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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례12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5)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사실 주자가 회곽묘를 창안하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주자가 살아있을 당시 이미 그가 살던 중국 강남 땅에는 회곽묘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안 알려졌지만 중국쪽에도 우리와 같은 회곽묘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회곽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요장묘浇浆墓 혹은 삼합토 요장묘三合土浇浆墓라고 부른다. 이 무덤이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것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북송대에 속한다. 주희가 남송대 사람이므로 이 무덤은 주자가 생존하던 당시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셈이다.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역도 주희가 살던 양자강 일대로 내가 안다. 중국 쪽 자료에서 이 무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면 우리 회곽묘 만드는 방법과 .. 2019. 5. 17.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4)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필자 주] 오늘 글에 있는 회곽묘 명칭에 관련해서는 사실 정리가 좀 필요한 상황인데 일단은 회곽묘로 통일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추후에 명칭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자주 발견되는 조선시대 회곽묘는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우리나라 매장 전통이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조선시대 들어와 모종의 이유로 우리사회에 "갑자기" 이식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회곽묘 비슷한 것이 우리나라에 없었다는 의미인데. 이 무덤이 나오기 전에는 그렇다면 어떤 무덤이 쓰였을까? 여러가지 형태의 무덤이 고려시대에도 뒤섞여 만들어 졌지만 그 중 지배계급이 즐겨 쓰던 무덤양식은 "석실묘"였다. 여주 상교리 .. 2019. 5. 14.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3)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각설하고. 여기서 오페르트의 이야기를 좀 더 보자. 오페르트 도굴은 사실 자기들끼리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 천주교도와 신부가 깊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 도굴과정에서도 현지인 도구를 빌려했다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은 해야 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조선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인즉-. 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에 관여했다는 혐의가 있는 페롱신부. 오페르트가 대원군에게 보냈다는 글에 "남연군 묘를 도굴해 개항 시키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페롱신부의 평소 지론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페롱신부는 군사작전으로는 조선을 개항시킬 수 없고 좀 더 유화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 2019. 5. 10.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1)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필자가 조선시대 미라로 초창기 논문을 낼 때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도대체 왜 미라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조선시대 미라는 보존상태가 매우 탁월하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뭔가 인공적인 방부처리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중국에서 발견되는 미라-한대 마왕퇴라던가 송-명대의 미라-를 보고 조상들이 뭔가 비전의 방법으로 처리한 결과 시신이 썩지 않고 미라가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도 조선시대 미라가 발견되면 관 내부에는 물이 고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중국 마왕퇴의 경우도 그랬다고 한다. 나중에 따로 쓸 기회가 있겠지만 중국인들은 마왕퇴를 처음 발굴했을때 잘 보존된 2000년 귀부인 모습을 보고 놀랐고 다.. 2019. 5. 3.
[예고]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우리 조상 분 들은 왜 조선시대 무덤 안에서 미라가 되었을까? 주자가례와 미라에 관한 이야기-. 다음주 금요일 (5월 3일) 부터. 기대하시라-. *** following article ***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1)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1)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필자가 조선시대 미라로 초창기 논문을 낼 때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도대체 왜 미라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조선시대 historylibrary.net 2019. 4. 29.
이성계의 장송의례와 수릉壽陵 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 2018.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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