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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51

발굴 두 달 뒤에 나온 무령왕릉 조사 중간보고(71년 9월) 출전 : 박물관신문 제15호 (1971년 09월) 무녕왕릉 조사 중간보고 (종합 조사단 작성) 고고 및 기초조사반 보고 1, 출토 유물의 분류와 목록작성 발굴과정(發掘過程)에 있어서 출토상태에 따라 구분하여 채집한 유물의 수량은 막대하였다. 이것을 품목별로 카아드를 작성하고 정리하여 분류한 결과 그 수량은 별표 목록과 같이 88종으로서 총 2천5백61점에 달하였다. 부장품(副葬品)의 대다수는 장신구류(裝身具類)에 속하며 52종 2천4백96점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장신구류는 또한 대부분이 금·은의 귀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중에서 금제품은 30종 2천2백21점의 다수를 차지한다. 은과 함께 금을 부분적으로 사용한 유물의 수도 포함시키면 그 수와 종류는 훨씬 증가된다. 이 왕릉의 부장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소.. 2024. 3. 5.
공주 송산리고분 1~4호분 발굴이 불요불급한가? 근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라고 이름을 바꾼 공주 송산리고분군 소재 백제시대 왕릉급 무덤 중 1~4호분이라고 명명한 데 네 곳을 파기로 하고는, 그 현장을 2023 대백제전과 연계해 공개하기로 했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한데 나는 이 발굴조사 계획을 의심한다. 첫째, 무덤을 발굴해야 할 만큼 불요불급한가? 둘째, 그 이유는 납득을 할 만한가? 크게 두 가지 까닭에 기반해 접근한다. 이번 조사 계획과 관련해 문화재청 혹은 부여연구소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공개하는 1~4호분은 무령왕릉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 공주 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가루베지온(軽部慈恩)이 1927년 3월에 처음 확인한 것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고했고, 같은 해 10월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2023. 9. 30.
《직설 무령왕릉 추보》 (2) 독자가 없는 텍스트에서 찾은 민족주체성 이건 내가 졸저 《직설 무령왕릉》에 담는다고 하다가 그만 잊어먹고 빠뜨린 대목이라 아쉬움이 크다. 늦었으니 어찌 하리오? 무령왕릉 묘권墓券 제1장 제1쪽은 흔히 무령왕 묘지墓誌 혹은 묘지석墓誌石 혹은 묘지명墓誌銘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무령왕이 언제 몇 살로 죽어 어찌해서 이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간단한 내력을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는 묘지명이 아니라 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관련 증서, 그러니깐 묘권墓券의 일부로써 서문에 해당하는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의하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年 62세 되던 해인 계묘년癸卯年 5월 병술丙戌 삭朔 임진壬辰일에 ‘붕崩’ 했다고 한다. 붕이란 붕 떴다는 말이니 죽었다는 말의 높임 혹은 은유다. 한데 이에서 이 글자를 발견한 이들은 백제가.. 2023. 6. 8.
《직설 무령왕릉 추보》(1) 박물관 뜰의 쌀가마니 어제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미술사학도 강우방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내가 무령왕릉 발굴기를 냈다는 소식을 접하시곤 "무령왕릉이라면 나도 증언할 게 있다"면서 얘기를 쏟아냈으니 이야기인즉 이러했다. 강 선생이 무령왕릉 발견소식을 접하기는 그날 석간 신문을 보고서라 했으니 7월 9일이다. 이때 그는 경주인가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대전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는 냅다 송산리 고분군으로 달려갔댄다. "내가 도착한 게 오전 8시쯤일 거예요. 한데 현장엔 아무도 없더라고? 이게 어찌된 일인가 했지. 무덤 바닥을 보니 빗자루 자국 비슷한 게 있더라고?" 그래서 다시 냅다 공주박물관으로 갔다고 한다. 한데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박물관에 가서 보니 김영배 관장이랑 수위 달랑 두 명만 .. 2023. 6. 7.
국립전주박물관 강연록 '무령왕릉과 쌍릉사이, 백제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전문 파일 2023 국립전주박물관 박물관대학 '문화재 그 이면의 이야기' (국립전주박물관 강당) 중 4월 13일 첫 번째 강좌로 나는 아래를 강연했다. 무령왕릉과 쌍릉사이, 백제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이 강연록은 이미 챕터별로 농가 게재했지만, 그 원문 전체 파일을 첨부한다. 오타 등등이 더러 발견되는데 곤치지 아니했음을 밝힌다. 2023. 4. 14.
[무령왕릉과 쌍릉 사이, 백제 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일신한 치석治石 기술, 전대미문하는 무덤 집을 만들다 그렇다 해서 하루아침에 없던 기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전축분을 이식·습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그 이전 우리는 명색이 치석治石이라 하지만 구석기 시대 그 기술을 벗어나지 아니해서 가공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돌맹이를 주어다가 새로 쌓았을 뿐이니 그건 치석이 아니라 실은 재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문제는 바로 이거다. 말 그대로 돌을 가공하자! 이 정도는 공정이 하나 더 늘고 공사 단가가 높아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차피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우리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기에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 백제 엔지니어들이 돌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돌덩이는 애초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잘라내고, 그것은 다시금 ..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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