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194

천생 오태사[天生五太史] 극옹(屐翁) 이만수(李晩秀, 1752-1820), 풍고 김조순, 죽석(竹石) 서영보(徐榮輔, 1759-1816), 사영(思潁) 남공철(南公轍, 1760-1840),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 1766-1838)는 ‘하늘이 낸 다섯 태사[天生五太史]’라 불렸다. 정조가 후원하여 육성했고 순조·헌종 연간에 정치와 사단(詞壇)을 주도했다. 2021. 5. 8.
이재난고頤齋亂藁, 난고에서 출판으로 《이재난고頤齋亂藁》는 황윤석 사후 순조 연간 《이재유고頤齋遺藁》를 편찬할 때 1차 정리가 되었다. 문집은 난고에서 일부를 뽑아 간행한 것이다. 빠진 게 너무 많아 이후 《이재속고頤齋續藁》로 간행하였으며 《이재난고》에 탈고한 원고 형태로 들어 있는《이수신편理數新編》도 이후 간행되었다. 당시 후손들이 정리한 《이재난고》는 모두 60책이었다. 이후 황윤석의 수고본 일부가 더 발견되어 현재는 62책이다. 《난고》에 포함되지 않은 그의 서간이나 저작까지 포함하면 600만 자는 너끈히 넘는다. 다른 이 저작이 다수 포함된 《여유당전서》가 500만 자 정도이니 그 방대함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가운데 53년의 일기는 47책 400만 자 정도이다. 그간 알려지지 않은 자료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4책이나 되는 그의 .. 2021. 4. 29.
유배의 땅 흑산도의 뱀 지인이 흑산도에서 발굴 중에 유물 대신 뱀을 찾았다며 질겁하면서도 친절히 관련 사진과 함께 그 소식을 게재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난다. 접때 흑산도 뱀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 찾아보니 다음의 기록이다. 사변(蛇變)은 궐에 뱀이 나타난 일을 이른 듯하다. 안동 오미 풍산김씨 참봉댁에서 찾은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1861년(철종 12) 7월 4일 기사에 “맑음. 비로소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일찍이 들으니 새 궁궐에 사변(蛇變)이 있었는데 이 뱀은 흑산도에 정배하여 삼천리 유배형을 가는 길에 앞길을 지나갔다고 하였다. 과연 무슨 죄인지 알기나 할지 모르겠다. [晴。始有凉風。曾聞有新闕蛇變, 此蛇, 定配黑山島, 流三千里次, 過前路云。未知果知罪也。]” 조선은 코끼리며 물소, 뱀을 유배형에 처하는 웃기는 나라야. 2021. 4. 28.
예의염치를 상실한 현실 정치에 격발하여 예의염치를 상실한 정치를 보고 산다. 《관자(管子)》 〈목민(牧民)〉에 “나라에는 네 가지 강령이 있다. 첫째는 예요, 둘째는 의리요, 셋째는 청렴함이요, 넷째는 부끄러움이다.[國有四維.……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 2021. 4. 10.
도성7문都城七門(2) 근거없는 기록은 없으나 도성 칠문은 붉은 원으로 표시한 창의문, 돈의문, 소의문, 숭례문, 광희문, 흥인문, 혜화문을 이르는 듯하다. 파란 네모칸에 표시된 숙정문과 남소문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숙정문은 비상시 국왕의 피난에만 이용하므로 항상 당혀 있었고, 성문위 누각도 없었다. 여기에도 숙정문 대신 숙암문으로 쓰여 있다. 남소문은 예종 때 의경세자 죽음이 남소문이 열렸기 때문이라는 말에 따라 폐쇄되어 쓰이지 않은 문이다. *** previous article *** 도성7문 都城七門 도성7문 都城七門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 2 〈병조각장사례兵曹各掌事例 무비사武備司〉에 자물쇠[鎖鑰] 궁성·도성 각 문은 자물쇠가 만일 파손된 것이 있으면 용호영龍虎營에서 수리하여 주며, 물자[物 hist.. 2021. 3. 31.
도성7문 都城七門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 2 〈병조각장사례兵曹各掌事例 무비사武備司〉에 자물쇠[鎖鑰] 궁성·도성 각 문은 자물쇠가 만일 파손된 것이 있으면 용호영龍虎營에서 수리하여 주며, 물자[物力]는 호조에서 지출한다. 도성 7문의 자물쇠는 문마다 2개씩을 만들어 두고, 파손되면 곧 바꿔 쓰도록 한다.[鎖鑰○宮城,都城各門鎖鑰。若有破傷則自龍虎營修改以給。而物力。戶曹支下。都城七門鎖鑰。每門各二。有傷替用。] 라고 하였고, 《육전조례》 권7 병전 갱생색梗栍色 총례(總例)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봐도 도성 7문都城七門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인지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2021. 3. 31.
