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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44

제갈량 시를 적은 근대인 조병교趙秉敎(1862-1941) 촉한을 이끌었던 명재상 제갈량이 아직 남양 땅에서 밭갈던 시절, 초당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 이런 시를 지었다 한다. 초당에서 낮잠을 푹 잤더니 창 밖에 해가 뉘엿뉘엿하네 큰 꿈 누가 먼저 깨우리오 평생 나 스스로만 알리니 그가 낮잠자던 초당, 유비, 관우, 자~ㅇ비가 곧 찾아올 초당이다. 그 안에서 꾸었던 큰 꿈은 과연 천하를 3분하는 것뿐이었을까. 그로부터 천 몇백년 뒤, 한 한국인이 붓을 들어 제갈량의 시를 적었다. 퍽 활달한 필치로 거침없이 글자를 잇고 있다. 이 글씨를 적은 이는 금리 조병교趙秉敎(1862-1941)라는 사람이다. 군수, 관찰사 서리 등을 역임한 중견 관료였는데, 글씨에 재주가 있어 함경도 함흥역 현판을 썼다고 한다. 그의 손자가 한국 현대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친 조택원趙澤元(1.. 2020. 12. 4.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1521년 제주 리포트, 기묘명현의 붓끝에서 충암冲菴 김정金淨(1486-1521)이란 분이 계셨다.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중종의 첫비 단경왕후端敬王后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해 사림의 신망을 얻었다. 이후 형조판서까지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파직당하고 제주로 유배된다. 조광조와 친했고 끝내는 그로 인해 사약을 받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분이니 성리학 이념에 철저했을 것 같은 인물인데, 막상 그 문집을 보니 의외의 면들을 보게 된다. 제주목사 부탁을 받았다는 단서를 달면서 한라산, 용, 연못, 오름 신에게 제사지내는 글이 보인다. 심지어 제주의 몇 없는 고찰 수정사水精寺의 중창권선문重創勸善文을 짓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제주 고을의 이모저모를 상세히 보고 듣고 기록을 남기니, 지금도 제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이 바로 그.. 2020. 12. 2.
단지점협丹脂點頰 전화장액栴花粧額 글씨가 담은 화장 1.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던가.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거나 문질러 꾸미는 화장은 단지 아름다워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을 내보이는 매개이자 무기였다. 오죽하면 의거義擧에 비유되었을까. 그렇기에 옛부터 화장은 중요하게 여겨졌고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다. 지금껏 전해지는 숱한 고古 화장용구(유병, 분합, 거울 등등)를 보면 평상시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아가고 다른 이들을 만나보려 한 옛날 사람들(여성만이 아니라)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2. 하지만 현대 이전의 것으로 화장 자체를 다룬 예술작품은 그닥 흔치 않다. 특히나 붓글씨로 화장 이야기를 적은 것은 과연 몇 점이나 될까.. 2020. 11. 27.
한 맺힌 이의 장서인 학부 말이었던가 대학원 초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때는 인사동의 고서점이나 인터넷 경매 등을 기웃거리며 고서를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야말로 책에서나 보던 고서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도 보고,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다는 데 매료되었다. 물론 학생의 주머니 사정이라는 게 뻔해서 제대로 된 걸 살 수는 없었지만, 어쩌다 한 권 두 권을 사서 돌아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 중국판 《문선》도 그 시절 인터넷에서 구한 책이다. 사진으로는 지금까지 보던 조선 책과는 어째 다르다 싶어 신기했고 주인이 붙인 가격도 싸서(액수는 잊어버렸다) 구했는데, 들이고 나서 찾아보니 명말 청초의 그 유명한 급고각 판본이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낙장도 있어 선본은 아니었지만, 어렸던 나로서는 횡재라 하지 않을 수.. 2020. 11. 23.
나까무라상, 천 년도 더 전 옛 이야기를 그리다 1. 옛날 중국 진나라 때, 스님인 혜원법사와 시인 도연명, 도사 육수정 이 셋은 참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혜원법사는 여산 동림사라는 절에 머무르며, 절 앞을 흐르는 시내 '호계'를 건너지 않는 걸 철칙으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스님이 잘 지내는가 싶어서 친구 둘이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웠으랴. 혜원법사는 이야기에 취해 그만 냇물을 건넜다. 그러자 어디선가 범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깨달은 세 사람, 누구랄 것도 없이 껄껄껄 웃었다 한다. 이 장면, '호계삼소'는 이후 유-불-도 세 종교의 화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고사가 되었다. 2. '호계삼소'를 다룬 그림은 적지 않다. 하지만 딱! 떨어지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다가 이 그림을 만났다. 우리나라 사람의 솜씨는 아니.. 2020. 11. 21.
조선중추원이 사들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때는 바야흐로 1777년, 정조 임금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특별히 부탁을 한다. "거 요즘 청에서 라는 책을 만든다지? 가서 한 질 얻어오너라." 왕의 부탁(이라고 쓰고 명령이라고 읽는)을 가슴에 품고 베이징에 간 사신들이지만, 막상 도착하니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는 다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고민고민하다가 이분들, 꿩 대신 닭이라고 강희ㅡ옹정 연간에 만들어진 백과사전(이라고는 해도 오늘날의 백과사전과는 좀 의미가 다르지만) 초인본初印本 한 질을 은자 2천하고도 150냥에 구해온다. 은 한 냥은 상평통보로 네 냥, 대략 20만원 남짓이라니 그 값이 참...어마어마하다. 근데 사오면서도 청나라 관원에게 한 소리를 듣는다. "조선은 글을 좋아한다면서 이제야 이걸 사갑니까? 일본에선 몇십 년.. 2020.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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