령의 지시는 이제 기관차가 되어 달려야 한다. 그렇다고 없는 가야사가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되겠는가? 실체를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지시를 구체화할 가장 확실한 사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사업이다.   

이 가야 고분군은 김해와 고령 함안 등지의 가야시대 고분군을 한데 묶은 일련 유산으로서,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 중이다. 요새 움직임이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조금은 기력이 빠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사업이 최우선으로 이젠 떠오르게 되었다.  

이 경우 문제가 있다. 대통령은 분명히 가야사 복원을 통한 영호남 화합을 내세웠다. 그것에 반드시 수학적으로 맞추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 취지를 살린다면 가야고분군 등재 후보에 호남지역 유산도 이제는 추가해야 할 것으로 본다.

김태식의 考古野談

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6월 호

사비 도읍기 백제 왕가의 공동묘지로 지목되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쪽 지점에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이 있다. 모양이 조금은 독특해 전체로 보면 둔덕을 파고 들어간 땅굴 형식이다. 아마도 사비 시대 백제 무덤 전형이 주로 산기슭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다 돌을 쌓아 묘실(墓室)을 마련한 데서 착상한 디자인일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벽면엔 능산리 고분군 중 유일한 벽화 고분인 소위 동하총(東下塚)에서 발견된 벽화 소재 중 연꽃과 구름무늬를 잔뜩 그려놓았다. 그 내부에는 부여 일대 지형도와 능산리 일대 지형도를 안치하고, 그 뒤 중앙에는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모형물을 놓았다.  

이 전시관의 주인공이 금동대향로임을 보여주는 배치다. 하지만 지금은 백제문화의 아이콘처럼 통하는 이 향로가 고분 전시관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왜냐면 향로는 고분이 아닌 그 인근 지역 능산리 사지(寺址·절터)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향로의 발견을 이끈 사건은 다름 아닌 이 전시관 공사였다는 점에서 아예 무관한 것도 아니다.  

1985년 부여군은 고분 전시관을 지으면서, 공사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로를 만들게 된다. 이 과정에 백제 시대 연화문 와당(蓮花文瓦當) 몇 점이 발견된다. 이런 와당을 쓴 건물이라면 품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당국에서는 1990~91년 중서부고도(古都)개발계획과 맞물려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羅城) 사이 계곡에 위치한 능산리 394번지 등 13필지 사유지 약 3000평을 매입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계단식 논밭이었다. 그리고 이 일대에 대해 1992년 1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유적 분포 범위와 양상 확인을 위한 문화재 시굴조사를 실시한다. 

때는 엄동설한 혹한기였다. 그 결과 건물터와 초석(礎石)을 비롯해 연꽃무늬 수막새를 포함한 기와와 토기가 다량 발견됐다. 지하에 심상치 않은 백제 시대 유적이 존재한다는 징후였다. 이렇게 되자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기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훗날 이곳이 ‘능산리 사지’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중요한 백제 시대 유적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논밭에서 출현한 백제

시굴조사를 토대로 하는 첫 발굴조사가 마침내 닻을 올렸다. 사역 전체에 대한 추후 발굴조사가 대략 완료되면서 밝혀졌지만, 첫 발굴 대상지는 사찰 중심에 해당하는 탑과 금당(金堂)이 있는 구역 양쪽을 담장처럼 막아선 복도형 건물인 회랑(回廊) 중 서쪽 회랑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때 조사 구역을 서회랑지(西回廊址)라고 한다. 

조사는 충청남도와 체결한 학술조사 용역에 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이 맡았다. 투입 조사비는 2800만 원. 조사기간은 10월 26일부터 같은 해 12월 24일까지 대략 2개월이었다. 계절로 보면 늦가을에서 한겨울에 걸치는 시기인 데다 혹한기가 포함된 까닭은 긴급히 발굴 예산이 책정되고, 그것을 연말까지 소진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물가 수준을 고려한대도 3000만 원도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한 조사비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이자 조사단장인 신광섭 현 울산박물관장의 말. 

