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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42

풍납토성 배경으로 뒤늦게 담아본 내 전신 사진 언제쯤인가?2001년 2월 졸저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김영사)를 발간한 직후 일일 것이다. 미디어오늘인지 기자협회보인지 아무튼 언론 관련 전문 매체에서 저 풍납토성 사태와 관련한 내 행적과 내 생각을 취재하고선 풍납토성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있으면 달라 했다. 그 기사에 녹여 써먹겠다는 생각이었다. 한데 그렇게도 풍납토성에 미쳐 날뛴 나였지만, 그때까지 정작 내가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내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후에는 저런 현장마다 더러 일부러 내가 들어간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이후 그런 사진을 요청한 데가 단 한 군데도 없었으니 그런 사진으로 써먹은 것이 없다. 앞 첨부 사진은 2008년 5월 7일,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한신대박물관이 재발굴하고, 그에서 다.. 2025. 12. 5.
풍납토성, 그 이후 2001년 졸저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김영사) 출간 이후, 그 이래 전개된 풍납토성 역사를 정리한 저 가제본을 생각한지는 오래되었다. 뭐, 저건 내가 나에게 부여한 의무감 비스무리한 거다. 한데 한해한해 쌓이면서 이제는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부치는 일이 되고 말았다. 2001년까지 풍납토성 전개 사태는 그 이후에 비하면 무척이나 단순했으며, 그에 따라 정리가 무척이나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래 전개한 역사를 나는 대한민국 21세기 축소판으로 본다. 그만큼 복잡다기하다. 풍납토성을 둘러싸고 최근 삼표 레미콘 공장 부지에 대한 법정 공방이 있었지만, 이런 법정 공방만 해도 수십 건에 달한다. 그 판결을 모조리 입수하고 분석해야 하지만, 이미 내 범위를 벗어났다. 뿐인가? 이후 소규모 발굴지와.. 2024. 12. 2.
개똥 인분 천지였던 풍납토성 이 풍광이 지금은 또 바뀌었을 것으로 본다. 앞 사진은 아마 1999년 무렵 내가 촬영한 한 장면일 텐데 풍납토성 동벽 중앙지점이다. 보다시피 이때까지만 해도 이 지점은 묘목 밭이었다. 그 묘묙밭은 무허가였을 것이다. 당시 묘묙은 내 기억에 느티나무 종류였다. 저리 해 놓으니 성벽이 온통 개똥밭 인분밭이었다. 아산병원에 가까운 지점 성벽은 채소밭이었다. 이 역시 무허가였으니, 인근 주민들이 마음대로 파밭 깨밭으로 썼다. 문화재 때문에 못살겠다 했다. 그래 일정 부분 타당하리라, 하지만 꼭 문화재 때문이었는가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런 풍납토성이 그래도 변모를 거듭해 저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래도 불만이다. 아예 문화재가 싫댄다. 그 문화재 때문에 없던 공원도 생기고 했는데도 싫댄다. 덮.. 2024. 9. 30.
풍납토성 청자랑 같은 걸 찾아달라 구글한테 물었더니 2008년 풍납토성 옛 미래마을 지구 발굴조사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한성백제시대 대형 항아리(대옹) 속에서 발견한 중국제 청자 음양각 연판문靑磁陰陽刻蓮瓣文 사발 몸통 측면과 그 바닥 쪽 장면이다. 당시 조사단은 복원한 이 청자는 입지름 10cm, 높이 5.9cm의 사발 혹은 잔(盞)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백색 태토에 투명한 연청색 유약을 입힌 것으로, 잔 빙렬(氷裂.얼음에 생긴 것과 같은 틈)들이 눈에 띄고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한 형태"라고 했다. 당시 조사단에 의하면 이와 비슷한 청자로는 천안 용원리 고분군 중 장방형 석실분 출토품(서울대박물관 소장)이 있으며, 중국 본토에서는 남조 송(宋)나라 영초(永初) 원년(420년)과 원미(元微) 2년(474년)에 축조된 고분에서 각.. 2024. 7. 25.
가족, 그리고 주민을 희생한 훈장 풍납토성 서재를 뒤지다보면 별의별난 것들이 튀어나와 시간여행을 하기도 한다. 아들놈 방을 정리하던 마느래가 찾아서 저걸 던지면서 하는 말이.. 풍납토성 하면 이가 갈린다. 였다. 저 사태에 내가 함몰해서 온사방에서 협박이 들어오던 시절. 뱃속엔 아들놈이 있었고, 그 협박 견디다 못해 집사람은 친정으로 피신했다. (2016. 5, 17) *** 어떤 기자로 기억되고 싶냐는 한때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풍납토성을 지킨 미친 놈 지금은? 다 부질없다. 그건 가족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은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것으로 고통받았을 그 지역 사람들을 희생한 훈장에 지나지 않는다. 2024. 5. 17.
1925년 풍납토성을 답사한 일본 인류학자 기요노 겐지[清野謙次] 일본의 저명한 형질인류학자로 기요노 겐지라는 인물이 있다. 청야겸차 清野謙次 라 쓴다. 1885년에 태어나 1955년에 사망했다. 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독일 유학 뒤에 귀국해서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활동하면서 일본인은 아이누 후손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일본인 독자 형성론 혹은 혼혈론으로 주창해 열렬한 칭송을 받았다. 수집벽이 정신병적이라, 사찰 보물을 훔쳐내다가 잡혀서 유죄판결을 받아 면직되는가 하면, 이 사태로 당시 교토제국대 총장이면서 한국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신화적 인물로 추앙하는 하마다 코사쿠 빈전경작 濱田耕作 이 사임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친구가 길러낸 제자 중에 731부대장이 있어, 이런 인연을 발판으로 생체실험에 깊이 간여한다. 전후 처리에 미국과 일본의 밀약으로 극적으로..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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