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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28

보쿠와 열라리나 바까야로데싯따 1971년 7월, 발견 개봉 당시 무령왕릉 대강 유물배치 양상이다. 대강이라 하는 까닭은 정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도 개판으로 발굴해서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적어도 위치관계 배치양상은 확실한데 무덤길 입구 진묘수랑 그 바로 앞쪽 묘권墓券 두 장 배치관계도다. 묘권 두 장은 무덤 안쪽에 있는 사람 기준으로 텍스트 방향을 설정했다. 다시 말해 저 문건은 무덤 주인공인 무령왕릉 부부가 화자話者이자 발신자다. 이 점 잊어서는 안된다. 이 무령왕령은 정확히는 부부능이다. 왕이 먼저 죽어 묻혔고 왕비는 나중에 죽어 추가됐다. 이것이 왕이 죽었을 때 묘권 배치 양상이다. 역시 묘권은 철저히 왕 중심이다. 왜 두 사람은 머리를 남쪽에 두었고 부부 위치는 바뀌었는가. 이것이 나로선 체증이었다. 이걸 해결한.. 2021. 3. 26.
무령왕은 방구대장 뿡뿡 덧붙여 무령왕은 안젤리나 졸리다. 저 엉덩이 봐라! 고로 결론한다. 백제 무령왕은 방구대장 뿡뿡 안젤리나 졸리다! 새복에 일나서인가? 졸리다. 2021. 3. 25.
동탁은잔銅托銀盞에서 묻는 고고미술사의 본령 무엇이 고고미술사인가? 무령왕릉 출토 이 동탁은잔銅托銀盞을 보고 그림 그리고 그 계통과 연원과 문양을 분석하는 게 고고미술사인가? 유감스럽게도 한국고고미술사 지난 백년이 그러했다. 남들한테 다 물어봐라. 뭐가 궁금하냐고. 백명이 다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를 묻는다. 고고미술사가 이게 아닌가? 맨 껍데기 타령 일삼으며 주조법이 어떻니 하는 따위가 고고미술사인가? 그건 개돼지도 시키면 삼년이면 하는 디스크립티브에 지나지 않는다. 잘 만든 거 누가 몰라? 아름다운 거 누가 몰라? 아름다움을 윽박지르지 말지어다. (2016. 3. 22) *** 동탁은잔銅托銀盞이란 받침대는 구리로 만들고, 그 받침이 받침하는 몸통인 잔은 은으로 제조한 그릇을 말한다. 이 동탁은잔은 그에 새긴 문양이 세밀하며, 덧붙여 그 제조기법이.. 2021. 3. 23.
그땐 다 그렇게 발굴? 김원룡만 그랬다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발굴된지 올해가 딱 오십주년이라 서서히 이에 즈음한 펌프질이 시작한다. 그에 맞추어 언론 역시 다양한 관련 기사를 포장 제공하기 시작한다. 무령왕릉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대목이 사상 유례없는 졸속발굴이라는 점이니 이에 대한 지적이 관련 언론보도에서도 빠지지 않거니와, 그러면서 매양 그를 나름 옹호하는 말이 그땐 우리 고고학 수준이 다 그래서 라는 말이다. 거짓말이다. 그때 한국고고학이 지금과 비교해서 형편없을지는 몰라도 그때도 어느 누구도 저리 발굴하지 않았다. 오직 김원룡만 그리 발굴하고 그걻 발굴이라 불렀을 뿐이다. 요새 기준으로 김원룡은 무허가 고고학도였다. 실제 발굴경험도 거의 없고 조사원 자격기준으로 보면 조사보조원이었다. 간단히 말해 고고학을 몰랐다. 그때 한국고고학이 그.. 2021. 2. 25.