“그 예산은 나중에 초대 문화재청장이 될 노태섭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장이 지원한 겁니다. 과장 전결 예산 지원 한도가 아마 3000만 원이었을 거예요. ‘금동대향로 발굴은 내가 지원해서 된 거다’는 말을 그분이 지금도 하는데, 이때 향로를 찾았어요.” 

향로가 발견되고 수습된 시점은 12월 12일 한밤중. 조사 내력을 더 파고들면, 이상한 점이 더 있다. 조사 종료 시점이 성탄절 이브인 12월 24일이라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이 허가한 조사 종료 시점은 12월 5일이었다. 더구나 실제 조사한 발굴 면적도 정확한 수치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초 허가받은 면적보다 훨씬 넓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다시 신 관장의 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 같으면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제가 고발당할 일이었어요. 허가받은 기간을 넘기면서 조사했고, 허가받지 않은 지역까지 발굴했으니까요. 그 예산으로는 시굴조사밖에 못해요. 무리해서 조사했지요. 그러다가 금동대향로를 찾았어요. 그 반향이 워낙 컸으니, 이런 일들은 다 조용히 지나갔고, 더구나 이후 능산리 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연간 발굴조사비가 1억 원 넘게 지원됐어요.”  

그러고 보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어쩌면 배짱 발굴이 준 선물인 셈이다. 어떻든 이때 조사 결과 백제 시대 건물지로는 나중에 공방지(工房址)Ⅰ이라 일컫게 되는 제3 건물지와 서회랑지 일부인 제2 건물지, 그리고 서회랑지 바깥 소형 건물지인 제1 건물지의 3개 동이 확인됐다. 문제의 금동대향로는 이 중에서 공방지Ⅰ에서 드러났다. 이곳 유물 출토 양상이나 바닥면 상태로 볼 때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던 공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조사단은 공방지로 본 것이다. 

공방지는 건물 전면이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東向). 규모는 남북 길이 18.12m에 동서 폭 11.18m였다. 나아가 이곳은 대략 같은 크기의 3칸 방으로 구획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위치에 따라 이들 방은 남실(南室)·중앙실(中央室)·북실(北室)로 명명했다. 이들 중 중앙실 내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덩이 흔적 두 곳이 드러났다. 한 구덩이는 남북 길이 72㎝, 동서 너비 48㎝, 깊이 10㎝의 타원형으로, 그 안에서는 제비 꼬리 모양 풍경판과 당초(唐草)무늬를 그린 채색 칠기 파편이 수습됐다. 

배짱 발굴로 찾은 금동대향로

한데 다른 구덩이가 문제였다. 이는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모서리 각도를 죽인 긴 네모꼴인 말각(抹角) 장방형에 가까웠다. 긴 쪽을 기준으로 길이 135㎝에 너비 55㎝, 깊이 50㎝였다. 이곳에서 바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것이다. 조사 당시 상태와 거기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던 양상을 부여박물관이 펴낸 공식 발굴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상부는 황갈색 점토에 모래가 섞인 층으로 덮여 있었다. 이 흙을 제거하자 잘게 부수어진 와편(瓦片·기와조각)과 토기편, 토사(土沙)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사이사이에 각종 금동제품, 금동재료, 칠기편, 토기편, 옥제품 유물 등이 섞여 있었고 그 하부, 즉 바닥 위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채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 수혈(竪穴·구덩이)의 바닥에는 길이 100㎝ 내외, 너비 9.5~13㎝, 두께 5㎜의 나무판자가 4줄로 나란히 깔려 있었다. 이 수혈의 측벽(側壁·양쪽 벽)도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벽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 있지 않았으며, 북서쪽 모서리에서 나무판을 결구(結構·이음)했던 철제 못이 발견되었다. 이 수혈은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는 수조(水槽)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백제금동대향로를 이 목제 박스 안에 넣어 놓았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이 박스를 수조(水槽), 즉 물을 채우는 상자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향로는 발견 당시 상태가 어떠했을까? 다음은 발굴보고서의 그 대목이다.    

