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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종 아닌 강감찬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설화 가운데 '강감찬설화'란 것이 있다. 내용은 거진 엇비슷한데, 강감찬은 99번 유혹을 견딘 남자가 결국은 여우에게 속아서 낳은 아들로 워낙 잘생겼는데 남자가 이래서 쓰느냐고 마마손님을 세 번 불러다 얼굴을 얽게 만들었단다. 그러면서 신묘한 재주를 가져 여우가 둔갑한 신랑을 꾸짖어 죽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 살던 범을 죄 압록강 이북으로 쫓아내버리기도 한다. 이상하리만치 지역에 따른 내용 차이가 없고 일관적인데, 거 참 모를 일이다. 그 설화들을 읽다 보니 정말 진주 강씨의 위대한 조상 강감찬 공께서 여우의 아들인지 아닌지 아리송할 지경이다. 물론 설화는 설화다. 하지만 그 설화를 낳은 계기는 있게 마련인데, 글쎄... 강감찬 공이 남긴 업적이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不可解할 정도로 .. 2024. 2. 10.
참을 만큼 참았다, 정면으로 대드는 고려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소기한 성과를 내지 못한 거란은 게릴라전법을 채택해 고려를 괴롭히기로 방향을 바꾼다. 이른바 치고빠지기 전법이었으니, 그 동원하는 군사 성격에 따라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고려와 거란이 교통하는 거란 동방기지인 동경유수가 거란군을 소규모로 직접 동원해 고려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방법이 있고 둘째 여진을 동원한 간접 타격도 있었으니 둘은 공격 타점도 달랐다. 먼저 동경유수 기점 거란군 타격은 고려 기준으로는 서북면에 집중되었으니, 흥화진을 필두로 하는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집중 타격했다. 반면 여진을 동원한 타격은 한반도 동해안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그 타격 지점은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강릉과 경주가 타격지였으니, 이쪽이 아무래도 동해안 대도회였던 까닭이다. 현종 원년 이후.. 2024. 2. 10.
100년이면 따라가는 양국사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류도 하고 치고 받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재미있는 것은 양국 격차가 아무리 벌어졌더라도 100년이면 따라간다는 것이다. 서기 7세기 후반-. 한반도의 삼국통일로 일본이 한국으로 부터 문화적 보급이 어려워졌을 때 이들은 잘 알다시피 대양을 건너 당나라로 바로 유학하는 길을 택했는데, 그 결과 평균적으로 견당선 두 척 중 한 척은 난파하였다는 것이지만, 반면에 서기 8세기 이후 나라-헤이안시대에는 빠른 속도로 한반도와의 격차를 좁혀-. 잘 알다시피 나라박물관에 가보면 8세기만 해도 일본은 한반도와 별 차이가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시대를 바꾸어 일본이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에도시대가 시작되자 조선의 문예 수준을 쫒아가는데 딱 100년이면 됐.. 2024. 2. 10.
[photo news] 설날은 세뱃돈 땡기는 날 애들이 실종해 가는 시대 애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 집안 분위기를 좌우한다. 저 놈이 있어 집안 분위기가 산다. 2024. 2. 10.
[강동육주를 심판한다] (3) 요사遼史가 말하는 육주六州 우리는 앞서 거란 측 기록에는 한결같이 육주六州라고 등장하는 실체가 고려사에는 한결같이 육성六城이라는 말로 대치한다 지적했고 둘 중에서도 후자가 사실에 부합함도 보았다. 따라서 강동6주江東六州라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그 토대가 된 육주라는 말도 순전히 거란 측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이 말은 이런 검토도 없이 근현대 역사학이 무책임하게 주물한 거란 중심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이 나로서는 수상쩍기 짝이 없어 한국 근현대 역사학은 22사 혹은 24사 중에서는 유독 요사를 개취급 걸레취급함에도 어찌하여 이 문제만큼은 요사를 취해서 저런 용어를 고수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요사를 믿는다면 왜 그 지리지는 버리는가? 웃기지 아니한가? 그 지리지를 취하면 위만조선이건 그 땅에 설치됐다는.. 2024. 2. 10.
붕괴하는 신화, 새로 쓰는 신화 권위는 신비·격리·무지의 합작품이다. 이 세 축 중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권위는 곤두박질한다. 언론 혹은 기자는 모든 시민이 기자임을 표방한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의 등장으로 시궁창에 쳐박혔다. 이젠 그 시민 한명이 언론사인 시대다. 역사학은 이보다 먼저 처참함을 경험했다. 고대사가 맨 먼저 깨졌다. 같은 사료를 보기 때문이었다. 이 꼴이 보기 싫다고 몇몇은 아주 고고학으로 도망쳤다. 난공불락 요새를 만들겠다고 각종 난수표를 그려댔다. 각종 토기 변환 양식이란 걸 무수히 그려대더니 50년 단위로 짜르다가 다시 25년 단위로 짜르더니 요샌 일본넘들 흉내낸답시고 10년 단위 짜르기도 시도한다. 범접하지 말란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 따른다. 한국고고학은 버림받았다. 공룡이라 안심하지 마라. 그걸 두들겨 깨.. 2024.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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