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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인더스문명은 평화로왔던 지상천국인가 (5)

by 초야잠필 2019.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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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더스 문명 도시 유적에서는 공공적인 성격이 강한 citadel 구역과 사람들이 거주한 lower town이 있으며 후자는 매우 균일한 크기의 거주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어 일견해서는 개인간 정치경제적 우위를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 다시 쓸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인더스 문명권에서 "아마도 정치적 권력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묘사했을것이라고 판단하는 유물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래의 흉상이다. 


인더스 문명에서 유명한 "Priest-King".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과 왕의 성격을 한몸에 가지고 있는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인더스 문명 도시의 권력 정점에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라고 추측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현재까지 인더스 문명 주인공의 살아 생전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몇개 안되는 유물의 하나로 가히 세계문화유산급. 


하지만 필자가 기회 되는 대로 이야기 했듯이 인더스 문명에는 왕릉이나 정치적 권력자가 자신의 위상을 강조하는 무덤이나 기념물이 현재까지 "전혀" 발견 된 바 없다. Priest-King이 실제로 인더스 문명 그 도시에 존재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설사 존재했다 치더라도 그는 다른 문명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군주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부강한 문명을 한손에 쥔 사람이라면 당연히 따라 나올만한 징후 (무덤같은 거대 조형물)이 전혀 발견된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그리 흔히 보이는 거대 분묘가 인더스 문명에는 없다. 한제국의 일개 후에 불과했던 사람의 무덤도 이렇게 거대한데도 (마왕퇴 무덤). 


사람들 사이에 가진 부와 권력이 매우 균등했었던것 같다는 느낌은 인더스 문명 유적의 무덤을 파보면 보다 확연하다. 

우리 연구진이 발굴했던 라키가리 유적에도 공동묘지 구역이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중요한 경험이 축적되었다. 


본 연구진이 발굴했던 라키가리 유적 공동묘지. 발굴 한 무덤에서는 빈부차가 확연하지 않았고 거의 비슷한 형태의 무덤만이 발견되었다. 


라키가리 유적에서 발굴한 무덤들. 대부분 무덤이 이와 비슷했다. 토기 수량에는 차이가 좀 있었지만 다른 무덤을 압도하는 수준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고 거의가 비슷비슷한 크기였다. 위 아래 그림의 무덤처럼 무덤 벽 한면에 벽돌로 보강한, 나름 멋을 낸 무덤은 다수 확인되었다. 다른 인더스 문명 유적에서 발견한 무덤 보고서를 봐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 인더스 문명 무덤 유적들에 관한 한 개체간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좋다. 이들은 모두 "평등한 시민"이었을까? 아니면 "생전에는 다른 사람을 압도할 만한 권세를 누렸지만 죽을때는 비슷한 모양으로 묻힐수 밖에 없는 사회적 강제가 있었던 것일까. 


이런 딜레마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인도 학계에 많았다. 


우선 인더스 문명 대도시의 지배자는 동시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지배자와는 다른 종교적 기술자 집단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듣기로는 초기 불교의 승가(sangha)와 같은 공동체와 유사한 집단이 이 시대에 이미 발생하여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자세한 것을 다루기에는 내 지식의 깊이가 얕다. 

부처님 시대의 이 종교 집단 비스무리 한 사람들이 인더스 문명 도시의 주인공이었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더스 문명의 평범한 사람들로 실제 지배자들은 후대의 베다 문명에서 그랬던 것 처럼 화장했을 것이다. 화장을 했으니 무덤은 당연히 없다. 공동묘지에서 그야말로 평범하고 균일한 성격의 무덤이 나오는것이 곧 계급사회로서의 인더스 문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더스 문명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은 인더스 문명 주인공이 아니라 여기 이주해온 외국인들 (그러니 화장을 안하고 매장을 했을 것이다) 라고 보는 극단적 주장도 있는가 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결국 인더스 문명은 베다 문명의 요소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던 셈이 되겠다. 



인도 바라나시의 화장 풍경. 인도인들 중에는 이런 화장 풍습이 베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인더스 문명 시대에 이미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할 만한 물질적 증거가 나온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김용준 박사 반론이 그럴듯 하다. 


"상류층 사람들은 화장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무덤이 없다. 그건 좋다. 그렇다면 화장 한 뼈를 담아둔 그릇이라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인더스 문명권 유적에서는 그 화장한 뼈를 담아두는 골호도 거의 나온 것이 없는 모양이다. 



최근 과학잡지 New Scientist는 인더스 문명은 과연 평화로운 지상천국이었는지. 이를 다룬 기사를 펴냈다. 인더스 문명은 인류가 꿈꾼 유토피아였는가? 완벽한 사회였는가? 현재로서는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연구자들 사이에 꽤 뜨거운 학술적 주제이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이 논쟁에 뛰어 드는 이가 많이 나오기를. 


다시 필자와 신데 교수, 김용준 박사가 술을 마시며 대화하던 라키가리 유적에서의 첫날 저녁으로 돌아가자.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 인더스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신데교수에게서 들은 나는 질문했다. 


"평화롭고 평등하지만 고도의 기술을 보유한 문명-?. Marx가 이야기 했던 이상주의적 공산주의 세계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세계가 인류사에 존재가 가능했을까? 무려 4,500년 전에-."


신데교수는 "아니. 그건 아니고" 라고 서둘러 이야기 하고 말을 맺었다. 


하라파 사람들은 차이 비슷한건 마셨을까? 어느 인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이 한잔.


그건 아니고 라면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더 없었고. 

술이 그 후에도 몇 번인가 더 돌았고, 

인도와 한국의 무덤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가 따라 나왔다 (무덤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라니-.)


내 기억으로는 그날 그 후에 인더스 문명에 대해 이야기가 또 더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完) 




인더스 문명은 어쩌면 스머프들이 만든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은 공산당 (?) 스머프의 퍼레이드 모습. Priest-King은 어쩌면 파파스머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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