“향로는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출토되었는데, 뚜껑은 주연부(周緣部·테두리)가 북쪽을 향한 채 비스듬히 놓여 있어 봉황이 하늘을 향하도록 되어 있었고, 몸통은 대좌(臺座·받침)가 북쪽을 향한 채 완전히 바닥에 누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은 향로가 몸체와 뚜껑이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이어지는 보고서 증언. 

 “이 향로는 향로의 높이와 출토 상황 등으로 볼 때 본래 세워놓았던 것이 넘어지면서 몸통과 뚜껑이 분리된 것이 아니고, 수조 속에 집어넣을 때 뚜껑을 몸통과 분리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향로를 수조에 매장할 때 일부러 분리해 안치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향로를 제외한 다른 유물 출토 상황은 어땠을까? 다시 발굴보고서.  

“그리고 향로가 놓인 부분에는 각종 금속편, 자기편, 토기편, 기와편, 옥제품 등으로 충전(充塡)되어 있었으며, 특히 기와편은 차곡차곡 쌓여 있어 향로를 고의로 퇴장(退藏·묻어 저장)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수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중 일부는 (공방지Ⅰ의) 본채 중앙실 바닥에서 출토된 것과 접합되는 것도 있어 이 수조 내부가 채워진 것이 이 건물이 폐기된 시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은 향로를 포함한 수조 내부 유물들이 폐기된 시점과 폐기된 정황을 추정하는 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보고서 기술을 신뢰한다면 향로를 비롯한 유물은 누군가가 무슨 사연으로 일부러 묻었다. 건물이 폐기된 시점이라 했으니, 아마도 화재 등의 비상시국에서 그것을 지키고자 묻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귀중품이라 생각해서, 그런 비상사태가 수습되고 난 뒤 어느 시점에 다시 꺼내려 했을지 모를 일이다.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일대 전경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일대 전경 [부여군 제공]

부처님 보관인가 했더니…

그렇다면 향로 발견 당시 실제 현장 사정과 그 공개를 둘러싼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로서 실제 현장을 조사한 김종만 국립제주박물관장은 금동대향로를 발견하고 수습한 12월 12일 그날 상황에 대해 “최초 발견 시각은 오후 세 시쯤 넘어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사자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이 처음 나왔어요. 향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부처님 보관(寶冠)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한데 조금 더 파보니깐 보관은 아니더라고요. 향로라는 건 네 시 반쯤 알았을 겁니다.”  

그날 저녁 무렵 박물관으로 들어간 그는 이런 사실을 신광섭 관장한테 보고한다. 

“당시 관장님 댁은 대전이라, 대전에서 출퇴근하셨거든요. 한데 눈이 온다 했는지 어땠는지 해서 그날따라 집에 안 가시고 관사에 계시더라고요. 보고드리니 신 관장님이 ‘그럼 내가 현장에 가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현장 나오셔서 발굴을 직접 지휘하셨지요. 이렇게 해서 현장에서 수습한 향로를 (부여)박물관으로 수습해 온 게 저녁 9시 무렵이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신 관장은 “그날 대전에 있던 집사람하고 애들이 부여로 오는 바람에 내가 대전을 안 가고 관사에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다른 조사원들이 말하는 그날의 회상은 조금 더 상세하다. 이들의 신원을 지금 밝히기는 곤란하므로 일단 익명 처리한다. A씨의 증언.  