[明] 구영仇英의《적벽도赤壁圖》 명나라 구영(仇英, 약1494~1552)의《赤壁圖》. 얼마전 실제 적벽이 초라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았다. 2021. 3. 31.
장모랑 마누라한테 매 맞고도 버틴 사위, 삼청동三淸洞 연굴사演窟寺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는 “삼청동(三淸洞)은 소격서(昭格署) 동쪽에 있다. 계림제(雞林第) 북쪽의 어지러이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들은 조밀한데, 깊숙한 바위 골짜기를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낭떠러지가 된다. 물이 벼랑 사이로 쏟아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듯한데,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과 같다. 그 밑은 물이 괴어 깊은 웅덩이를 이루고, 그 언저리는 평평하고 넓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한데, 장송(長松)이 엉기어 그늘을 이룬다. 그 위쪽의 바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모두 진달래와 단풍잎이니 봄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쳐 진신(縉紳)들이 많이 와서 논다. 그 위로 몇 걸음을 옮기면 연굴(演窟)이 있다. [三淸洞在昭格署.. 2021. 3. 28.
[淸] 왕원기王原祁(1642~1715) 《도원춘주도桃源春晝圖》 청나라 王原祁(1642~1715)의 《桃源春晝圖》 복사꽃 흐드러진 봄날에 취하고 싶다. 2021. 3. 24.
경복궁 뒤편 백악에 숨어든 중님들 조선시대에 백악白岳은 금산禁山으로 벌목, 채석 등을 할 수 없도록 법제화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찰도 들어설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사찰이 운영되었으니, 《세조실록》 7년 5월 1일 경자 기사에 따르면, 5부五部에서 도성 안팎의 신구新舊 사사寺社를 기록하여 올리니, 명하여 백악산白岳山의 북초암北草庵·연굴암衍窟庵·동초암東草庵을 헐고, 백악산 바위 굴에 사는 중 해심海心을 쫓아냈다. 고 했다. 이로써 세조 때까지만 해도 백악에는 북초암, 동초암, 연굴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 확실하게 사찰은 없앤 듯하다. 2021. 3. 9.
장성 행주기씨 대종가의 의친왕 이강 글씨 의친왕 이강이 우리집에 써준 글씨와 함께 전하는 것이다. 김두현에게 전해지지 못하였다. 의열단의 김두현인 듯하다. 집안 기산도 의사께서 임정에서 활동할 때 함께 받으신 듯하다. 2021. 3. 7.
우물안 개구리가 논하는 천하 어떤 책에 이렇게 쓰였으니, 훌륭한 분이 말한 바이니 믿고 따르는 이를 많이 본다. 이런 이를 가리켜 눈 뜬 장님이라고 한다. 책을 읽을 땐 반드시 쓴 목적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으면 그 저자가 판 함정에 빠진다. 더 가관은 그 함정에 빠진 개구리가 하늘을 논한다는 것이다. 성호 이익의 는 사료를 읽는 전근대인의 자세를 옅볼 수 있다. 그러나 사료를 보는 자세로는 불완전하다. 천하의 일이 대개 10분의 8~9쯤은 천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서(史書)에 나타난 바로 보면 고금을 막론하고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이 그 시기의 우연에 따라 많이 나타나게 되고, 심지어 선악과 현불초의 구별까지도 그 실상을 꼭 터득할 수 없다. 옛날 사서를 편력하여 상고하고 모든 서적을 방증(旁證)하여 이리저리 참작하고 비교.. 2021. 3. 5.
500년전 행주기씨가 보던 책이 일본 동양문고에 18대조 정렬공(貞烈公) 기찬(奇襸, 1444~1492)께서 직접 보셨던 책이 집에 전하지는 않는데, 일본 동양문고에 있는 《예기대문(禮記大文)》이 공께서 보셨던 책이었다. 그 책에는 奇襸 士贇 이라는 장서인과 德陽 世家 라는 장서인이 있다. 士贇은 사윤 또는 사빈으로 읽을 수 있으니 공의 자이고 덕양은 오늘날 고양시인 행주의 별호이니 행주기씨와 같은 말이다. 불에 탄 것은 있어도 왜놈 손에 종이 한 장 넘기지 않았다는 가친의 말씀에 따르면 이미 조선시대에 다른 집 책이었던 듯하다. 이 책을 수집한 이가 기무라 마사코토(木村正辭, 1827~1913)로 경상도에 살았던 일가의 소장인이 찍힌 책이 그의 컬렉션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집안에 소장되었던 듯하다. 2021. 3. 5.
