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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피곤해서 누워버린 부처님 유공庾公이 일찍이 사찰에 들어갔다간 누운 부처님(1)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 분은 중생을 제도하시느라 피곤하신 모양이군"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명언이이라 여겼다. (1) 《열반경涅槃經》에 일렀다. "여래如來께서 등이 아파 사라쌍수 사이에서 머리를 북쪽에 두고 누우셨다. 그런 까닭에 훗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불상을 그렸다" (世說新語 言語第二) 庾公嘗入佛圖,見臥佛[涅槃經云:「如來背痛,於雙樹閒北首而臥,故後之圖繪者為此象。]曰:「此子疲於津梁。」 于時以為名言. (世說新語箋疏 言語第二)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중국 남북조시대 송宋 출신 문사 유의경劉義慶(403~444) 찬撰이어니와, 실상 이 원전은 망실하고 같은 남조시대 양梁나라 유준劉峻, 곧 유효표劉孝標(462~521)가 주注한 판본으로 전해질 뿐이다..
언니를 제끼고 김춘추를 차지한 문희, 그 발설자는? 오늘 《화랑세기》 강연에서도 나는 예의 김유신 김춘추 축국 경기와 그에 따른 김유신의 옷찢어발리기와 이후 전개된 야합 행각을 이야기했다. 보희寶姬는 월경 중이었으므로 김춘추와 맺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행운은 그 동생 문희文姬한테 돌아갔다. 강연에서 이야기했다. 이 얘기가 어떻게 전해졌겠는가? 난 이들 네 년놈 중에 한 명의 발설자가 있다고 했다. 이들 중에 까발리는 사람이 없었으면 이 이야기는 결코 후세에 전해질 수 없다. 그러면서 나는 《화랑세기》를 꺼내들었다. 발설자는 누구냐? 문희였다. 《화랑세기》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 출처가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라 했다. 문명文明이 누구인가? 바로 문희다. 사기私記가 무엇인가? 사사로운 기록이란 뜻이다. 그러니 《문명황후사기》는 문명에 의한 회고록..
영조시대 군인한테 비친 당쟁의 폐해 조선 영조시대에 군인으로 출세한 인물로 구수훈具樹勳(1685~1757년)이라는 이가 있으니 무관이라, 무인은 까막눈이 많지만, 그는 문장에 능했다는 장점이 있어 《이순록二旬錄》이라는 책을 남길 정도였다. 본관 능성綾城인 그는 영조 8년(1732)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고, 그 3년 뒤인 영조 11년(1735)에는 통제사로 승진했다. 13년(1737)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7년(1741) 대간이 탄핵함으로써 삭직되었지만 19년(1743) 경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27년(1751)에는 수원부사가 되었지만, 마침 찾아든 대흉년에 기민은 구제하지 않고는 군정軍丁을 뽑으면서 뇌물을 받았다 해서 탄핵을 받고는 다시 파직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다시 빨딱 일어섰으니 29년(1753) 좌포도대장에 임..
