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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94

조선에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고려 판본이 있는가? 때는 바야흐로 1801년(조선 순조 원년), 조선의 걸출한 학자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9-?)과 초정 박제가(1750-1805)가 베이징에 다다른다. 이 연행에서 둘은 청대의 대학자 기윤紀昀(1724-1805)과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한편, 많은 청나라 지식인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새로 만나 깊은 친교를 맺게 된다. 그들이 만난 사람 중에 진전陳鱣(1753-1817)이란 이가 있었다. 절강浙江 해녕海寧 사람으로 자는 중노仲魯라 하고, 호는 간장簡莊이라 했던 학자이자 장서가藏書家, 교감가校勘家였다. 책이라면 유득공이나 박제가도 어디 가서 빠질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들의 대화는 잘 통했고, 박제가가 진전에게 자기 문집에 얹을 서문을 청해 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들이 대화하던 중 서긍徐兢(10.. 2021. 6. 13.
잘라 접붙임은 우정 맺음 같으니 최근 지금껏 본 중에서도 손에 꼽는 매화 그림을 보았다. 그 솜씨도 솜씨려니와 화제 또한 일품이어서 여기 옮겨본다. 그대 집 시냇가에 매화 있었지만 君家梅溪上 보이는 건 꽃이 흰 매화뿐이었소 但見梅花白 우리 집에 홍매나무 기르고 있어 我家梅樹紅 접가지 구해서 귀객에게 부치오 求枝寄歸客 잘라 접붙임은 우정 맺음 같으니 剪接如交情 접그루 접가지 떨어져선 안되오 本末不相隔 내년에 꽃이 피어 술잔을 들 땐 明年舉酒時 취기 오른 볼이 발그름해질게요 醉頰生微赤 정유년(1957) 3윌 13일 오당 인형 따님의 혼인이란 큰 경사를 축하하며, 제당(배렴裵濂, 1911-1968). ㅡ 찾아보니 이 시는 송대의 대시인 매요신(梅堯臣, 1002-1060)의 라고 한다. 해석을 제대로 했는지 겁이 났는데, 새로 번역을 해주신 .. 2021. 6. 13.
문학과 정치, 김부식과 정지상 1. 김부식은 고려 당대에 이름을 날린 시인이었지만, 그의 시는 의외로 재미가 없고 설명적이다. 이는 당시 송나라 시풍의 영향으로 풀이되곤 하지만, 김부식 개인의 기질에 그런 딱딱함이 더 맞았던 것 같다. 서정과 낭만을 중시한 당나라 말기 시풍을 따랐던 그의 라이벌 정지상이 역시 일세를 풍미했던 걸 생각해보자. 2. 시는 옛날 지식인들의 필수교양이었다. 물론 그 때에도 잘 짓고 잘 못 짓는 이들이 나뉘었지만, 어지간한 관료나 선비들의 문집엔 시가 적어도 전체 분량의 반은 실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시로 이름을 날린 이들은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없었거나 굴곡진 정치인생을 살거나 악명을 드높였던 반면, 정치에서 성공한 이들은 시의 수준이 높지 않거나 양이 적다(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감상은 .. 2021. 6. 13.
근대 화가 박일헌朴逸憲과 박주항朴疇恒 부자父子, 신문에서 그 행적을 찾다 저번에 호운湖雲 박주항朴疇恒이란 화가 이야기를 잠깐 했었는데, 오늘 다른 일때문에 옛날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그의 개인사를 약간 찾게 되었다. 일단 그는 함경북도 명천 사람이었고, 1920~30년대 자기 고향을 위해 두어 번 거액의 기부금을 낸 이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수연壽硯 박일헌朴逸憲(1861-1934)이라는 이였다. 박일헌과 박주항이 그동안 부자관계인 줄도 모른 채 서로 따로따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제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 사람은 1880년대 조-청 국경분쟁 당시 경흥부사를 역임하며 백두산정계비를 확인하는 등 정계定界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서화가로도 꽤 유명해서 제법 많은 작품(주로 난초)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격이 높지 못하다 해서 .. 2021. 6. 13.
