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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惶惚) 왕필주 현행 통용본 노자도덕경 제14장에서 이르기를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 ,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보아도 볼 수 없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夷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므로 希라 하며 잡으로 해도 얻을 수 없으므로 微라 부른다. 이 세 가지는 따져 캐물을 수 없으므로 섞여서 하나이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끊임없이 이어지즌데 이름 붙일 수 없으로 다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니 이를 모양이 없는 모양이며 사물이 없는 형상이라 하며 이것을 일러 황홀(恍惚)이라고 한다. 맞이해도.. 2018. 2. 22.
발광(發狂), 그 유래에 대하여 미친 상태, 혹은 혼수상태에 가까운 실성을 흔히 발광이라고 하거니와 그 이른 시기 사용례는 《노자도덕경》에 보인다. 왕필주 현행 통용본 제12장에 일렀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人心發狂”(다섯 가지 색은 사람 눈을 어둡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는 사람 귀를 멀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사람 입을 맛들이고 말달리며 사냥질은 사람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2018. 2. 22.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생몰년 미상이나, 6세기 중반 무렵 북위(北魏)에 출사했음이 확실한 양현지(楊衒之)라는 사람 저술이다.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齊民要術),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와 함께 북위시대 3대 걸작으로 꼽힌다. 저자 양현지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만성현(滿城縣)인 북평(北平) 출신이지만 행적과 가계 등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姓은 보통 楊이라고 하나 陽 혹은 羊이라 쓴 곳도 있으며, 기록에 따라서는 무군부사마(撫軍府司馬), 봉조청(奉朝請), 또는 기성태수(期城太守)를 지냈다고도 한다. 낙양가람기 序에서 양현지 스스로는 “무정(武定) 5년 정묘년(547)에 나는 공무로 낙양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는 대목이 보이고, 이때 폐허가 된 낙양을 본 안타까움에서 “낙양 안팎으로는 천여 개 절이.. 2018. 2. 22.
조경(造景)의 탄생 2005.03.15 09:35:43 조경(造景)이란 글자 그대로는 경관을 만든다는 말. 이 말이 한국에 등장해 광범위화한 것은 1970년 청와대 어느 회의에서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한다. 청와대 조경담방비서관(1972-79)으로 초빙된 오휘영 박사 증언에 의하면 오박사가 1970년 잠시 귀국했을 때 청와대에서 행한 브리핑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서울공대 건축공학과 윤정섭 교수의 자문을 받은 결과물이라고 했다. (오휘영, '우리나라 근대조경 태동기의 숨은 이야기(1)', 141호 48-51쪽.) 이 조경이라는 말은 서양의 landscape architecture를 옮긴 것이다. 하지만 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쳐라는 말도 그 역사가 140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미국 뉴욕에서 센트럴파크를 만들 당시에 .. 2018. 2. 22.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얼마나 아는가?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얼마나 아는가? 2004. 08. 27-081-0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글은 철종이 발명했다" 가장 최근에 우리에게 소개된 외국교과서의 '한국사 왜곡' 사례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런 왜곡된 한국사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필리핀 역사교과서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다. 일본역사교과서 사태니, 고구려사 사태니 하는 이른바 '한국사 왜곡사태'가 터질 때마다, 철종의 한글 발명 운운하는 등의 외국교과서에 실린 한국사 왜곡 실태 조사 보고는 단골처럼 등장한다. 이런 활동에는 자발적 시민단체가 앞장 서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같은 국책연구기관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 결과는 거의 반드시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다 좋은 일이다. 한글의 철종 발명 운운하.. 2018. 2. 22.
역사왜곡과 역사교육강화는 하등 관계없다 January 29, 2014 석간 《문화일보》 3면인데, 일본에 의한 독도 영유권 도발이 이 무렵 또 있었던 모양이다. 제목만 봐도, 정부 기반 그 반응 혹은 대응책이 요란스럽다. 하지만 내가 언제나 하는 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우리의 역사교육강화는 눈꼽만큼도 관계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역사교육을 게을리해서 저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역사교육을 강화한다 해서 일본이 저런 주장을 굽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함에도 이런 식의 대응이 일어난다. 아래 옛날 칼럼식 내 기사를 인용한다. 제1차 후쇼사판 일본 우익교과서 사태가 한창이던 2001년 6월 12에 송고한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이다. 물경 18년이 흐른 지금, 너무 많은 변화가 있겠지만, 그 기본 논조를 바꿀 생각이 적어도 .. 2018.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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