대중고고학 문을 연 무령왕릉 고고학과 문화재를 관광과 착목한 경주관광개발계획 전주곡은 무령왕릉 발견 발굴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은 대히트였다. 하지만 놓친 게 있었다. 대중매체, 특히나 발굴과정을 생생히 담은 영상을 촬영하지 못했다. 이 점이 두고두고 정권에는 한이 됐다. 무령왕릉 발굴단장 김원룡이 당시 문화부 장관 윤주영한테 불려가서 쿠사리 찐밥을 먹었다. 테레비 왜 안 불렀느냐? 이걸 이해해야만 이듬해 닻을 올린 경주관광개발계획을 이해한다. 무령왕릉 실패를 거울삼아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은 티비가 동원됐다. 그 발굴소식은 대한뉘우스를 타고 전국으로 전파됐다. 오늘 신라문화동인회 내 발표 중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2015. 10. 11) *** 이런 반성은 무령왕릉 발굴 직후 박정희 정부가 의욕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계획과 그 일.. 2020. 10. 12.
향후 10년, 더는 새로운 얘기는 없다고 낸 《직설 무령왕릉》 누차 말했듯이 애초 이 책 초고는 2001년 무령왕릉 발굴 30주년에 즈음해 모 출판사로 원고를 넘기고 초교 재교까지 봤다가 중단한 원고다. 그러다가 해직이라는 기대치도 않은 축복이 주어져 먼지 수북히 쓴 그 원고 뭉치를 끄집어 내고는 손질하고는 2016년 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를 통해 냈다. 그 16년 사이에 무령왕릉 역시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고 나 역시 더러 논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무령왕릉과 관련해 기존 이해에 여러 균열을 냈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그런 무령왕릉이 내년 2021년 발견발굴 60주년을 맞는다. 나로선 이 책을 낼 적에 향후 10년간은 더는 무령왕릉 새로 나올 말은 없다고 자부했다. 시건방으로 비치겠지만 그만큼 나로선 모든 걸 쏟아부었고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물론 꼭 10년이겠냐마는 내.. 2020. 10. 8.
백제 무령왕과 귀수(貴獸) 이야기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로,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이다. 뒤에는 도시를 지켜주는 공산성이 있고, 그 앞으로 수운 교통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금강이 흐른다. 도착한 물건을 실어나르느라 분주한 금강변,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우냐?" "아, 왕자님 여기는 어인일로.... 양(梁 502~557)에서 온 물건을 나르는 중에 희한하게 생긴 동물이 같이 딸려 들어와서요." "희한하게 생긴 동물?" "예... 그것이 짜리몽땅하게 생긴 것이 또 똥똥하고, 어깨에는 또 날개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근데 영~~~똥똥해서 날지는 못할 것 같고... 아!! 머리에는 또 희한한 쇠붙이 뿔이 달려 있습니다. 거참....살면서 생전 처음 본 꼴입니다.” “그래? 어디 한 번 보.. 2020. 8. 12.
'安厝登冠大墓 안조 등관 대묘' 무령왕릉 묘권墓券에 등장하는 '安厝登冠大墓안조등관대묘'와 관련해 내가 기존 말도 아니되는 주장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신설新說을 발표하기는 2009년 8월이었다. (安厝登冠大墓는 安厝 / 登冠 / 大墓 라고 끊어 읽는다.) 당시 나는 이런 새로운 주장을 담은 논문을 라는 제목을 붙여 부산대 중국연구소가 발간하는 기관지 《CHINA연구》 7호에 게재했다. 관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대묘大墓는 왕릉이 아니라 가족 공동묘지다. 둘째, 따라서 그 앞쪽 등관登冠은 그 공동묘지 이름이다. (그 앞에 붙은 '安厝안조'는 복합동사로 '安置'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저 말은 무령왕(의 시신)을 당시 백제 왕실 부여씨 가족공동묘지 혹은 종족공동묘지인 등관 이라는 곳에 안치했다는 뜻이다. 조금 전 심심하던 차에 논문검색 사이.. 2020. 6. 8.
