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진흥왕43 비봉에서 조망하면, 진흥왕시대 신주新州 혹은 북한산주北漢山州 주치州治는 구기동 일대! 빛 좋은 개살구..아버지는 부자지만 본인은 정작 청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장성 독거가 천지 사방 서울을 휘젖는 중이라, 그 일환으로 북한산 기슭을 휘젖는 중이라 좀 전에 전화가 왔는데 윙윙 대는 배경음 딱 들으니 비봉이었다. 비봉에 서면 그 특유한 소리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비봉이라 했다. "첨 아니슈? 비봉비가 진흥왕에 의한 유교적 왕도정치 개소리라는 거 딱 느껴지지 않수?" "두 번째요" 웬일로 그짝에서 전화질인가 했더니만, 느닷없이 북한산주 주치州治 문제를 들고 나온다. 그 아래쪽에 장의사며 하는 신라시대 전설 혹은 역사가 서린 곳이 적지 아니해서 심산으로는 그 아래 구기동 일대 어딘가에 북한산주 주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미쳤다고 순수비를 비봉에다 세웠겠소? 그 아래쪽이 주치였으니깐.. 2023. 3. 20. 진흥왕시대 신라 영역은 지도가 축소됐다 진흥왕 시대 신라의 국경선은 최소가 이것이다. 기존에 저 시대 신라 영역이라 표시된 지도는 다 오류다. 보통 이딴 식으로 그리곤 하는데, 왜 오류인가? 저 지도대로라면 진흥왕이 지들 국경선 끄터머리에 서서 여긴 우리 땅이라 표시한 셈이 되거니와,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실제 같은 순수비인 북한산 비봉비 역시 신라 영역 복판이었다. 순수비는 아니지만, 그와 성격이 비슷한 창녕비도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모조리 신라가 장악하고서 그 복판에다가 세운 것이다. 한데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만큼은 지금의 휴전선 혹은 DMZ 같은 데다 적들을 바라보며 성대한 의식을 하면서 그 끝에다가 저걸 세웠다고? 어떤 놈이 저 따위 망발을 일삼는가?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저것을 세운 지점 주변 넓은 땅이 신라 .. 2022. 12. 24. 진흥왕대 국경선 아래 김 단장 쓰신 글을 쓰고 덧붙이면, 신라가 진흥왕 때 동해안을 따라 멀리 북상했는데, 저때 신라는 가다가 멈춘 것이 아니라 종족적인 면에서건 지리적인 면에서건 거의 갈 때까지 간 상태였다고 봐도 옳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신라의 저 동북쪽 경계선은 돌파가 지난하여 그 후 900년이 지난 세종대에야 겨우 돌파하여 두만강 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윤관의 북벌은 여러가지 이설이 있지만 그 북쪽 경계가 진흥왕의 북벌선 이북으로 못 올라갔으리라 본다. 윤관의 북벌 북상 최대를 두만강 넘어 선춘령으로 본 것은 희대의 천재 세종이 육진을 우리 땅으로 굳히기 위한 명분쌓기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실제로 윤관 북벌의 북상치는 지금 황초령, 마운령비정도였을 것이라 본다. 윤관도 이때 지리적 경계, 종족적 경.. 2022. 12. 22. 진흥왕이 확보한 함경도 동해안을 이후 신라가 상실했다는 개소리에 대하여 거의 모든 한국사 개설에 신라사 확장을 설명할 적에 천편일률하는 진흥왕 시대 신라 영토 사정이다. 문제는 진흥왕이 확보했다가 그 이후 신라가 언제인지 상실했다는 부분. 바로 이 대목인데 지금의 함흥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동해안을 진흥왕이 확보했지만 이후 상실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그 아래쪽 한강 유역 일대와 지금의 강원도 전부를 진흥왕이 확보했다는 대목도 웃기긴 마찬가지다. 論한다. 첫째 함경남도까지 신라가 동해안을 확보한 시기는 진흥왕이 아니라 그 훨씬 이전이다. 둘째 그 시기는 최소 자비 마립간 이전이며 내물왕 때도 강원도 동해안은 신라 영토였다. 셋째 신라는 함경도 동해안을 상실한 적이 없다. 넷째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쟁취했을 그 훨씬 이전 강원도 동해안은 일찌감치 신라 영토였다. 다섯째 신라가 동.. 2021. 7. 26. 돌탱이 신라사 연구자들, 수가인隨駕人의 환상을 깨뜨려라! 아래는 대한제국 시대 황제를 보위하는 시위대랑, 실제 군주가 궁을 벗어나 행차하는 장면이다. 덧붙여 조선후기 의례에 보이는 왕의 행차도 또한 있다. 개중 1905년 대한제국 황제 행차를 보여주는 사진만 따로 떼어내면 이렇다. 이것이 전통시대 왕의 행차다. 문제는 이 심각성을 명색이 역사로 밥 빌머먹고 산다는 놈들로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비근한 사례로 신라 진흥왕 순수가 있다. 순수란 제왕이 자국 영토를 돌면서 주로 지방관들을 상대로 너희가 제대로 내 백성을 통치하고 있느냐? 혹 애로가 없느냐 하는 쇼다. 진흥왕이 이 짓을 아주 좋아해서 툭하면 궁궐을 박차고 나와서 북한산에도 가고, 함경도까지 행차했다. 가는 데마다 산 꼭대기에다가 그 기념비를 세워놓았는데 이를 흔히 진흥왕순수비라 한다. 그.. 2021. 2. 5. 큰 가락 마을 : 대가리(大加里) 큰 가락 마을 : 대가리(大加里) 충청북도 단양군은 산지가 많고 척박한 곳이다. 인구 3만명 정도의 작은 소도시이지만, 삼국시대 각축장이었을만큼 교통.군사 요충지였다. 단양 적성비로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를 보면 신라가 소백산을 넘어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애썼던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적성면의 끄트머리 동네에 외갓집이 아직 남아 있어 식구들끼리 오기도 하고, 소백산 등산도 종종 다녀서 1년에 몇 차례 오곤 한다. 외갓집이 있는 마을은 하원곡리인데 중간에 지나가는 마을 이름이 “대가리”다. 어릴 때는 이름을 듣고 엄청 웃었는데, 오늘 지나가는 길에 자세히 보았다. “대가리(大加里)”는 지형이 큰 가락처럼 생겼으므로 한 가래기 또는 대가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유래비에는 원래 가차촌(駕次村)이었.. 2020. 6. 27. 이전 1 2 3 4 ··· 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