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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62

신이神異의 창출, 역사조작을 거부한 유송劉宋 창건주 유유劉裕 유유劉裕(363~422)는 동진東晉의 전쟁 영웅이다. 특히 권신 환현桓玄(369~404)이 동진 황실을 무너뜨리고 403년에는 스스로 황제라 일컫고 국호를 초楚라 하자, 그 이듬해 유의劉毅와 더불어 경구京口에서 거병하여 토벌한 공로로 신하로는 더 오를 데가 없는 구석九錫을 받았다. 한번 무너진 왕조는 재건하기는 했지만, 이미 권위는 실추할 대로 실추했으며, 권력은 점점 유유한테로 기울어졌지만, 어찌된 셈인지, 유유는 본색을 숨기며 17년이나 지내다가 58살이나 된 공제恭帝 사마덕문司馬德文 원희元熙 2년(420)에 접어들어 이해 정월에야 집권야욕을 노골화하니, 이때 송왕宋王에 책봉되어 그 본부 수양壽陽에 주둔 중이던 유유는 신하들을 불러다가 주연을 베풀고는 이렇게 운을 띄웠으니 "환현이 찬위篡位하면서 천명.. 2021. 2. 15.
역사조작은 이세민 이성계처럼 1. 스무살 꼬맹이 주제에 지가 당 왕조 창업을 다하고, 쿠데타로 집권해서는 간언을 잘 받아 태평성세를 구가한 것처럼 생쇼를 해댄 이세민李世民처럼 2. 위화도 회군이 불가피했던 것처럼, 또 천명인 것처럼 사기를 치고, 그 주모자도 그 자신이 아닌 조민수였음에도 그 공을 탈취한 이성계처럼 역사는 이렇게 조작해야 한다. (2016. 1. 23) *** 당조唐朝가 개창한 618년, 599년생인 이세민은 불과 스무살 꼬맹이였다. 개창주 이연李淵의 아들 중에 절대의 창업공신은 장자 이건성李建成(589~626)이었다. 이세민보다 열살 많은 그가 아버지를 도와, 때로는 아비를 대신해 풍찬노숙했다. 나중에 현무문玄武門의 반란의 통해 동생 이세민한테 주살되고 만다. 이세민 시대에 편찬된 실록은 이같은 이건성의 역할을 철.. 2021. 1. 27.
유득공이 소개한 영길리국과 두목관 마알이니·시당동 영길리국[영咭唎國] 계축년(1793, 정조17) 연경에 사신으로 간 뇌자관賚咨官의 수본手本이다. "영길리국暎咭唎國(잉글랜드)은 광동의 남쪽 해외에 있는데, 건륭 28년(1763, 영조39)에 조공을 바치고 금년에 또 조공을 바쳤습니다. 두목관頭目官은 마알이니碼戞이呢와 시당동嘶噹㖦 두 사람인데 그 나라 국왕의 친척입니다. 일행이 모두 724명인데 그중 100명은 경사京師에 왔다가 이어 열하熱河로 갔고, 나머지는 천진부天津府에 머물렀습니다. 진공물進貢物은 19종으로서 제작이 기이하고 정교하여 서양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9월 초에 천진의 해로를 따라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상고해 보건대 이들은 곧 홍모이紅毛夷[털이 붉은 오랑캐-인용자]로서 왜倭가 길리시단吉利是段(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2021. 1. 24.
조선시대 삥땅의 요람 광흥창과 군자감[兩倉] 광흥창廣興倉은 서강西江에 있는데 백관百官의 봉록 지급을 담당하고, 군자감軍資監은 용산에 있는데 금군禁軍과 조례皁隷의 급료 지급을 관장한다. 이것이 양창兩倉이고, 다 호조戶曹에 속한다. 조운漕運으로 물자가 모이는 곳인지라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교활해서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양창에서 벼슬한 자는 필경 포흠逋欠을 했다거나 감독을 잘못했다거나 해서 처벌을 받는다. 나는 을사년(1785, 정조)에 군자감 판관判官이 되었고 몇 년 뒤 호조가 나를 조사했지만 문서를 후임자에게 이관한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다행히 무사했다. 경술년(1790)에 광흥창 주부主簿가 되고 계축년(1793) 가을에 호조가 또 나를 조사했는데, 앞뒤의 낭관郎官 10인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법에 따라 처벌되었지만 나는 재임한 넉 달 동.. 2021. 1. 24.
용수龍壽-용춘龍春이 다른 사람인 빼도박도 못할 근거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즉위년 조에 김춘추 계보를 기술하면서 그의 아버지를 일러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伊飡 용춘龍春[혹은 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라 했다. 용수는 누구이며 용춘은 또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삼국사기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龍春[一云龍樹])”이라 했을까? 용수와 용춘은 같은 인물일까? 아니면 다른 인물일까? 같은 인물이라면 표기법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판별할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가? 있다. 화랑세기인가? 아니다. 위 태종무열왕본기에 앞선 같은 신라본기에 용수와 용춘이 각기 다른 데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먼저 진평왕본기 44년(622)조를 보면 이해 2.. 2020. 12. 19.
왜 삼년산성일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 신라본기新羅本紀 제3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에 이르기를 삼년산성을 쌓았다[築三年山城] 고 했거니와, 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체 부연 설명이 있으니 삼년이라는 말은 이 공사를 시작해 마치기까지 3년이 걸렸으므로, 그리 이름한 것이다[三年者, 自興役始終三年訖功, 故名之] 묻는다. 이와 같은 삼년산성 축성 내력과 그에 따른 명명법은 왜 기록에 남았을까? 의문을 품어봤어야 답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아무도 묻지 않았으므로, 문제의식도 없고, 그에서 빼낼 만한 것이라고는 매양 하는 말이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서북방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 성으로 기능하였다." 와 같은 언급에서 단 한 치 진보가 없다. 이와 같은 설명은 하나마나 한 것이니, 이딴걸 분석이랍시고 ..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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