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무령왕릉57 1971. 6. 2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허가 1971년 6월 2일 오후 2시.당시 문화재관리국이 어디 있었는지 자료는 찾아봐야겠거니와 그 회의실에서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제7차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록에 의하면 참석자는문화재위원으로조명기·손보기·최희순·정인국·임창순·이기백·김원용·김유선이었으며전문위원 1명이 배석했다. 기타 참석자로정재훈·백동호·김상봉·장경호 사무관·김선배·정기영이 보인다.사회는 조명기, 간사는 장인기, 서기는 김재겸이었다.이날 두 번째 보고 사항으로 다음이 있었다. 문화재 보수 설계검토 나, 공주 공산성 고분군 보수공사 1)심의 결정: 원안대로 가결함 2) 보수내용 : (1)5.6호분 봉토 해체 강회 다짐 (2) 5,6호분 배면 암거 (3) 6호분 석축 개축 (4) 6호분 조명이 공사를 통.. 2024. 12. 30. 귀 똥 찬 무령왕릉 진묘수 이야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라는 데서 근자 역사 이야기라며 저 무령왕릉 무덤 입구를 지키던 이른바 진묘수鎭墓獸 이야기를 저와 같이 다루었거니와그 내용이 재미가 있다.저에 부연하기를🦁 다리 없는 진묘수 이야기 🦁무령왕릉 앞에서 1500년 동안 꼼짝없이 무덤을 지킨 진묘수!💔 부러진 다리에 깃든 간절한 믿음🔴 빨간 입술로 악귀를 물리치고💪 부러진 다리로 도망가지 않겠다는 충성무덤을 지키며 아버지의 안녕을 바랐던 성왕의 마음, 여러분도 느껴지시나요?✨ 고대 사람들의 소망과 믿음을 담은 진묘수, 지금 만나보세요!저 진묘수는 저에서 말하듯 안쪽 무덤방에 무령왕 부부를 안치한 무덤길 입구 정중앙을 지키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첫째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이 바른 자세를 지키고 있었고둘째 유독 네 발 중 뒷다리는 확실한.. 2024. 11. 24. 볼짱다본 무령왕릉 아주 가끔 국립공주박물관에 들를 때마다 나는 그쪽에서 일하시는 도슨트니 하는 가이드 설명을 원치 않게 엿듣게 되는데이 박물관에서 무령왕릉이 차지하는 위치야 새삼할 필요도 없거니와그 안내 혹은 설명이 실은 90프로가 내 책 직설 무령왕릉(메디치미디어, 2016)이거나 그 토대가 된 내 과거 기사들이다.그것이 나온지 이젠 10년이 가까워져서 나는 이제 더는 할 일이 없게 되었고 저걸로 내 할 일은 다했다고 본다.문제는 그 다음.내가 나한테 설정한 무령왕릉 다음 이야기가 있다. 이걸 아직 손을 못대고선 만지작거리고만 있는데 이러다 어느날 어느 순간 걸신걸린 듯 다시 붓을 들게 될 지도 모르겠다.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현재 단계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죄다 풀어냈고 그것이 저 현장에서 정전처럼 군림한다는 .. 2024. 9. 1. 백제 무령왕릉의 ‘등관대묘登冠大墓’ 재고 - 동시대 중국과의 사례 비교를 중심으로 - 김태식, , 《Journal of China Studies》 제7집, 부산대학교 중국연구소, 2009.08. pp.1-45 초록 영어 The discovery and excavation of King Muryeong's tomb in 1971 has been great help to solve many questions or mysteries concerning the history of Baekje dynasty, but at the same time it has brought on many problems. In that respect its discovery was not only a great blessing, especially to historians, but it remains to a hu.. 2024. 4. 6. [무령왕릉이 봉착한 최대 난제 둘] (4) 미완성으로 끝난 죽음 그렇다면 왜 무령왕릉은 개봉 당시 부부 위치가 바뀌었고, 머리는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두었는가? 이 의문은 실은 역발상으로 간단히 풀리는데, 그것이 죽음의 경우는 반대지만,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무령왕과 그의 왕비 모두 살아있는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하여 저 부부는 살아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했는가? 그 해답은 빈殯에 있다. 더 간단히 말해 빈소 그대로의 모습인 까닭이다. 앞서 나는 동아시아 전통 장송 관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군주건 나발이건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며 이 두 번의 죽음을 거쳐야 비로소 죽음이 완성한다는 말을 했다. 예서 관건이 빈殯이다. 이 빈이란 더 간단히 말하면 생물학적 죽음과 상징으로서의 죽음이 걸치는 기간을 말한다. 완전한 죽음은 저 두.. 2024. 3. 27. [무령왕릉이 봉착한 최대 난제 둘] (2) 펀더멘털로부터의 이탈 혹자는 이런 반론을 가할지도 모르겠다. 저 무령왕 시대에 백제가 그렇게 예제禮制를 철저하게 관철하려 했을까? 그러니 이런저런 절차 생략하고 했을 것이니, 남녀 위치가 바뀐 것도, 머리를 남쪽으로 둔 것도 하등 이상할 점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우리한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예제가 규정한 그대로 실현하려 했다. 3년상만 해도 그것이 공자에서 비롯하지만 그건 책에서나 있는 이야기일 뿐이요, 실제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니 해서 각종 편법이 판을 쳤으니, 이는 무엇보다 책 혹은 이상이 규정하는 절차일 뿐이요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관철하기에는 적지 않은 애로가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은 희한하게도 곧이곧대로 이 예제를 그대로 실현하려 했다. 당시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실현하려 하지 .. 2024. 3. 25. 이전 1 2 3 4 ··· 10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