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탐방기는 내가 발굴해 일찍이 연합뉴스를 통해 전문을 공개했으니, 아마도 이곳저곳에서 검색이 될 것이다. 이 탐방기는 1925년 을축년대홍수(乙丑年大洪水) 직후 현장을 탐방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보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분명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일 가능성을 지목했으며, 두번째로, 이미 당시에 기와가 출토됐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풍납토성에 대한 이렇다 할 만한 조치라고는 1927년 고적(古跡)으로 지정한 것 말고는 없다. 그것도 당시 현존하는 성벽 구간만 지정했으니, 이것이 대한민국 사적으로 자동 빵으로 재지정되면서, 역시 성벽만 지정되고 말았다.
1967년 이곳을 발굴한 김원룡은 이곳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곳임을 직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역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하고 말았다.
이 탐방기는 2001년 졸저 발간 직후 식민지시대에 간행된 풍납토성 관련 글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려는 생각에서 모은 것 중 하나다. 그때 모은 것이 다섯 편인가 되고, 초고는 거의 다 번역했지만, 이러저래 미뤄지다가 그만 사산死産하고 말았으니, 언제 때가 되면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기요노 겐지(淸野謙次, 清野謙次, 청야겸차)의 풍납토성 탐방기(1926)
기요노 겐지(淸野謙次, 清野謙次, 청야겸차)의 풍납토성 탐방기(1926)
해제 : 1925년 여름,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9월 25일 경기 광주 구천면(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을 탐방한 일본인 형질인류학자 기요노 겐지의 탐방기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이 글은 1926년 7월에 발간된 《민족(民族)》(民族發行所 발행)이라는 잡지 제1권 제5호 160-161쪽에 걸쳐 '조선 경기도 구천면 풍납리 백제유적(朝鮮京畿道九川面風納里の百濟遺跡)'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까마득히 잊혀진 존재였던 풍납토성이 20세기 일본 식민치하에서 어떻게 '발견'됐는지,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다.
= 조선 경기도 구천면 풍납리 백제유적 =
작년 봄에는 경주로 신라 고도를 방문했고, 금년에는 평양으로 낙랑과 고구려 유적을 방문한 뒤에 경성의학회(京城醫學會)에 참가하고자 경성으로 들어갔다. 호텔로 세키노(關野·세키노 타다시<關野貞>를 말함-인용자) 박사를 방문하자, 박사는 며칠 전에 발견한 백제시대 유적에 관해 말했다. 이번 큰물로 한강 흐름에 변화가 생겼고, 흙탕물은 풍납리마을을 지나 흘러 강안 토사를 씻어내렸다.
며칠 전 박물관으로 고동기(古銅器) 2점을 팔러 온 자가 있었다. 발견지를 듣고 가 보니 풍납리였는데, 큰물에 씻겨간 토사 단면에 커다란 항아리[壺)]가 노출돼 있었으니, 동기(銅器)는 이 항아리 속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이 부근 단층에는 무수한 백제시대 고토기(古土器)가 출현하고 있으므로 한번 가보면 어떤가.
그날 세키노 박사 의견으로는 이곳에는 성벽 흔적도 있으므로 백제왕성 유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인데, 즉, 백제는 이곳에 도읍한 뒤에 부여(공주의 잘못인 듯) 땅으로 옮겨간 것이라고(한다).
유리건판이 포착한 풍납토성
총독부박물관을 방문했는데 과연 훌륭한 동기(銅器)가 있다. 전날 후지다(藤田·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를 가리킴-인용자), 고이즈미(小泉·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를 말함-인용자)군 등이 채집해왔다는 토기 조각이 많았다.
신라 토기와 흡사하지만 토질이나 문양 상태 등이 다르다. 5만분의 1 참모본부 지도를 보니 경성에서 동쪽으로 2리 반을 떨어진 광장리 한강 선착장 조금 하류에 풍납리 촌락이 있다. 과연 이곳에 남북 12~13정(町), 동서 10정 남짓 거리에 제방이 드러나 있다.
다이쇼(大正) 14년(1925) 9월 25일은 쾌청했다. 총독부 의과대학장 시가(志賀) 박사와 고등학교 교장 오다 쇼고(小田省吾)씨와 함께 광장리(지금의 광진구 광장동)를 자동차를 빌려 달렸다.
너울대는 한강 물을 건너 맞은편 강안에 이르자 강과 인접한 단층에는 이르는 곳마다 크고 작은 무수한 백제시대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노출된 토기 중 굽다리잔[高杯] 완품과 항아리[壺] 완품을 얻었다. 토기 중 어떤 것은 고식(古式) 신라토기를 닮았으나 어느 것은 낙랑(지금의 평양 일대) 주변의 중국 토기와 흡사하다.
을축년 대홍수(1925)가 준 선물 청동초두
계속 나아가 성벽을 넘었다. 성벽은 높이 2장(丈) 쯤 되는 토벽이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다. 토성 서쪽은 홍수로 씻겨 내려가 흔적도 없다. 성 안쪽은 밭으로, 이곳에는 풍납리 소부락이 있었으나 홍수로 집은 유실되고 기와와 돌이 흩어져 있으며, 여러 곳에 큰 구멍이 생겨 물을 뿜어내고 있다.