구룡산인九龍山人 김용진金容鎭(1878-1968)의 모란 1. 모란이 진 지 한참이지만 문화계는 다시금 모란 얘기로 들썩거린다. 국립고궁박물관의 특별전 "안녕, 모란"(7.7.-10.31.) 때문인데, 전시가 열리지도 않았으니 전시가 어떻더라는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포스터는 참으로 멋졌다. 2. 거기에 편승해서 모란 그림 하나를 올려본다. 근현대 서화계의 큰 어른이었던 구룡산인 김용진이 붓끝으로 피운 모란 세 송이다. 이분은 채색화를 그렸어도 화려하지가 않은데, 대신 그만큼 격조가 느껴진다. 3. 화제는 청나라 강희 연간의 문인인 주양朱襄(생몰년 미상, 자는 찬황贊皇)의 시 의 한 구절이다. 이 꽃이 참으로 부귀하다 하지 않더라도 漫道此花眞富貴 뉘라서 피지도 않았을 때 와서 보겠는가 有誰來看未開時 2021. 6. 9.
1929년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의 가격 1929년, 근대 활판으로 인쇄되어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다섯 권 한 질을 사려면 6원이 들었다. 6원이라, 이 무렵 물가가 어땠는지를 대강 찾아보니 쌀 10kg에 2원 조금 넘고, 한 달 신문요금이 1원, 은행원 초봉이 50원, 기와집 한 채가 2,000원이었다고 한다. 결코 싼 책은 아니었다. *** 台植補 *** 강민경 선생은 이 책을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이라 했지만, 실제 표제는 성호사설星湖僿說(전5책)이라, 이는 성호 제자 안정복이 그 방대한 성호사설을 10권10책으로 추린 것이라, 그걸 저때 출판한 듯하다. 이를 출판한 곳이 문광서림文光書林이라는 데라, 그 대표가 홍익표洪翼杓였고, 그곳이 소재한 곳은 공평동이라 한다. 이 책을 인쇄한 데가 대동인쇄주식회사, 대표는 심우택沈禹澤이라, 인쇄소가 소.. 2021. 6. 6.
고려사를 읽다가 - 화가의 대우 이광필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고려 무신정권기를 살았던 인물인데, 초상화와 산수화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의 아들이 9품 군직인 대정에 올랐다. 그런데 이에 딴지를 건 인물이 있었으니... 이광필의 아들이 서경(西京)을 정벌한 공으로 대정(隊正)에 임명되자, 정언(正言) 최기후(崔基厚)가 잘못을 지적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나이가 겨우 20세인데, 서경 정벌 때에는 10세에 불과하였다. 어찌 10세의 어린아이가 종군할 수 있었는가?” 라고 하며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서명하지 않으니, 왕이 최기후를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이광필이 우리나라를 빛낸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가? 이광필이 아니었다면 삼한(三韓)에 그림의 명맥이 거의 단절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최기후가 서명하였다. 여기에.. 2021. 6. 4.
애꿎은 낙타 굶겨죽인 왕건 권13, 고려 태조 25년의 史贊. 忠宣王이 일찍이 臣 이제현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보내온 낙타를 다리 아래에 매어 놓고 꼴이나 콩을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하였기 때문에 그 다리 이름을 '낙타다리'라 하였다. 낙타가 비록 中國에서 생산되지 않지만 중국에서도 일찍이 낙타를 기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라의 임금으로서 수 십 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피해가 백성을 해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며, 또 이를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굶겨서 죽이기까지 하였을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創業하여 왕통을 전하여 주는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 사람으로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 우리 태조께서 이렇게 한 까닭은 장차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 함이었는.. 2021. 6. 4.
장이 약했던 고려말 임박林樸 선생 고려 말을 살았던 임박林樸이라는 사람이 1367년 제주안무사가 되어 바다를 건넜다. 그때 그가..... 도중에 나주(羅州)에 이르러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워 돌아갔으나, 비록 차 한 잔이라도 먹지 않았으니 민(民)이 크게 기뻐하면서 서로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와싱가. 조정 관리들이[王官] 다 임선무(林宣撫) 같암시면 우덜이 무사 반란을 일으키잰 햄실건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 가운데 혹 물을 길어 온 것을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 - 권111, 열전 24 임박전 뭍에서 온 관리가 물마저도 길어온 것을 누구는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어진 마음씨로, 누구는 육지가 그리 좋더냐 하는 고까움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임박 본인이 물갈이가 꽤 심했던 게 아닌가 싶다. 2021. 6. 2.
소전 손재형의 글씨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1903-1981)이 1968년 어느 비 내리는 여름날, 忙中有閒망중유한을 썼다. 그는 이 구절을 퍽 좋아했는지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수작에 들지 않나 한다. 소전의 글씨는 때로 획을 무리하게 꺾고 휘곤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그런 느낌이 덜하다. 획의 굵기나 글자의 배치가 균형이 잡혀있다고나 할까. 68년이면 그가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인데, 그랬기에 "망중유한"이 더욱 와닿았을는지. 2021. 6. 1.
