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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athology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4)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필자 주] 오늘 글에 있는 회곽묘 명칭에 관련해서는 사실 정리가 좀 필요한 상황인데 일단은 회곽묘로 통일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추후에 명칭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자주 발견되는 조선시대 회곽묘는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우리나라 매장 전통이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조선시대 들어와 모종의 이유로 우리사회에 "갑자기" 이식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회곽묘 비슷한 것이 우리나라에 없었다는 의미인데. 이 무덤이 나오기 전에는 그렇다면 어떤 무덤이 쓰였을까? 여러가지 형태의 무덤이 고려시대에도 뒤섞여 만들어 졌지만 그 중 지배계급이 즐겨 쓰던 무덤양식은 "석실묘"였다.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상류층 무덤을 석실로 짜서 쓰던 전통은 조선 개국후에도 한동안 지속 되었다고 한다. 세조가 죽고 새로 즉위한 예종 즉위년의 아래 기사를 보면 명화하다. 


"고령군 신숙주(申叔舟)·능성군 구치관(具致寬)·상당군 한명회(韓明澮)·좌의정 박원형(朴元亨)·우의정 김질(金礩) 등이 아뢰기를, '선왕(先王)께서는 모두 석실(石室)을 썼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유명(遺命)으로 쓰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는 스스로 억제해 줄여서 백성의 폐(弊)를 덜게 함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능침(陵寢)의 견고함은 석실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석실이 아니면 명기(明器)·복완(服玩) 등의 물건을 간직하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이제 전지(傳旨)를 내려 석실을 쓰지 못하게 하시니, 신 등은 속으로 참을 수 없어서 감히 계달합니다. (高靈君 申叔舟、綾城君 具致寬、上黨君 韓明澮、左議政朴元亨、右議政金礩等啓曰: "先王皆用石室, 而大行大王遺命勿用, 是自抑損, 以祛民弊也。 雖然陵寢之固, 無如右室。 若非石室, 明器、服玩等物, 藏之亦難。 今乃下旨, 勿用石室, 臣等不忍于懷敢啓)""


하지만 예종은 "세조의 유명"이라는 것을 이유로 세조가 묻힐 "광릉"을 지금까지처럼 석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회곽묘로 조영하게 하였다. 세조의 광릉이야 말로 조선시대 왕릉 중 최초로 조영된 회곽묘이다. 


세조가 묻힌 광릉. 조선시대 왕릉 중 최초로 만들어진 회곽묘이다. 이보다 이전의 조선왕릉은 모두 석실로 조영되었다.


이렇게 이전까지 즐겨 쓰이던 석실묘를 밀어내고 회곽묘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묘제로 채택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주자가례"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조선이 건국 된 후 개국 주체인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나라답게 지배계급의 묘제도 성리학 의례에 충실한 것으로 바꾸고자 끊임없이 시도하였는데 이에 가장 적합한 묘제로 선택된 것이 바로 주자가례에 기술된 방식 대로 축조된 회곽묘였다.  


회곽묘가 주로 발견된 지역과 그 구조. 주자가례에서 지시한 방법 그대로 만들어졌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이 중으로 된 목관 바깥에 두꺼운 회벽이 만들어져 외부의 침입을 막는 구조이다. 


사실 조선이 건국 된 후 추진 된 다양한 의례의 개혁은 회곽묘를 채택하는 것과 같은 단편적인 부분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건국주체인 사대부들은 조선 초까지도 농후하게 남아 있는 불교의식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당시 통용되던 의례 전반을 뒤집어 엎는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삼년상의 준행, 가묘의 설치, 친영례 등 조선 초까지도 한국사회에 전혀 관철되지 못한 이른바 고례古禮들은 조선사회가 점점 orthodox한 유교사회로 진화하면서 사회 전반의 표준적 의례로 자리잡게 되었다. 


친영례. 신부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전통 혼례 방식을 주자가례에 따라 비판하며 성립된 유교적 의례. 이 의식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전통의례"라는 것이 얼마나 인위적 절차를 거쳐 성립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전통의례"란 어떤 면에서는 주자가례가 구현하기를 꿈꾸던 "의례"일뿐 이런 의례가 정말 역사상 어떤 시점에 있기는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논리적 추론의 결과에 불과한데 이것이 과연 한국의 전통의례 자리를 석권할 수 있는 것일까. 가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조선시대 장례 풍습 개혁의 하나로 진행된 회곽묘의 도입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개혁의 전범이라 할 주자가례에 기술해 놓은 "이상적인 무덤"을 실제로 축조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당시 조선 사회에 그야말로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 풍습은 중국 강남지방에서 몇백년 전 준행되던 것을 주자가 채록하여 가례에 도입하였으므로 이런 무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보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중국에서 회곽묘를 만들고 있던 기술자가 초빙되어 만들어진 것도 아닌 만큼 우리나라에서 주자가례에 따라 만들어진 회곽묘는 실제 축조기술자의 노하우 전수에 따라 전승된것이 전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예를 들어 2019년 현재 프랑스를 간 사람이 에펠탑을 보고 왔다고 하자. 그 사람이 에펠탑은 이러이러하게 생겼고 이러이러하게 만들었다더라, 하는 프로토콜 한장을 달랑 전해 주었는데 그 프로토콜만을 보고 우리가 골똘히 고민하여 한국땅에 에펠탑을 실제로 만드는 과정. 그것이 바로 회곽묘가 한국에 출현하게 된 사정과 거의 비슷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회곽묘를 처음 이땅에 만들려고 했을 때 달랑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주문공가례에 "무덤을 만들려면 이러 이러하게 만들라"고 적혀 있는 프로토콜 한 장-. 그것도 극히 소략하여 읽으면 읽을 수록 더 헷갈리는- 그런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록이 전부였다. 


이제 오직 이 단순 소략한 프로토콜을 유일한 지남으로 삼아 조선 사대부들은 그들의 이상적인 무덤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계속) 


조선시대 회곽묘가 주자가례에 얼마나 충실하게 따라 만들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그림. 주자가례에 실린 그림 그대로의 유물이 회곽묘에서 나오는 경우가 이 처럼 많다.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