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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71

이규보 글씨가 아닐까 하는 글씨 그렇게 많이 백운거사 이야기를 했으면서도, 정작 이규보가 붓을 휘둘러 썼을 글씨가 어땠는지 본 적이 없었다. 한데 몇 달 전 (완전히는 아니어도) 그 궁금증을 풀 만한 자료를 보았다. 일제강점기 출판인이자 서점 경영인 심재 백두용(1872~1935)이 편찬한 권1에 실린 우리 이규보 선생님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글씨다. 심재 당년인 1920년대만 하더라도 이 글씨가 (임모본으로라도) 세상에 전해졌던 모양인데, 실제 글씨는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에 몸서리치다가도, 이렇게 목판본으로나마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이것뿐만 아니라 고려~조선 초기 인물의 진적眞跡을 찾는 사람들은 이 를 뒤적여 찾는 경우가 많다 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일지 아리송한 것이 적지 않아 혼란스러울 때도 드물지 않다고. 심.. 2024. 2. 26.
남자가 바느질을 하다니? 이규보의 기롱 애처가 눈빛처럼 하얀 비단 치마 밟아 찢어지니/ 踏破香紈雪色裙 뉘 집 휘장에서 탁문군卓文君 희롱했나 / 誰家帳底弄文君 부인께선 삼가 바느질일랑 그만두시고 / 細君愼勿加針線 앞으로는 무산에서 운우 꿈 꾸시구려 / 又向巫山染雨雲 - 전집 권5, 고율시, "이중민 군이 치마를 꿰맨 일을 희롱함" *** Editor's note *** 남자가 바느질을 해서는 안 되는데 백운거사 이규보 친구가 마누라 대신해서 바느질을 한 모양이라 그걸 희롬삼아 시로써 읊었다. 이 시에서 건져내야 할 것은 바느질이 적어도 이규보 시대에는 여성의 전유물로 통했다는 점이다. 이는 보희 문희 김유신 김춘추 축국 이야기에서도 여실히 증언한다. 다시 말해 적어도 이 시를 기준으로 신라시대 이래 이규보 시대 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바느질은 .. 2024. 1. 11.
이규보는 언제 이름을 바꿨을까 이규보(李奎報, 1168~1241)라는 인물을 몇 년째 파고들었다. 그런데 무심코 넘겼지만 생각보다 중요할 것 같은 사실 하나를 빠뜨려서, 여기 정리해두고자 한다. 바로 ‘이규보李奎報’라는 그의 이름에 관해서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이인저李仁氐’였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세 번째 ‘저성氐星’에서 글자를 딴 것 같다. 그렇게 22년을 살다가 1189년(명종 19) 이십팔수의 열다섯 번째 ‘규성奎星’에서 글자를 따 ‘규보奎報’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그가 이름을 바꾼 시점을 두고 『동국이상국집』과 『고려사』 의 기록이 엇갈린다. 기유년(1189) 사마시(司馬試, 국자감시)에 나아가려고 했을 때, 꿈에 어떤 촌백성인 듯한 노인들이 모두 검은 베옷을 입고 마루 위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 사람이 .. 2024. 1. 8.
2억1만8천780리를 퍼스트클래스로 사뿐히 내려앉은 해모수 내 옛사람에게 들으니 / 吾聞於古人 하늘과 땅은 거리가 / 蒼穹之去地 이억 만 팔천하고도 / 二億萬八千 칠백 팔십 리란다고 / 七百八十里 이규보의 속 구절이다. 2억 만 팔천 칠백 팔십리라. 같은 문헌을 보면 억億이란 10만을 가리키는 단위였다. 이를 염두에 두고 계산하면 218,780리. 조선시대 단위로는 10리가 대략 5.4~5.7km였다니 5.5km라고 하고 계산해보면 12만 329km 남짓이 된다.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런가 하면 또 하늘과 땅 사이 높이를 이렇게 본 분도 있었다. ‘노락당老樂堂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 밖에 되지 않는다’ 흥선대원군이 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운현궁을 대대적으로 지어올릴 때 당시 대제학이던 김병학이 지어올린 한 대목이다. 지.. 2023. 11. 7.
이규보가 증언하는 대충대충 토목건설 전집 권24를 보면 "계양桂陽의 초정기草亭記"란 글이 있다. 계양, 곧 인천광역시 계양구와 부평구, 서울 구로구 등지를 합친 지역의 부구청장 격이었던 이규보가 거기 있던 초가지붕 정자 하나를 재건하며 적은 기문記文이다. 그걸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오기 전에 이 정자는 뜻밖에 거문고를 불태우고 학鶴을 굽는 자(필자 주: 풍류라고는 모르는 인간)에게 헐리게 되어 황폐하고 쓸쓸한 옛터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슬프게 여겨 고을의 아전을 불러 말하기를, “이 정자는 이실충李實忠 태수太守가 창건한 것인데, 무엇이 너희 고을을 해롭게 했기에 감히 헐어버렸더냐. 옛사람은 그 사람됨을 사모하여 감당(甘棠, 아가위나무)을 베지 않은 일이 있었거늘, 너희 고을에서는 감히 정자를 헐었느냐?” 라고 .. 2023. 10. 30.
백운거사 이규보를 디립다 깐 농암 김창협 조선 후기의 문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중국과 한국의 선배들을 평하면서 우리의 백운거사 형님도 논한 적이 있다.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요사이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엮은 《기아箕雅》의 목록을 보니 이규보의 문장을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고 칭찬하였는데, 내 생각에 그 논의는 매우 옳지 못하다. 시작부터 쎄게 나오신다. 까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논지를 전개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데....일단 읽어보자. 이규보의 시는 동방에 명성을 떨친 지가 오래되었으니, 선배 제공諸公들도 모두 따라서 미칠 수 없다고 추앙하였다. 이는 그의 재능이 민첩하고 축적된 식견이 풍부하여 많이 짓고 빨리 짓기를 겨루자면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조어造語 능력.. 202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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