고려사를 읽다가 - 국제전쟁이 될 뻔 한 묘청의 난 인종 13년인 1135년 일어난 '묘청의 난'은, 일찍이 단재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크게 주목했고, 그 이후에도 이에 관해 많은 연구들이 있다. 그런데, 고려 역사 속 한 해프닝이건 또는 한국사 물줄기를 비튼 사건이건, 이것을 어쨌거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내란'으로 본다. 그런데 이 묘청의 난이 자칫 동아시아 국제전이 될 수도 있었다. 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己未 宋遣廸功郞吳敦禮來曰, “近聞西京作亂, 倘或難擒, 欲發十萬兵相助.” 기미 송에서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와 말하길, “최근 서경(西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평정하기 어렵다면 10만의 군사를 보내 원조하겠다.”라고 하였다. 묘청의 난이 한창이던 6월의 일.. 2021. 5. 30.
마지막 대제학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의 글씨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 그를 일컫는 수식어는 참 다양하기도 하다. 조선 최후의 문형文衡, 조선 말 문단의 거두이자 로 당시 문단의 이모저모를 증언한 문인, 12년간 진도에 유배되어 숱한 제자를 기르고 허백련과 허건을 알아보고서 호를 지어주었던 지인지감知人之鑑의 인물이면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 편찬에 간여하고 중추원 촉탁, 경성제국대학 강사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적극 협조한 친일파라는 딱지가 붙은 문제적 인물이기도 한 정만조... 경성제국대학에서 그의 만년을 지켜본 조용만(1909-1995)의 회고에 따르면 "키는 작고, 머리를 박박 깎고 안경을 썼던" 정만조의 강의는 인기가 거의 없어서 자신과 김태준(1905-1949)이 거의 독선생으로 모시다시피 하여 한국 한시와.. 2021. 5. 26.
위인을 낳은 역적, 우범선禹範善(1857-1903)의 글씨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좋든 나쁘든, 부모의 그늘을 느끼게 마련이다. 나아가 부모를 닮기를 바라는(또는 더 낫기를 바라는) 주변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 같은 속담이 왜 생겼겠는가. 하지만 그런 시선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자식은 어떻게든 고통을 받게 된다. 부모가 세상에 이름을 날릴수록 그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말은 그래서 참 잔인하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견자犬子라 불리는 그의 죄는 아닐진대. 그런데 때로는 자식이 크게 성공하여 부모를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그 허물을 다소나마 덮어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 글씨의 주인 우범선과 그 아들 우장춘禹長春(1898-1959)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 하다. 이 부자父子의 이야기는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 2021. 5. 24.
옛날 도서관의 주의사항 "책장을 넘길 때 손에 침칠을 마십시요" 2021. 5. 18.
호운 박주항의 난초 미술사를 하신다는 분들도 '박주항'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모른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살았던 분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사전들, 나아가 같은 고전 속에서도 이름 석 자가 확인되지 않아 도대체 행적을 알 길 없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긁어모아보아도 운현궁 사랑에서 석파란 대필을 했다는 둥 믿기 힘든 사실만 떠돌 뿐이다. 작품이 제법 많이 전해지는 것과는 딴판인데, 남은 작품들도 천편일률, 그렇게 썩 격이 높거나 매력적이지는 않아서 궁금증만 더하고 있었다. 근대기의 많은 한국 동양화가나 서가들이 그렇듯, 그의 작품도 일본에 많이 전한다. 일본인들이 받아놓고 표구 잘 해서 대대로 보관하던 작품들이 요즘 알게 모르게 시장에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이 난초가 보였다. 난 이파.. 2021. 5. 16.
석봉 글씨에 우암이 부친 글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제자 나양좌(1638-1710)가 어느 날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를 스승에게 가지고 왔다. 대대로 내려온 것이라면서 몇 자 발문을 적어주십사 하고 내밀었는데, 우암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준다. 석봉石峯의 글씨는 집집마다 소장되어 있었으나, 이제 와서 시대가 조금 멀어지고 또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고 보니, 점차 처음처럼 흔하지 않다. 이번에 나현도羅顯道가 그의 증왕고曾王考 보덕공輔德公이 간직하였던 것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이는 나의 선고先考 목사공牧使公이 난리를 만나 피란다니면서도, 보덕공이 보배로 여기었다 하여 늘 등에 짊어지고 다닌 때문에 지금까지 보존되었습니다.” 하였다. 아, 그 보수保守가 여기에 이른 것은 이 어찌 조상을 애경愛敬하는 일단一.. 2021. 5. 15.
