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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개간, 산림파괴, 말라리아 (5)

by 초야잠필 2019.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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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이번 연재에서는 지난 연재와 달리 의학적 내용이 많이 들어가 좀 지루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니 지루하셨더라도 앞의 내용을 이해 하는것은 꼭 필요하다. 


앞에 쓴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리나라는 19세기 말 말라리아 감염률이 엄청나게 높은 상태였다. 


둘째는 농사-개간과 수리 시설 확충이 진행할 수록 말라리아 감염률은 높아진다는 현대 의학 보고가 있다. 


이 두 가지이다. 


이제 우리 시선을 19세기 말, 알렌이 목격한 구한말을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후기 상황을 살펴보고 앞에 이야기한 결론들과 조합해  말라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먼저 이번 회에 쓸 내용들에는 큰 신세를 진 책이 있어 먼저 이를 소개하고 시작할까 한다. 


김동진 선생이 쓴 《조선의 생태환경사》다. 



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저. 푸른역사. 


나는 김동진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이 책을 우연히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내가 그동안 지닌 조선사회에 대한 몇 가지 의문에 대해 중요한 해결의 열쇠를 준 책이 바로 이것이다. 아래에 써갈 내용은 상당부분 김동진 선생 책에 근거가 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김 선생의 《조선의 생태환경사》에서 묘사된 조선시대 후기의 우리나라 사회의 모습은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앞서 앞서 밝힌 바 현대 의학이 밝힌 "말라리아 감염에 매우 취약한 사회"에 매우 근접해 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선생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15-19세기 (늦게는 20세기까지도) 격렬한 생태환경의 변화- 그 와중에 있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써보면 개간, 화전개발, 수리시설 확충 등 농업 발전과 관련된 격심한 변화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후기에 대한 선입견-매우 무기력하고 생산활동이 지지부진하여 끝내 식민지로 전락 했던- 과는 매우 달라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개간의 부분을 보면-. 


선입견과 달리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논과 밭이 만들어 진 곳은 넓은 평야지대가 아니라 간단한 시설만으로도 샘이나 흐르는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할 수 있는 지역, 곧 큰 산 바로 아래의 산자락 들이었다고 한다. 



청동기시대 최초의 논이 만들어 진 곳은 이 디오라마에서 보듯이 산 계곡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 곳은 가장 간단한 작업으로도 논에 물을 쉽게 댈 수 있어 최초의 논농사가 시작되기에 적합하다. 선입견과 달리 대평원 지역은 오히려 초기 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농업박물관 장) 



반면 우리가 곡창으로 인식하고 있는 넓은 평야지대- 예를 들면 호남 평야 같은 곳은- 예상과 달리 상대적으로 늦은 시대에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이런 대평야지대를 곡창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여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된 수리 시설이 필요한데 이러한 작업이 최근까지도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김동진 선생 의견에 따르면 논이 산자락을 떠나 평지로 안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를 지난 시대였다고 한다. 


이는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을 분석하면 알 수 있는데-.  


세종대 농사기술을 기술한 이 책에서 개간 집중 타겟이 되었던 지역은 다름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초목, 고인 물과 수렁을 특징으로 하는 소위 "무너미"라고 부르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초기 논이 자리잡은 산자락 아래 논과 달리 평야의 벌판에서는 논을 채울 수 있는 물을 쉽게 구하기 어려웠다. 


이 무너미 개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논밭에 물을 댈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보"와 "저수지"로 상징되는 수리 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저수지"보다 "보"가 무너미 개간을 위해서는 더 유용한 수리 시설로 이용되었다.)  흐르는 개천을 막아 주변 무너미로 물을 흘려 보내는 "보"야 말로 이 시대 가장 유용한 수리 시설이었다.  


아래 표를 보면 16~18세기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수리 시설이 새로 건설되었는지 알 수 있다. 묵은 "무너미" 땅을 개간하려다 보니 조선 사회는 15세기 이후 수리시설을 엄청나게 확충해야 했는데 그 결과가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것이다. 특히 "보"는 엄청난 숫자가 만들어져 1808년 《만기요람》 증언에 의하면 경상도에만 무려 1,765곳에 달하는 "보"가 운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무너미 땅은 배수와 수리 시설만 적절히 이루어지면 쉽게 벼를 재배할 수 있는 논으로 바뀔 수 있었으므로 노동력이 투입되어 새로운 수리시설이 지원되자 조선 왕국의 경작지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6-19세기 수리시설의 양적 변화. 19세기 초가 되면 이전에 비해 전국적으로 수리시설이 급증한것이 보인다. 하삼도가 수리시설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경상도 지역이 특히 많이 증가되었다.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조선시대 모내기 풍경. 농업박물관 


하지만 17세기에 접어들자 무너미 개간도 점점 한계를 드러내어 남아 있는 땅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다음번 개간 타겟으로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산지- 화전이었다. 김동진 선생 말에 따르면 전국 삼림지대에서 화전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였고 처음에는 산자락에서 시작된 화전이 나중에는 산 정상까지 전개되었다. 


숲에 불을 질러 경작지로 바꾸는 상황이 속출했고 화전을 따라 사람들이 산 꼭대기로 옮겨 들어가 사는 경우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굵은 선이 화전을 의미하는데 17세기 이후 증가세가 뚜렷하다.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그 결과 17세기 이후에는 조선왕국 전역이 경작지로 가득차게 되었다. 산지까지 개간되어 "단 한 곳도 노는 빈땅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660년 (현종 1년) 남아 있는 공식적 보고로는 "크고 작은 산골짜기 중 7-8할은 화전이 되었다"라고 한다. 