무령왕릉 등관대묘登冠大墓 해독기 내가 무령왕릉에서 몇 가지 난제로 꼽은 것이 있다.첫째, 묘권墓券과 관련해 우선 그에 보이는 '등관대묘登冠大墓' 문제를 어케 보느냐였고, 다음으로 '입지여좌立志如左'의 '左좌'를 어케 보느냐가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 묘권 4장의 연결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죽은 무령왕과 묘지墓地를 매매한 토백土伯 이하 무수한 지하 세계 신들을 어찌 봐야 하는지 문제가 있다. 나는 이 네 가지 중 처음 세 가지는 풀었다고 본다. 남들이 이를 인정하느냐 아니 하느냐 하는 문제는 남았거니와, 저들 문제 하나를 풀 때마다 나로서는 유레카를 외쳤다는 말은 확실히 해 둘 수 있다. 등관대묘 문제는 실은 내가 《유종원집柳宗元集》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오수형·이석형·홍승직 세 중문학도가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 2020. 6. 6.
무령왕릉 베개와 주목朱木 목재조직학이 문화재 혹은 고고학 분야에서도 요긴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니, 무령왕릉에서는 무엇보다 금송金松과 주목朱木이 중요하다. 금송과 관련해 무령왕과 그 왕비 목관을 이 나무로 짰음이 판명되었으니, 무엇보다 이 금송은 한반도에는 자생하지 않는 품종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드러난 사실은 굉장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주목은 크게 주목받지는 아니했지만, 무령왕과 왕비 베개받침대가 있으니, 목재조직학은 저 제작에 쓰인 목재가 주목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 주목은 요새는 조경수로 널리 발견되거니와, 자연상태에서는 한반도에서 고산지대에 군락을 이루며 자생한다. 내가 졸저 《직설 무령왕릉》(메디치미디어, 2016)을 준비하면서, 저 얘기를 다루며 하나 고민이 있었으니, 그런대로 폼나는 주목 사진이 나로서는 없었다는.. 2019. 9. 22.
해직이 준 축복 《직설 무령왕릉》 애초 2001년 완성한 무령왕릉 발굴기 출판사 교정본이다. 가제는 《송산리의 밤》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내가 차일피일 밍기적 대다가 해를 넘겨 이듬해 출간하고자 했지만, 사산死産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풍납토성》(김영사, 2000)을 내고, 곧이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1)를 출간한 직후였다. 서른 중반, 참으로 혈기방장하던 시절이었다. 원고 자판기에 가까워 내가 생각한 주제는 쑥쑥 원고를 떡가래 뽑듯 폭포수처럼 쏟아낸 시절이다. 언제건 맘만 먹으면 내겠지 한 그 초고, 오랫동안 사장한 상태로 방치한 그 초고를 2015년 11월 무렵에 다시 꺼내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교정지가 그때까지 내 서재 한쪽 귀퉁이에 쳐박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찾아내서는 먼지를 털어.. 2019. 8. 21.
무령왕릉에 관련된 인물들 1. 윤주영...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이 30주년을 맞은 2001년, 나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주무 장관이셨는데, 혹 당신이 무령왕릉 발굴을 지시하셨냐 라는 등등을 물었다고 기억한다. 예상대로 그는 이 발굴과 관련한 의미심장한 증언은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조선일보 무슨 고문인가로 있었다. 1928년생, 만 91세인 그는 요즘도 모임 같은 데 간혹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2. 김원룡...당시 국립박물관장이었다. 느닷없는 발굴책임자로 낙점되어 한국고고학, 아니 세계 고고학 사상 유례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하 생략 3. 안승주...무령왕릉 발굴 당시 당장 무령왕릉을 발굴해야 한다고 주창한 공주 지역 역사학계 주축 중 한 명이다. 나중인.. 2019. 6. 9.