100여년 전 판사 백당白堂 윤경규尹庚圭의 글씨 공부하다 보면 가끔 뜻밖의 수확을 거둘 때가 있다. 이 사진 속 글씨 또한 그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백당白堂 윤경규尹庚圭(?-?)라는 이다. 낯선 이름인데, 대한제국시대 한성재판소 판사를 지냈다니 상당한 지식인이었다 할 인물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어지간한 기록에서도 싹 사라졌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글씨로는 명필이라고까진 못 하겠으나 꽤나 달필이고 낙관의 각도 깔끔하다. 어쨌거나 그가 오노小野라는 일본인 의사에게 글씨를 한 폭 써 주게 된다. 전지 크기가 족히 될 듯한 종이를 펼쳐놓고, 붓을 가다듬는다. 의사 양반에게는 어떤 글을 써 주어야 할 것인가...쿡 먹을 찍은 붓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무슨 글을 썼는가? 대강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을 고치는 것, 그.. 2021. 5. 14.
참을 수 없는 치통 평소 존경하는 강명관 선생님의 포스팅에 따르면, 옛 어른들은 어지간히 치통을 달고 사셨다. 고려 말 이색(1328-1396)부터 치통을 시의 소재로 다루기 시작했고(물론 그 전부터 있었을 테지만), 조선시대 기록을 봐도 아무개가 치통을 앓았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다. 영조는 20대부터 치통을 앓다가 70대쯤 되니 윗니가 하나만 남았다던가. 어쩌면 영조의 성격에 치통이 한몫 단단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내용 중 재밌는 게 하나 있었다. 치통이 하도 심해 결근한 유건기兪健基라는 양반이 대장장이를 시켜서 이를 뽑으려다가, 그나마도 실패했단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판서까지 지낸 윤유 이런 분들도 대장장이의 집게로 이를 뽑았는데, 썩 솜씨가 좋지 못했던지 뺨에 구멍이 나질 않나.. 2021. 5. 2.
주몽의 이유있는 부실공사 술꾼 이규보 아저씨도 아직 배가 덜 나온 열혈청년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그가 지은 작품이 그 유명한 이다. 여기에는 고려 초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의 동명왕본기가 더러 인용되어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자.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국(附庸國)을 삼고자 하니, 왕이 궁실을 지을 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천 년 묵은 것같이 했다.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지지 못하였다. 모세에게 쫓겨날 가나안인같은 우리의 불쌍한 군주 송양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건 그렇다치고, 주몽이 천 년 묵은 건물처럼 보이려고 썩은 나무로 집을 지었다는 표현을 보자. 썩은 나무로 집을 짓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기원전 37년은 중국 한대이니 기와는 있던 시절이지만, 고구려.. 2021. 5. 1.
서애가 얻은 송나라 동전 서애 류성룡(1542-1607)의 문집 을 보면, 벼슬을 다 관두고 하회로 내려와 을 짓던 1604년 어느 비 오는 날에 그가 겪은 일이 하나 기록되어 있다. 어떤 내용인지 한 번 살펴보자. 갑진년甲辰年 6월 12일,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 양쪽 언덕과 엇비슷할 정도였다. 7월 6일에도 천둥이 치면서 비가 왔는데, 큰아이가 강 언덕 위에서 옛날 돈[古錢] 하나를 주워왔다. 글자가 반은 마멸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숭녕통보崇寧通寶란 넉 자가 있었다. 그것은 곧 송宋 나라 휘종徽宗 때의 물건이니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의 것으로, 당시에 있었던 일만 가지 일들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연기처럼 없어져 버렸는데 뜻밖에 이 물건이 아직 남아있을 줄이야. 사람을 시켜서 닦고 손질하게 한 뒤에 보니, 마치 주나라 석.. 2021. 4. 20.
동숙독서기東塾讀書記를 만나다 1. 고증학考證學이 발달한 청나라 때는 '차기箚記'라고 해서,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적고 정리하는 저술이 유행했다. 조익趙翼(1727-1814)의 같은 게 대표적인데, 요즘도 공부하는 분들이 시도해봄직 하지 않나 한다. 어쩌면 그때그때 포스팅을 올리는 페북이나 블로그, 인스타그램이 그런 역할을 이미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 청나라 말엽을 살았던 진례陳澧(1810-1882)란 인물이 저술한 란 차기를 우연히 만났다. 진례란 인물이 누구이고 이 책이 어떤 책인지는 아래 링크로 갈음하고자 하는데, 청대의 숱한 차기 중에서도 상당한 위상을 가지는 모양이다. https://m.blog.naver.com/jeta99/30180513165 근래 구입한 책들: 독서기, 학술필기, 역사필기 관련 네.. 2021.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