절대미의 절대조건, 절대미인은 절대의 치통을 앓아야 한다 중국 후한시대 사람으로 양기梁冀라는 이가 있으니 그의 마누라 손수孫壽는 천하의 요부였다. 그를 일러 《후한서後漢書》 권34에 수록한 양통梁統 전기에 붙은 양기의 전기에 이르기를.... (황제가) 조칙으로 양기의 처 손수를 봉하여 양성군襄城君이라 하니...손수는 아름다운 데다가 교태를 잘 지었으니, 근심에 찬 눈매나 우는 듯한 화장, 말갈기 흘러내린 모양 쪽머리에다가 허리가 끊어질 듯한 걸음걸이, 치통으로 괴로워하는 듯한 웃음을 지어 고혹스럼으로 삼았다. 詔遂封冀妻孫壽為襄城君…壽色美而善為妖態,作愁眉,嘀妝,墯馬髻,折腰步,齲齒笑,以為媚惑. 이 중에서도 치통으로 괴로워할 때 짓는 미소가 도대체 뭐니? (February 4, 2013)
익재 이제현 묘지명 나는 이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익재 이제현 묘지명이 지난 2008년 개성에서 발굴되었다는 소식 말이다. 이에 기존 문헌들에 실린 그의 묘지명과 북한에서 전한 관련 소식을 정리해 봤다. 이제현 묘지명은 2008년 이래 개성박물관에 전시 중이라 하는데, 혹 이곳을 방문한 분으로 관련 사진을 갖고 계신 분은 공유를 앙망한다. 북한에서도 그 소식만 전했을 뿐, 그 자세한 판독은 공개하지 아니해서, 기존 묘지명과 어느 부분에서 갈라지고 만나는지 내가 알 수가 없다. 묘지명은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6과 《동문선東文選》 권126에 실려 있으며, 1376년(우왕 2) 무렵 이색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부원군 시문충 이공묘지명鷄林府院君謚文忠李公墓誌銘 지정(至正) 27년 정미년(공민왕 16, 1367) 가을 7..
결코 백제 무왕의 정비일 수 없는 신라 선화공주 익산 미륵사 서탑 해체과정에서 이 석탑 조성 내력을 기록한 백제 무왕시대 석탑 봉영사리기奉迎舍利記가 발견되기는 2009년 1월 14일이다. 그것이 발견되기 이전부터 나는 결코, 때려죽여도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의 정비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후궁이라고 주장했다.봉영사리기 출현과 더불어 내 예언은 어찌 되었는가? 내 말이 맞았다. 무왕 정비는 선화공주 아닌 걸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근거로 이리 주장했던가? 나는 아다시피 《화랑세기》를 신라인 김대문이 남긴 것으로 보는 이른바 화랑세기 진본론자다. 그 화랑세기와 세트가 되는 남당 박창화 유품으로 사진으로 제시하는 족도族圖가 있다. 겉장에는 상장돈장上章敦牂이라 쓴 글자를 표제처럼 삼는 이 족도는 화랑세기 등장 인물들간에 얼키고설킨 혈연 관계를 사진으로..
화랑, 그 설치와 폐지와 부활의 변주곡 1. 신라의 독특한 제도인 화랑花郞은 진흥왕 때 창설되었으니 이 화랑은 그가 이끄는 일군의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지칭하거니와 2. 그를 일러 화랑花郞이라 하기도 하고 풍월주風月主라고도 하며, 국선國仙이라고도 했으니, 이 차이가 무엇인지 애매했거니와 그럼에도 종교 성향으로 보건대 풍월주와 국선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도교 오두미교 천사도 계통임을 명칭으로써 안다. 3. 한데 이런 화랑은 전신이 있어 남자인 화랑에 대비되어 여성이라 그를 원화原花라 했다. 이 원화가 두 명이었는데 질투가 심해 서로 머리 끄댕이 잡고 쌈박질하다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청부 살인하고는 시멘트에 묻어버렸다. 4. 이 사건이 폭로되어 이에 열받은 진흥왕이 여자는 안되겠다 해서 남자로 하자 해서 그를 세우고는 이름하기를..
석류엔 달거리 핏물 강희안 원저에 이종묵이 해설한 《양화소록》(아카넷, 2012.2) 중에는 '석류를 키우는 방법'에 대한 이종묵의 해설이 있으니, 개중 한 대목에서 이종묵은 이르기를, "이유원의 《벽려신지(薜荔新志)》에는 거름으로 월경수(月經水)를 쓰면 좋다고 하였는데 그 근거는 알 수 없다"(247쪽)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 말에 이종묵의 진심이 들어있지 않다고 본다. 왜 석류에 월경수, 다시 말해 달거리 핏물을 거름으로 써겠는가? 석류는 대체로 붉으니, 월경수를 쓰면 그런 붉은빛을 더 강화할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이런 사실을 오직 이종욱만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달거리한 핏물을 빼낸 물인 월경수月經水는 약물로도 썼우니, 특히 화상 치료에 자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