죽을 때까지 한국어판은 안내고 냉큼 일본어판 《무령왕릉》을 낸 한국고고학도 한국 고고학자가 자신이 관여한 한국 고고학 발굴성과를 일본어판으로 냈다 해서 그걸로 그가 비난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발굴책임자로써, 더구나 그 보고서 집필을 총괄한 자로써, 한국어판은 죽을 때까지 내지도 않으면서, 냉큼 일본어판 단행본을 발간한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책 발간은 소화 54년은 1979년이다. 출판사는 근등출판사近藤出版社다. 더구나 이 사람은 《조선고적도보》 증보판도 집필했다.《조선고적도보》 가 뭔가? 조선총독부가 기획하고 결과한 사업이다. 제국주의 일본이 망하고서 한참이나 지난 시기에, 그 증보판을 더구나 한국 고고학도가 집필했다는 것이 어디 제정신인가?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대일본제국 신민이었다. 누구인가? 삼불三佛이라는 호를 쓴 김원룡金元龍이란 사람이다. 그가 죽은 .. 2019. 5. 21.
그땐 다 그랬다 vs. 김원룡만 그랬다 세계 고고학상 유례없는 졸속발굴의 대표본 무령왕릉 발굴조사를 옹호하거나 혹은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리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다. 그게 우리의 수준이었다. 고 말이다. 이 유례없는 도발굴 총감독 김원룡은 내 머리가 돌았다느니 환장했다 하면서 그나마 이 졸속발굴이 곧이어 전개된 경주 발굴에서는 교훈으로 작동했다고 자위한 바 있다. 앞 사진은 황남대총 남분 발굴 현장이다. 아마 1974년 무렵일 것이요 무령왕릉 도굴로부터는 불과 3년이 지난 뒤다. 그때는 다 그러했는가? 그게 우리 수준이었는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김원룡만 그러했고 김원룡만 그런 수준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삼불은 고고학도, 발굴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김원룡의 수준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봐라..동시기에 일어난 발굴인데 천마총.. 2019. 5. 19.
Relics from Tomb of King Muryeong In 1971, the tomb of King Muryong of the Baekje Kingdom was discovered and excavated at Gongju, Chungcheongnam-do Province. From this tomb, a great number of artifacts were unearthed. The excavation revealed that the tomb was buried with King Mureung, the 25th king of Baekje along with his queen. The two coffins in the picture are of kings and queens, respectively. On the way to the tomb from ou.. 2019. 5. 2.
내것으로 둔갑한 무령왕릉 스크랩북 육당인가? 이 양반은 빌려온 책 거져먹기로 악명이 높아 내 책은 내꺼, 남의 책도 내꺼라는 도덕률의 진정한 실천자였다. 보다시피 이 신문 스크랩 1971년 7월 무령왕릉 발굴 관련 신문스크랩이다. 5살인 저 무렵, 내가 신문을 봤을 리도 없고, 더구나 우리 동네에 신문이랍시고 농민신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때가 70년대 중반 이후이니, 내가 만든 스크랩은 아니요 더구나 헌책방 같은데서 우연히 건진 보물도 아니다. 내가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특집을 준비하던 2001년, 그 소식을 접한 어느 교수님이 나한테 이런 스크랩이 있으니 참고하고 돌려달라 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이형구 선생이시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2016)까지도 스크랩북은 내 수중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 선생님이 그런 사실을 잊.. 2019. 4. 27.
"참으로 순조로운 발굴" "발굴은 그리하는 줄 알았지 뭐"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은 그 발굴 전과정이 요새 기준으로 하면 생중계된 한국 최초의 발굴현장이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던 일이다. 뭐 그만큼 발굴이 개판이었다는 말이다. 기자들이야 언제나 발굴현장의 정보통제를 비난하지만, 솔까 언론에 완전 개방한 상태에서 발굴이 제대로 진행될 리 있겠는가? 우왕좌왕 개판이었다. 그에 더해 기자들 역시 발굴현장을 제대로 취재해 본 적도 없었다. 알아야 면장이라도 하는데, 난생 처음 접한 발굴현장은 그만큼 신기할 뿐이었다.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무령왕릉 발굴이 끝난 뒤 이 사건 보도를 내내 특종보도한 한국일보 취재기자 방담기다. 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발굴 진행은 참으로 순조로왔습니다" 이 한마디가 무령왕릉 발굴 모든 것을 함축한다. 그날 무.. 2019. 4. 26.