“12월 12일 오후 점심 먹고 나서 두세 시쯤 됐을 거예요. 수혈 2개 중 하나는 제가 파고, 다른 한 곳을 B 선생이 팠지요. 저는 일찍 조사가 끝났어요. B 선생이 불러 그쪽으로 가보니 그 수혈에서 동물무늬가 노출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밝혀졌지만, 향로 뚜껑을 장식하는 동물이었어요. 그래서 김종만 학예사님께 보고했지요. 아마 제 기억에는 현장에는 신광섭 관장님보다 김정완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실장님이 먼저 오셨던 거 같아요. 현장에서는 추우니깐 현장을 얼지 않게 잘 덮고 내일 파자고 얘기했던 거 같은데, 관장님이 나오셔서 상황이 변해 그날 밤 다 발굴하고 향로를 수습하고는 박물관으로 옮겼어요.” 

이들 조사원에 의하면, 신 관장이 커피 포트랑 랜턴을 들고 나타났을 적에는 이미 조사 인부들은 다 퇴근한 뒤였다. 믹스 커피 한 잔씩 종이컵에 타서 마시고는 랜턴을 들고 비추는 가운데 간간이 사진촬영까지 해가며 발굴을 계속했다. 수조는 흙이 가득 찬 상태였고 더구나 물까지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순서를 바꿔가며 맨손으로 정신없이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솟아오르는 물을 커피 종이컵으로 퍼내면서 말이다. 그 추운 엄동설한 밤중에 맨손으로 차가운 물이 나오는 진흙을 연신 퍼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향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오동나무 상자에다 옮겨 넣어 차에 싣고는 그날 밤 박물관에 들어갔다. 흙으로 범벅인 향로는 박물관에서 따뜻한 물로 세척했다.  

문화부 장관까지 출동한 발굴 현장

그다음 날 아침, 현장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먼저 출근한 작업반장이 “발굴 현장에 도둑이 들어 유물을 파갔다”면서 얼굴은 사색이 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에는 속이 텅 빈 구덩이와 그 속 나무상자가 덩그러니 노출된 데다가, 그 주변의 간밤에 퍼낸 흙더미에는 각종 금붙이가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습한 향로가 언론을 통해 공식 공개되기는 열흘이 지난 그달 22일이다. 발견·발굴로부터 무려 열흘이 지난 시점이다. 보통 이런 고고학 발견의 대사건은 정부 당국이 즉각 공개하려 하기 마련이다. 정권 홍보에 고고학 발굴만큼 좋은 소재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때는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첫해였다. 그런데도 정권 홍보에는 제격일 법한 향로 발굴 사실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공개됐다. 그 이유에 대해 신 관장은 “상부와 공개 시점과 공개 방식을 두고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여박물관이 독단적으로 공개를 결행할 수는 없으니,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부, 그리고 청와대로 이어지는 라인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지체되었다는 것이다.  

부여박물관에서 진행된 대향로 실물 공개 현장과 발굴 현장에는 이민섭 당시 문화부 장관이 참석했다. 장관이 발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대 이후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정부 차원에서도 향로 발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엿보기에 충분하다. 

이런 대향로 발굴 과정을 보면서 못내 궁금한 점 하나를 신 관장에게 직접 물었다. 왜 향로를 한겨울 한밤중에 발굴하고 수습했느냐고.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 같으면 그리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그것이 출현할 때만 해도 그리 귀한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 귀중한 유물을 현장에다가 그대로 두고 내일을 기약할 수는 없었습니다. 발굴 현장에는 조사원도 있고 발굴 인부도 많습니다. 중요한 유물이 나왔다는 정보가 언제 어디로 새어나갈지도 몰랐고 그리되면 도굴을 부를지 모른다는 우려도 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조금은 무리해서라도 그날 밤 발굴하고 수습한 것입니다.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하지 못한 책임은 제가 통감합니다.”  

1993년 12월 12일 첫 발굴 당시 대향로. 몸체와 뚜껑(아래)이 분리돼 있다.1993년 12월 12일 첫 발굴 당시 대향로. 몸체와 뚜껑(아래)이 분리돼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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