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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인더스문명은 평화로왔던 지상천국인가 (2)

by 초야잠필 2019.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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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그 때 발굴단 숙소 옥탑방 술자리에 누가 있었던지는 내 기억이 확실치 않다. 

아마 신데교수와 나 외에 김용준 박사, 이렇게 셋이 술을 마시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후레쉬 불에 의지하여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래는 신데교수와 나누었던 이야기 중 기억 나는 대목만 대화 형식으로 정리 해 본 것이다. 이날 저녁때 있었던 대화일수도 있고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편의상 모두 묶어 대화로 정리하였다. 

라키가리 유적 현장을 가보면 이렇게 쌓아 놓은 소똥이 가득하다. 소똥은 이렇게 잘 빚어져 연료로 사용된다. 


나: 막상 여기 와보니 그냥 소 똥을 말리는 언덕 뿐이다. 여기 지하에 5천년 전 도시 유적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나? 

신데교수: 여기는 이미 ASI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우리 문화재청과 문화재연구소를 합친 정도의 기관)가 예비조사를 오래전에 진행했던 곳이다. 시굴 결과 지하에 거대한 인더스문명 도시가 남아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용준 박사: 인도는 산이 별로 없고 대부분 평지라 인더스 문명 도시가 버려지게 되면 오랜세월을 두고 날아온 흙먼지가 이를 덮어 인더스문명 유적은 평지위에 솟은 언덕 같은 모양을 하게 된다. 라키가리 유적이 전형적으로 그런 모습이다. 


하늘에서 본 라키가리 유적. 평지에 솟은 언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언덕위에 쌓인 흙을 제거하면 모헨조다로 같은 도시가 나타난다. 가운데 모여 있는 사람을 보면 유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 여기 오기 전에 돌라비라 유적을 봤었다. 라키가리 유적을 발굴하면 그런 도시가 나타나는 건가? 

신데교수/김용준 박사: 여기가 더 넓다. 라키가리 유적은 현재까지 추정이 맞다면 인더스문명 최대규모의 도시다. 

나: 돌라비라 유적을 보니 그 규모와 도시 유적으로 엿볼수 있는 기술 수준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 규모의 도시를 그렇게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다면 사회의 발전 수준이 굉장히 높았을 것 같다. 

신데교수: 그렇다. 어떤면에서는 요즘보다도 나은 면도 있으니까.. 

발굴이 끝나 일반 공개되고 있는 돌라비라 유적. 전면에 보이는 언덕 부분이 도시인데 흙을 제거하여 지면하의 구조물이 드러나 있다. 아래 부분에 보이는 것은 도시 주변에 정밀하게 구축한 저수지. 도시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고도의 기술자가 도시 건설에 동원되었다는것은 실제로 도시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나: 인더스문명을 이룩한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어느정도로 밝혀진 것인가? 

신데교수: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밝혀졌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지만. 인더스문명은 문자는 있었던것이 확실하지만 해독이 안되었다. 정보가 매우 취약하여 아직도 많이 모르는 부분이 있다. 

인더스 문명에는 문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있다. 하지만 해독이 안된다. 사진은 돌라비라 유적에서 확인된 인더스문명 문자. 


나: 도시 거주지를 보니 집들이 매우 일정한 크기의 구획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 같았다. 

김용준 박사: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수수께끼가 그것이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를 보면 어마어마한 크기와 기술적 수준에 압도되어 거대한 제국을 연상하기 쉽지만 지금까지 왕릉이라 할만 한 것이 발굴된 것이 없다. 왕릉이 문제가 아니고 도시 거주민들 사이의 정치경제적 수준차이가 과연 있었을까. 이것도 확신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 때문에 인더스 문명 사회를 국가단계로 봐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하기 곤혹스러워 하는 시각도 있다. 

돌라비라 유적의 거주지역. 앞에 잘 설계된 배수시설이 보인다. 거주지역의 집들은 아마도 2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규격이 매우 일정하다. 도시가 모종의 권력에 의해 잘 통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도로 정밀하게 설계된 것이 확연한 모헨조다로 유적. 이 정도 수준의 문명이 국가단계냐 아니냐를 고민하는 것을 보면 놀라울 뿐이다. 이들의 고민의 수준을 보면 동아시아가 유적에 "국가단계"라고 부여하는 기준이 너무 후한것이 아닌가 고민도 하게 된다는. 


요약하면, 

인더스 문명은 바로 이런 이율 배반성이 문제이다. 도시를 들어가면 당시로서 초고도의 기술이 직접되어 조성된 거대한 저수지, 도시 시설, 심지어는 하수시설과 수세식 화장실까지 보인다. 하지만 왕릉이 없다. 무덤에서는 피장자 간에 발굴되는 공반 유물의 질적 차이도 잘 안 보인다. 도시안의 거주지역에는 매우 구획화된 크기의 집들이 확인된다. 거대 저택도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무기가 안나오는 것은 아닌데 나오는 수량이 매우 적다. 인더스 문명에는 체계화된 군대가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어렵다. 이 처럼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군대도 없이 이 넓은 판도를 유지한다? 무엇보다 인더스 문명은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합친것 보다도 더 큰 크기의 지역에 퍼져 있었고 문명권 내 문화적 통일성도 매우 강했다. 


인더스 문명의 판도. 이 처럼 넓은 지역이 고도의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그토록 오랫동안 번영하고 있었는데 왕릉도, 군대의 흔적도 뚜렷하지 않다는 것은 남아시아 고고학계의 학술적 논쟁거리이다. 이 문명의 실체가 무엇인가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아마도 이런 유적과 이런 문화가 동아시아에서 확인되었다면 어떤 학자라도 "대제국"이 이 시대에 있었다는데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며 여기에 의문을 가진 사람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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