17세기 말 죽령 상황에 대해 "10여년 전에는 수목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했는데 지금은 나무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다. 화전이라는 것이 그것들 모두를 불태워 버린것이다" (《승정원일기》: 김동진 선생 위 책에서 전재; 김태식 선생 역시 일전에 이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서 이중환의 택리지를 인용해 17세기 중반 이후에 조선 산림이 황폐화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같은 증언이다.) 


18세기에 들어가면 강원도 깊은 산도 모두 개간되고 오대산까지 화전이 침범해 들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호랑이가 사는 지역까지 사람들의 개간이 밀고 들어가던 것처럼 심지어는 오대산 실록사고 근방까지 화전이 출현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 시기 얼마나 화전이 전국적으로 흥했는지 알 수 있다. 




일제시대 화전의 분포. 조선시대에도 거의 비슷하였으리라 본다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안동 지역의 경우에는 양안에 등재된 원래 경작지보다 화전으로 창출된 경작지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고 하며 18세기 중엽 전국 8도에 양안에 등재된 땅이 134만 결인데  이 중 50-60만 결 정도가 화전이었다고 한다. 


정부가 파악한 땅 절반이 새로 개간한 화전이었던 셈이다. 


19세기 초 정약용 역시 《경세유표》에서 평지의 땅과 화전 면적이 거의 비슷하다고 했던 것을 보면 19세기에 이르면 전체 경작지의 절반이 화전에 의해 창출된 산에 있는 농경지였던 셈이다. 




정약용이 본 당시 화전과 평지 농경지 비율. 둘이 거의 비슷한 정도이다.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알다시피 화전개간이란 원시림을 축소시킨다. 


김동진 선생 말에 따르면 14세기 중엽까지도 한반도 전역에서 원시림을 찾는 것은 힘들지 않았을 것으로 보지만 그 후 산에 있는 나무의 양은 화전으로 계속 줄어들어 1910년이 되면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한반도 임목축적 변화. 17-19세기는 자료가 없지만 15세기에서 20세기 사이 임목축적이 급감한것을 알수 있다.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산에 많았던 활엽수가 소나무숲으로 변해간 것도 15-19세기 사이라고 한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사실은 15세기 이후 엄청난 개간과 화전이 낳은 최종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살아 남은 소나무를 흉년이 들면 이번에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마땅한 연료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은 얼마 안남은 산의 나무까지 싹싹 긁어가 불을 때었는데 문제는 이 시기 한반도 인구가 폭증하여 그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건축물에 사용될 질 좋은 목재는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희귀해져갔다. 




원래 활엽수가 많았던 것이 침엽수림으로 교체되는 한반도 상황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산에서 나무가 사라지는 것은 좋은 목재도 귀해졌지만 필연적으로 산사태와 홍수를 낳았다


《정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산중의 수목은 한번 기르려면 거의 100년이 걸리는데 곳곳이 벌거숭이가 되어 모래와 돌이 쓸려 내려가고 있습니다"




독립문 주변. 헐벗었다. 


이러니 무너미 개간과는 달리 화전개간에 대해서는 국가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위해 개간할 새로운 땅을 찾아 화전까지 치달렸지만 이제 그 정도가 지나친 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663년 (현종 4년) 한 관료는 "화전의 폐단이 끝이 없고 화전이 없는 곳이 없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또 다른 사람은 "높은 산의 울창한 숲을 멋대로 불질러 태우는 바람에 100년 동안 기른 것이 한번에 소진되고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북한산 주변. 나무가 안보인다 


18세기-19세기 초반 서울을 묘사한 아래 시를 보자. 


화전[火田]


산골 백성 화전에서 이익 구하니  峽氓利火田

뭇산 꼭대기까지 모두 개간됐네   闢盡衆山巓

절벽마저 남겨진  땅이 없어        絶壁無遺土

잇닿은 봉우리엔 밤새 연기나네   連峯起宿煙

단지 등성이 나무 약간 남아        只餘循脊樹

겨우 바위와 시냇물에 걸렸네      猶限掛巖川

밭 가는 이들 모두 넘어질 듯       耕者渾將倒

멀리 봐도 오싹한 듯 하네           遙看覺凜然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 중에서. 번역은 약간 손질했다. 더 정확한 의미 파악과 세밀한 번역은 추후를 기약한다.)


이것이 19세기 초반. 우리나라 산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19세기 초가 되면 당시 한반도 자연 생태환경 조건은 오늘날 의학계에서 말라리아 감염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여러가지 상황과 매우 근접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개간이 이루어졌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었고 산림은 화전으로 남벌되었다.  


여기에 조선후기에는 전체 경작지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도 함께 주목할 만 하다. 


원래 전체 경작지에서 차지하는 그 비율이 높지 않던 논이 조선 후기 들어오면서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쌀을 선호하는 식습관 탓도 있다) 점점 늘어나 주작물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논이 늘어 난다는 것은 결국 고인 물이 늘어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 고인 물이 마르지 않도록 사람들이 계속 관리한다는 점에서 볼 때 어쩌면 자연상태 그대로의 늪, 웅덩이 보다 훨씬 모기가 번식하기 좋은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논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모기는 더욱 번성해갔을 것이다. 


19세기 말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는 우리나라의 학질-말라리아 감염 이유는 바로 지금까지 서술한 조선 후기 사회 모습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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