조지서造紙署, 국영 종이제조공사 본사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지서(造紙署)는 “표문(表文), 전문(箋文), 자문(咨文)의 용지 및 여러 가지 종이의 제조를 관장한다.”라고 하였으며 제조(提調) 2원(員)과 종6품의 사지(司紙) 1원과 별제(別提) 4원을 두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점차 축소되어 《속대전》에서는 제조가 1명으로 줄어든다. 그러다가《대전통편》에서는 1명을 도로 증원하여 인근에 설치된 연융청의 총융사(摠戎使)가 담당하게 하였고, 사지는 《속대전》에서는 그 자리를 없앴고, 별제는 《속대전》에서는 2명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대전통편》에 따르면 조지서에 배속된 장인은 목장(木匠) 2명, 염장(簾匠) 8명, 지장(紙匠) 81명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4년(1626) 8월 4일 계묘 기사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 2021. 2. 26.
탁타지기橐駝之技 유종원(柳宗元)은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에서, 곽탁타라는 사람은 나무 심는 것을 업으로 하여 나무들을 아주 잘 길렀다. 그 방법은 오직 나무의 천성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얻게 함으로써 나무들이 절로 번성했다고 한다. 유종원은 이를 통해 “내가 향리에 살면서 보니 수령들이 법령을 번거롭게 하기를 좋아하므로, 백성을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화를 끼친다. 아침저녁으로 아전들이 와서 백성을 불러내어 ‘관의 명령이니, 너희 밭갈이를 서두르고 너희 나무심기를 힘쓰고 너희 수확을 독촉하라. 일찍 서둘러 실을 뽑고 일찍 서둘러 베를 짜라. 너희 아이를 잘 보육하고 너희 닭과 돼지를 잘 기르라.’라고 하며, 북을 울려 모이게 하고 목탁을 쳐서 부르니, 우리 소인들은 조석 식사를 중단하고 아전을 .. 2021. 2. 21.
까치설날과 아찬 오늘이 까치설날이다. 까치가 무슨 뜻일까? '작다'는 뜻이다. 아찬, 아치가 변한 것이다. 작은 아들을 이르는 아찬아들의 아찬이 까치로 바뀐 것이다. 하남정사가 있는 마을은 아치실인데 뜻을 한자로 표기할 땐 소곡(小谷)이고, 훈을 살려 아찬곡(阿餐谷) 제곡(弟谷)으로 표기했으며, 음을 살려 아곡鴉谷 鵝谷 衙谷 亞谷 莪谷으로 표기하다가 19세기말부터는 공자 고사에 비겨 아곡阿谷으로 표기한다. *** 신라시대 관품官品에 보이는 아찬 대아찬의 아찬이 바로 이것이다. 대아찬은 5품이나 재상이다. (태식補) 2021. 2. 11.
조선왕릉 석물 명칭과 배치도 이 그림은 숙빈최씨 소령원도淑嬪崔氏昭寧園圖에 보이는 묘소석물배열도墓所石物排列圖다. 숙종 후궁인 숙빈최씨(1670~1718)는 훗날 영조로 등극한 연잉군延仍君 생모라, 숙종肅宗 44년에 卒했거니와, 죽어 묻힐 당시에는 후궁이었지만, 영조 등극 이후에는 위상이 판연히 달라져, 국왕의 생모로 돌변한다. 조선왕조가 제아무리 종법질서를 강요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했지만, 생육은 생육이라, 전왕의 후궁에 지나지 않지만, 엄연히 국왕의 생모인 까닭에 어정쩡한 타협이 이뤄질 수밖에 없으니, 영조 등극과 더불어 그 능묘는 일약 왕릉 혹은 왕후릉에 버금하는 규모로 정비가 이뤄진다. 다만, 그러한 격상은 생각보다는 훨씬 늦어 아무리 국왕 생모라 해도 후궁에 지나지 아니해서, 그 아들이 왕이 되었다 해서 죽은 어미를.. 2021. 2. 2.
매사 조신, 팽조관정彭祖觀井 요순시대 부터 800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 인물인 팽조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한다는 뜻이다. 송나라 소식蘇軾이 《대등보 논서하서[代滕甫論西夏書]》에서 “세상에 전하는 말에, 팽조는 우물을 내려다 볼 때 자신을 큰 나무에 묶었고, 수레바퀴로 우물을 덮어둔 이후라야 감히 볼 생각을 했다.[俗言彭祖觀井,自係大木之上,以車輪覆井,而後敢觀。]"고 한 말에서 나온 고사이다. 속된 말로 살려고 별짓을 다했고, 그 결과 800년을 살았단 말이다. 이런 까닭에 '팽조관정'은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한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021. 1. 28.
동기창董其昌(1555~1636) [방고산수책仿古山水冊] 동기창(董其昌, 1555~1636) 방고산수책(仿古山水冊) 2021. 1. 26.
석도石濤(1642~1707) [귀도책歸棹冊] 석도(石濤, 1642~1707) 귀도책(歸棹冊) 21.1 × 13.5 cm 2021. 1. 26.
동기창董其昌(1555~1636) [산수도책山水圖冊] 동기창(董其昌, 1555~1636) 산수도책(山水圖冊) 북경고궁박물관 2021.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