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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인더스문명은 평화로왔던 지상천국인가 (3)

by 초야잠필 201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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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이번 회에서는 하라파 문명의 특이함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이야기 중 한가지-. 

인더스문명은 전쟁이 거의 없었으며 정예화된 군대도 없는 사회였다는 주장에 대해 좀 써보기로 한다. 

인더스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훨씬 평화로운 사회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인더스 문명은 군대와 무력보다는 무역과 종교로 결합된 사회로 지배자는 군인, 황제가 아니라 승려와 같은 집단이었을 것이고 평상시 전쟁도 거의 없었던 사회"라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과 그 사람들에 대한 상상도. National Geographic. 상업과 교역은 인더스문명을 설명하는데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 근거 중 하나가 제대로 잘 만들어진 무기가 인더스 문명 시기 유적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부분은 일정정도 사실이다. 인더스 문명 유적에서는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제대로 된 무기가 발견된 적이 거의 없다. 아마도 상대에게 던지는 용도로 사용했을 거라 보이는 clay ball은 나온다. 무기 뿐 아니라 전쟁과 관련된 그림 등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싸움에 관련된 작품이 거의 없다. 이렇게 보면 인더스 문명은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사회라고 불러도 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회건 크고 작은 분쟁은 있을 수 밖에 없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만큼 평화로운 사회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 조차 인더스문명에는 상비군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데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사실 인더스 문명이 번영하던 당시에는 주변에 이렇다할 강적이 없었다. 수많은 민족이 치고 받으며 성장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인더스 문명은 주변과 지리적으로 차단되어 고립되어 있어 전쟁이 많지 않았고 강력한 군대도, 무기도 그래서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합법적 폭력-공권력이라는것이 외적을 위해서만 필요한것일까?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기 시작하면 집단간 전쟁이 증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일종의 인문학적 상식(!)아닌가? 인더스 문명의 거대한 유적으로 볼때 이 사회는 충분한 잉여가 형성되기 시작한 생산력 풍부한 사회였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내부의 분쟁, 범죄자 집단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서도 공권력과 무장은 필요한것 아니었을까. 



인더스 문명 유적에서 많이 확인되는 clay ball. 이를 방어용 무기로 보는 시각이 있다. 

군대가 없었다면 경찰력은 어떨까? 최소한의 질서를 위해서는 경찰력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경찰력이 존재했다면 범법자를 말로 제압했을까? 최소한의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을까? 


평화로운 인더스 문명? 

이에 대한 설명도 물론 있다. 

인더스 문명에는 앞에서 설명했던 것 처럼 공동묘지를 발굴한 유적이 드물지 않게 있다. 

이 인더스 문명 공동묘지를 조사한 것 중 하나가 우리 연구진이 데칸대와 함께 조사했던 라키가리 묘지이다. 

그런데 우리 조사 구역을 포함하여 그 동안 발굴 된 하라파 등의 유적지의 인골에서는 생전의 부상 흔적이 발견되어 보고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부상 흔적은 일단 폭력에 의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판단되어 인더스 문명이 종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폭력이 전무한"사회는 아니었을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부상의 흔적은 "구조화된 폭력 (공권력 등)"에 의한 것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인더스 문명이 종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완벽히 평화로운" 사회만은 아니었고 뚜렷하지는 않지만 다른 문명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구조적인 폭력"은 여전히 존재했던 사회라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뼈에 남아 있는 폭력의 흔적"이 단순한 개인적 "사투"의 결과였을 가능성도 어쨌건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인류학적 보고가 인더스 문명 사회는 설사 경찰력 같은 공권력이 엄연히 존재하던 구조화된 폭력에 기반한 사회라는 증거가 된다고 해도 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무기가 드물고 전쟁의 흔적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희안한" 사회라는 설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연구진이 발굴했던 라키가리 유적에서 수습 된 인골과 그 인골이 발견된 라키가리 유적 도면 (아래 그림 BR12). 

머리뼈에는 생전에 입은 함몰골절 치유흔이 확인되었다. 

이 사람이 왜 머리에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종의 폭력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은 시나리오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해도 물론 이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권력 (군대, 경찰)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사적 분쟁의 결과에 불과한 것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이건 인더스 문명이 생각만큼 완벽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회만은 아니었고 어쨌건 여기도 서로 간 폭력에 의해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하던 평범한 사회였을 수 있다는 작은 증거일 수 있겠다. 

우리의 이 보고는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Reports에 출판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평화로운 인더스 문명 사회는 최후에 어떻게 되었다는 것일까? 

아직도 지구상 대부분의 지역이 문명의 세례도 받지 못하던 기원전 2천년기 후반. 이 문명은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문자 기록이 없으므로 도대체 왜 이 문명이 사라졌는지.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인더스문명 유적에서 나오는 인장들. 도장에는 문자로 보이는 도형들이 그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해독 불능. 자신 있는 분은 한번 도전해 보시길. 이 문자가 해독되면 샹폴리옹 못지 않은 업적을 인류사에 남기는 것이니. 

마치 이스터섬의 석상을 만들어 내던 문명이 왜 소멸했는가에 대한 이유가 분분한 것처럼 인더스문명의 소멸 원인에 대해서도 혹자는 그 이유로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고 혹자는 내부 분쟁을 이야기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인더스 문명은 천천히 그 문명의 중심이 전원풍의 농경문화로 이행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는 외부 충격없이 자연스럽게 문명이 해체되었다고 보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중 가장 많이 거론되고 정치적 폭발력도 강한 설명이 바로 "아리안 족의 침략"에 의해 인더스 문명이 망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은 대개 오늘날 인도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Vedic culture는 바로 외부로 부터 침투한 아리안 족이 들고 들어온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아리안 족은 인도-유럽어족이므로 이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원주민이 꽃피운것이 인더스 문명이며 이는 본질적으로 폭력을 수반한 아리안족의 베다문명과는 결을 달리하는 성격의 평화로운 문명이었다는 시각이다. 

인도 유럽어족의 이동. 흑해 주변에서 일어난 인도-유럽어족의 일부는 서쪽으로 진출하여 유럽인의 기초를 이루지만 일부는 인도아대륙으로 들어온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인도사에서 베다 문명을 이룬 사람들로 이들에 의해 인더스 문명이 파괴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 아이디어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나치즘이다.  

인도에는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인더스 문명을 호전적인 아리안족이 무너뜨리고 오늘날의 베다 문명을 성립시켰다고 하는 주장이 꽤 강하다. 이 주장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는 단순한 고대사의 영역을 벗어나 오늘날 현대 정치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 하나에 나치즘, 전체주의, 민족주의, 순혈주의 등등 오늘날 인도사회를 들끓게 하는 다양한 논쟁들이 다 담겨 있다. 


폭력이 결핍한 이 찬란한 고대문명이 왜 무너졌는가 하는 이유는 이처럼 아직도 전 세계 학자들의 영원한 떡밥이다. 

인류 문명사의 발전을 간단히 도식화하여 이해하는 데 익숙한 우리로서도 한번쯤 깊이 숙고해 볼만한 이야기이고 디테일로 들어가면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베리에이션을 가지고 있는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학자들을 흥분시키는 이런 논쟁 주제에 앞으로 우리 나라 역시 후진들이 많이 뛰어 들어 난장을 펼쳐 주기를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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