참담한 폐허의 마을 벌판에 앉아 점심을 먹고, 돈이나 벌 요량으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한 동네사람에게서 채집한 토기편을 건네받고는 한동안 (토기) 채집에 시간을 보냈다. 기와 조각은 적지 않으나 평평한 겉면에는 새끼무늬가 있어 고구려 평기와를 닮아 있다. 옅은 쥐색 기와뿐이었으며 와당은 볼 수 없었다.
오후 2시, 유적지에서 강 벌판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선착장으로 나와 다시 자동차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清野 謙次(きよの けんじ、1885年8月14日 - 1955年12月27日)は、日本の医学者、人類学者、考古学者、考古学・民俗学資料の収集家。生体染色法の応用で組織球性細胞系を発見したことで知られる。
1885年、岡山県医学校長兼病院長の清野勇の長男として生まれる。父の勇は東京帝国大学医学部第一期卒業生で、のちに大阪医学校の校長・病院長も務め、臨床医学の大家として知られ財を成した[1][2]。祖父の清野一学は沼津藩医[1]。謙次は北野中学、第六高等学校 (旧制)を経て、考古学の道を希望したが父親が許さず、京大医学部へ進学[1]。
1909年、京都帝国大学医学部を卒業。藤浪鑑の病理学教室へ助手として入り、生体染色の研究を始める[3]。外科の鳥潟隆三、生理学の加藤元一(のち慶應大学移籍)と並び、「京大の三秀才」と言われた[3]。
1912年~1914年、ドイツのフライブルク大学に留学し、ルードウィッヒ・アショフ(de:Ludwig Aschoff)教授のもとで生体染色の研究を続行。1914年組織球性細胞を発見。1914年の復活祭の日に、それをhistiocyteと命名することをアショフ教授に許され、世界の病理学者の仲間入りをする。帰国後、京大講師となる。
1916年、京都帝国大学医学部助教授となる。医学博士の学位を受ける。
을축년대홍수 기념비
1917年、ドイツ、フランスへ留学[4]。
1918年から1919年に行われた国府遺跡の発掘に参加し、考古学熱が再燃[3]。このころより日本全土にわたり石器時代人骨の発掘・収集につとめ、さらに樺太のアイヌ人墓地から数多くの人骨を発掘・収集した[5](アイヌ墓地盗掘は、清野以前にも1865年にイギリス人学者が、1888年に小金井良精が行なっている[6])。各地から千余体の遺骨を集め、父親が建てた自邸である京都市田中関田町の広大な洋館にそれらを保管し、夫婦は1200坪ある敷地内に小さな日本家屋を建て、そこで暮らした[3][2]。
1921年、京大医学部教授となり、微生物教室を担当。視察のため渡欧[4]。
1922年、生体染色の研究に対して帝国学士院賞を受賞。
1924年、病理学教室を兼任。アイヌ人と縄紋人とは骨が異なることを指摘し、アイヌ人とは異なる均一人種が日本にいたとし、これを「日本原人」と呼び、『日本原人論』を出版し、東大の小金井良精考古学教授の縄紋人アイヌ説に反論[1]。
1926年、「津雲石器時代人はアイヌ人なりや」という論説を発表。原日本人論争において以後主流の説を確立するまでに至る。
1926年、藤浪鑑の後継者として京大病理学教室の専任教授となり、2年前に放火により焼失した病理学教室の研究資料の再収集に当たる。その際、予算申請書の金額の末尾に全項目0を一つ書き加えて申請し、文部省がそのまま予算を執行したため、余るほどの金額を獲得した[7]。
1938年、生体染色の研究総括をドイツ語論文として刊行し、世界の研究所と研究者約1000名に対し頒布。京大文学部考古学の授業を担当。書生らの面倒見もよく、教室の研究生を博士にすることでは京大一だった[1]。
同年、後述する窃盗事件(清野事件)を起こし、有罪判決を受け、京大教授を免ぜられる。
清野 謙次
免職後
上京して目黒不動尊近くの邸宅で暮らし[2]、太平洋協会の嘱託となり、大東亜共栄圏建設に人類学者として参加。大東亜共栄圏建設における国民のイデオロギー的統一を積極的に企てた。また、京都大学での愛弟子にあたる石井四郎が部隊長だった満州731部隊に対しては病理解剖の最高顧問を務め[8]、人材確保・指導などに「異常なまでにてこ入れした」とされる[9]。
戦災で目黒の自邸が全焼し、茨城県の木原村に疎開し、6-7年隠棲する[2]。
戦後、アメリカとの密約に基づき戦犯追及を逃れ、依然として医学と考古学の分野で影響力を残し、厚生科学研究所長や東京医科大学教授を歴任。 戦時中から著していた3部作『古代人骨の研究に基づく日本人種論』(1949・岩波書店)『日本考古学・人類学史』(1955年・岩波書店)『日本貝塚の研究』(1969年・岩波書店)をまとめ、戦後に刊行した。
収集した大量の考古学・人類学関連資料を整理し、1953年ごろ、目黒の焼け跡に洋館を新築して移り住んだが、1955年12月27日に心臓麻痺で急逝した[2]。死後、自宅に残っていた一般蔵書数千冊が入札売り立てされ、その総額は当時の金額で500万円にのぼったという[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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