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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통치기 조선의 재편은 곧 근대국가 탄생의 생생한 보기다 먼저 이를 위해 무엇보다 상식을 철거해야 한다. 한일합방조약으로 조선이 혹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했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조선왕실은 망하지 않았고 1945년 8월 15일까지 존속했다. 단, 대한제국이란 정체政體가 해체되고 새로운 국가권력이 들어섰을 뿐이다. 국권은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넘어갔다. 국권 상실은 철저히 대한제국 관점이다. 나는 대한제국 관점에 설 이유가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대체한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를 계기로 식민지 조선은 급격한 재편을 맞는다. 어느 정도 재편인가? 쏵 다 끌어엎어야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래의 전통이 면면이 계승되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조선은 탈구축 deconstruction 단계로 접어들었다. 위선 행정조직과 기구가 개편되.. 2024. 2. 27.
은사기념과학관을 위탁운영한 조선교육회란? 3) 조선교육회 조선교육회는 이전에 경성교육회라 칭하였고, 1902년(명치 35) 5월 창립되어 회원은 겨우 20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10년(명치43) 12월 조직을 변경해서 조선교육회로 개칭하였으며, 조선 각 도에 걸쳐 1,400여 명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어서 1915년(大正 4) 9월에 다시 조직을 변경하여 회명을 조선교육연구회로 고쳤으며, 회원은 3,105명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에 그해 10월 30일 기관지 '조선교육연구회잡지' 제1호를 간행(중간에 잡지명을 조선교육으로 개칭)하여, 명실공히 조선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서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22년(치 11) 2월, 새로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자 이 회는 각 도 교육회를 지회로 하고, 각 도 교육회는 각 부府·군郡·.. 2024. 2. 27.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 대정 천황 내탕금으로 비롯한 한국과학의 효시 2) 은사기념과학관 1925년(大正 14) 5월 10일 다이쇼大正 천황 성혼成婚 25주년 기념 축전을 거행하는 때를 맞아 사회교육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내탕금 17만 원이 하사되었다. 이를 주요 재원으로 설비비에 충당하고 경상비는 국고 보조(첫해 보조 예산 5만 원)를 받아, 왜성대倭城臺 구舊 총독부 청사를 이용해 1926년(大正 15) 1월 은사기념과학관을 창립하고 1927년(昭和 2) 5월 10일부터 개관했다. [515] 은사기념과학관은 재단법인 조선교육회 교화부의 사업으로 이를 경영하게 하여 널리 내외의 교화 자료를 수집하고 현대 문화의 축도縮圖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실지로 문명의 혜택을 평이하고 간명하게 전달시키며, 민중의 과학적 상식을 계몽·배양하고, 이용후생이 과학에 근거해 왔음을 이해시키며.. 2024. 2. 27.
북방개척의 동반자: 무우? 윤관 북벌, 그리고 조선 전기의 북방개척 (사군육진) 때, 우리 농민들이 가지고 간 농산물이 무엇이 있을까. 문헌 근거는 많지 않아 보이지만 추정을 하자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단 조선 전기의 개척 때도, 쌀농사는 두만강 유역으로 들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밭농사가 주축이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기장과 조는 반드시 있었을 것 같지만, 보리를 들고 들어갔을까? 확실한 건 무우는 분명히 들고 들어갔을 것이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휴대품 중에 무우씨는 반드시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현지에서 군인들이 농사를 지을 때 무우씨는 반드시 심었다니 사실 무우는 수확이 빠르고 끓여 먹고 구워 먹고 심지어는 날 것으로도 먹을 수 있어 무우는 반드시 심었을 것이다. 2024. 2. 27.
한국에서 목판인쇄가 번성한 이유 필자가 보기엔 두 가지다. 첫째는 과거제. 과거제가 시행되어 한적을 읽어내릴 수 있는 식자층 숫자가 확보됨가 동시에 이와 관련된 교보재 서적이 많이 필요해져 목판인쇄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두 번째는 대장경 조판. 대장경이 불교신앙심의 발로로 국가적 규모에서 조판되어 목판인쇄 수요를 계속 창출했다고 본다. 일본의 경우에는-. 첫째로 과거제가 없었다. 헤이시 이후 무가 정권은 과거제로 책읽을 필요도 없고 싸움으로 날밤을 샌 터라 자연히 식자층은 서울에 사는 공경과 산속의 스님들로 국한되기 시작하여, 책의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고, 이러한 상황은 불경에도 영향을 미쳐 신앙심의 발로로 사경을 많이 했지만, 장경 조판까지는 가지 않았고 국가적 규모의 조판사업이 진행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무가 .. 2024. 2. 27.
에도시대 이전 일본의 식자층과 인쇄문화 에도시대 이전 일본 문헌의 특징은 필자가 보기엔, 에도시대 이전에는 목판이건 활자이건 일본에서 찍어 낸 인쇄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없는건 아니고 있긴 있는데 현존하는 에도시대 이전 인쇄물의 태반은 한반도나 중국에서 인쇄본을 들여오거나 (불경이나 인쇄서적 등) 일본 국내에도 사찰에서 목판 인쇄등을 했다고는 하는데, 불경을 제외하면 Printed in Japan은 그다지 그숫자가 많지 않은 것 같고, 인쇄본의 수요는 거의 해외에서 인쇄본 도입으로 충당한 것 아닌가 한다. 고려대장경 인쇄본이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 고사기, 그리고 칙찬와카슈 등은 에도시대 이전 것으로 남아 잇는 것이 거의 필사본인 듯 하다. 한국의 경우 남아 있는 전적의 다수가 그것이 목..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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