무령왕릉을 지키는 유니콘Unicorn 궁댕이다. 빵빵한 방댕이다. 정육점에서 비교적 쉽사리 본다.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입구를 지키던 돌짐승[石獸]인데 뿔이 하나인 유니콘이다. 지금은 국립공주박물관을 지킨다. Guardian of Tomb of King Muryeong 백제 무령왕릉 진묘수百濟武寧王陵鎭墓獸 2019. 3. 25.
남자 무덤에 다리미는 왜 묻었을까? 다리미가 동아시아 고대의 무덤에서 꽤 많은 수량으로 출토한다. 앞 사진은 공주 송산리 왕 부부를 합장한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현실玄室 중에서도 왕비를 묻은 쪽 발치에서 나왔다. 다리미라고 하면 대체로 여성이 옷을 다리는데 사용하는 도구라 하지만, 그런 까닭에 여성이 전유專有하는 기물器物이라 하지만, 의외로 남성을 묻은 곳에서도 적지 않게 출토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는 비단 무령왕릉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고대 동아시아 무덤 매장 패턴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그 출토 위치를 보면 피장자被葬者의 머리 아니면 발치 쪽이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 아니, 질문을 바꿔본다. 왜 다리미를 무덤에 피장자와 더불어 매장하는가? 나는 이를 북두칠성北斗七星으로 본다. 요컨대 칠성판七星版이거나, 그 대용품으로 .. 2019. 3. 24.
밍기적대다, 15년을 묵히다가 변비가 된 《직설 무령왕릉》 March 21, 2013 at 8:11 AM 일기장에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늘 아침...각중에 2001년 출간 예정으로 있다가 출판사에서 교정 원고 넘겨 받은 상태에서 출간하지 못한 '송산리의 밤..무령왕릉 발굴비화' 원고가 생각났다. 아까비.... 하지만 이로부터 대략 3년 정도가 지난 2016년 4월 30일자로 더는 '아까비'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2015년 11월 28일, 나는 연합뉴스에서 공식 해고되었다. 해고야 그 전에 이미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었으니, 아무튼 내 해직 일자는 저 날짜였다. 그 무렵 나는 실컷 놀자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하고자 한 글이나 실컷 쓰자 했다. 하늘이, 아니, 박근혜 적폐와 그네들이 꽂아넣은 적폐 경영진이 이리도 나한테 소중한 휴게를 주었으니 이때다.. 2019. 3. 21.
접이식 공책으로 해체한 무령왕릉 묘권墓券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 무령왕릉 출토 돌판 두 장을 우리한테 익숙한 종이책 혹은 공책으로 환원하면 이렇다. 이 한 장을 만들기 위해 나로서는 20년을 쏟아부었다. 보다시피 이렇게 종이책으로 묶어 놓으니, 그 특색이랄까 특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무덤방으로 통하는 무덤길에 놓인 상태로 발견된 돌판은 두 장. 이 돌판은 각각 앞과 뒤로 텍스트를 적었다. 따라서 이들 두 돌판은 전체 4쪽이다. 그 쪽마다 순서대로 ①, ②, ③, ④쪽이라는 번호를 붙였다. ①과 ②가 돌판 한 장이라, 그 앞뒤다. ③과 ④는 다른 돌판이라, 역시 그 앞과 뒤다. 이를 하나로 이어붙여 놓으니, 공책이 저런 식으로 펼쳐진다. 이렇게 보면, 이 돌판 두 장이 첩식帖式 문서라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 4폭 병풍이다. 이 두 .. 2019.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