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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38

방진공법을 적용한 서울지하철 1호선 남대문 공사 "전부다 전철화를 같이 해가지고 연결을 하게끔 했는데, 요새 학자들 쓰는 융합계획이지. 지하철만 건설하는 게 아니고 기존 철도를 전철화랑 같이 한다는 거죠. 그때 양 시장이 안 오셨으면 도저히 일체를 못 만들고 도시교통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상태에요. 서울시 도시계획은 원래 좁은 장소여서 1,000만을 포용하기에는 도시계획적으로 결함이 많은 거에요. 지하철 노선만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교통에 철도를 갖다가 보완한 거지... 지하철이 안 만들어졌으면 서울시 도시계획은 빵점이에요." 김명년 (전 지하철건설본부장) 땅 위도 땅밑도 제대로, 탈 없이 1971년 4월 12일 시청 앞 광장, 수많은 인파 속에서 착공식을 개최하며 지하철 공사의 시작을 성대하게 알렸다. 하지만 이내 곧 건설공사는 여러 난관에 봉착하.. 2024. 8. 15.
보스니아 내전 기획전 정리 서울역사박물관이 작금 개최 중인 국제교류전 를 나는 여러 번 소개했거니와, 이를 기술하기를 유고 연방 해체와 그를 둘러싼 진통 속에서 터진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현대사 대참사를 그 무렵에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시각에서 다루는 참으로 가슴 아프고 먹먹한 전시다.라고 했으니, 그러면서 무엇보다 이 전시는 우리더러 분노하거나 울어달라 하거나 강요 혹은 윽박하지 않는다. 강요 윽박하는 전시가 그 구호가 제아무리 정당하다한들 파시즘 선전과 무에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몹시도 아프다.고 평했으니, 그러면서 나는 이를 장기 연재했다. 그것들을 한 자리에 갈무리한다. 관련 기사는 아래를 클릭하면 된다.  가슴 먹먹한 보스니아 내전 이야기[보스니아 내전] (1) 책이 막은 폭탄[보스니아 내전] (2) 디미제,.. 2024. 8. 2.
[보스니아 내전] (7) 나는 엄마의 자식이다 내 삶은 어머니에게 해를 끼친 사람의 이름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나에게는 내가 전혀 본 적도 없는 악마의 낙인이 새겨졌고,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해야 했습니다. 나는 치욕의 짐을 짊어지고 살았지만, 아직도 내 출생이 왜 그렇게 수치스러운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거울 앞에서 자신들을 비춰볼 용기조차 없는 세상 사람들이 지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누군가의 악마 같은 행위로 인해 나는 ‘누군가의 새끼’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식입니다. 나는 증오의 자식이 아니라 어머니와 양아버지,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자식입니다. 나는 부끄러움의 자식이 아니라.. 2024. 7. 19.
[보스니아 내전] (6) 우리집 정원의 보석함 탱크와 장갑차, 트럭이 우리 마을을 처음 지나갔을 때를 기억합니다. 아직 어렸던 우리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그들이 크닌에서 니슈까지 처음 진격하는 세르비아군 부대 중 일부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호송대는 종종 우리 마을을 지나갔고, 군인들은 때로 손을 흔들며 사탕을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두려움이 퍼져 나갔습니다. 호송대가 나타나면 어린 우리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십 대들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져 분란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어느 날 돌 세례를 받은 호송대가 멈춰 섰고, 소총을 든 남자들이 쫓아왔습니다. 그들은 범인이 우리 집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고 우리 집 정원으로 들이닥쳤습니다... 2024. 7. 19.
[보스니아 내전] (5) 전쟁이 키운 바지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내 형제들은 조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 투즐라로 이사했습니다.우리는 1994년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 당시 나는 예닐곱 살이었고, 몸이 너무 빨리 자라 전쟁 전에 입던 옷이 갑자기 모두 작아졌습니다. 그러자 이웃의 세카 아주머니가 담요 쪼가리를 바지에 덧대어 길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그 바지를 보면, 그 어려운 시기에 세카 아주머니가 급하게 만든 담요로 내 바지를 멋지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카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다미르, 1987년생 *** previous article *** [보스니아 내전] (4) 사과 드실래요? 2024. 7. 19.
[보스니아 내전] (3) 포토샵으로 그려넣은 아빠 스레브레니차를 탈출해 자유 지역에 도착한 우리는 한동안 학교 건물에서 생활하다가 틴자라는 마을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친구들은 내 아버지가 죽었다며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에 상처를 받은 나는 어느 날 모두에게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너무 확신에 차서 말했기에 선생님조차 내 말을 믿고 엄마에게 확인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없었기에 우리는 가족 사진을 찍을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고향과 작별하고 떠날 때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내 여동생은 아빠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 2024.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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