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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노 겐지2

1925년 풍납토성을 답사한 일본 인류학자 기요노 겐지[清野謙次] 일본의 저명한 형질인류학자로 기요노 겐지라는 인물이 있다. 청야겸차 清野謙次 라 쓴다. 1885년에 태어나 1955년에 사망했다. 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독일 유학 뒤에 귀국해서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활동하면서 일본인은 아이누 후손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일본인 독자 형성론 혹은 혼혈론으로 주창해 열렬한 칭송을 받았다. 수집벽이 정신병적이라, 사찰 보물을 훔쳐내다가 잡혀서 유죄판결을 받아 면직되는가 하면, 이 사태로 당시 교토제국대 총장이면서 한국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신화적 인물로 추앙하는 하마다 코사쿠 빈전경작 濱田耕作 이 사임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친구가 길러낸 제자 중에 731부대장이 있어, 이런 인연을 발판으로 생체실험에 깊이 간여한다. 전후 처리에 미국과 일본의 밀약으로 극적으로.. 2024. 2. 13.
기요노 겐지(淸野謙次)의 풍납토성 탐방기(1926) 이 탐방기는 내가 발굴해 일찍이 연합뉴스를 통해 전문을 공개했으니, 아마도 이곳저곳에서 검색이 될 것이다. 이 탐방기는 1925년 을축년대홍수(乙丑年大洪水) 직후 현장을 탐방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보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분명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일 가능성을 지목했으며, 두번째로, 이미 당시에 기와가 출토됐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풍납토성에 대한 이렇다 할 만한 조치라고는 1927년 고적(古跡)으로 지정한 것 말고는 없다. 그것도 당시 현존하는 성벽 구간만 지정했으니, 이것이 대한민국 사적으로 자동 빵으로 재지정되면서, 역시 성벽만 지정되고 말았다. 1967년 이곳을 발굴한 김원룡은 이곳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곳임을 직감했지만, .. 2019.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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