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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13

추사秋史와 일본도日本刀 섬이라는 지형상, 제주에는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하여 외국에까지 흘러가는 이가 적지 않았다.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겠지만,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 각국은 표류민에 상당히 관대해, 먹을 것을 내어주고 잘 대접한 뒤 고이 돌려보내주곤 했다. 우리의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제주에 머무를 때도 그런 과정을 거쳐 일본에서 돌아온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추사의 제자 박혜백朴蕙百이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났는데,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그가 사무라이들이나 갖고 다니는 일본도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수를 썼는지 그가 그 칼을 얻어와서 스승 추사에게 보여드렸다. 붓의 대가 추사와 '니뽄도'라니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있나 싶지만, 사실 추사는 일본 칼이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 2022. 3. 7.
자하 신위 vs. 추사 김정희, 침계梣溪를 쓴 두 거장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은 그의 호 침계(梣溪) 글씨를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받았다. 추사는 부탁받은 지 30년이 지나 써주었는데, ‘梣’의 예서체를 찾느라 그랬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달았다. 자하는 학고(鶴皋)의 부탁으로 썼다고 간략히 적어두었다. 학고는 김이만(金履萬, 1683~1758)이라는 분의 호로 워낙 알려졌는데, 생몰년으로 보면 맞지 않는다. 윤정현의 문집인 《침계유고(梣溪遺稿)》 권1 〈호루송별(湖樓送別)〉 이라는 시 마지막에 “병자년(1816, 순조 16) 추분날 학고 정현은 난석재에서 씀[丙子秋分日 鶴臯鼎鉉 書于蘭石之齋]”이라고 써 놓았으니, 윤정현의 호가 학고이다. 그런데 이름이 ‘定鉉’이 아니.. 2021. 10. 1.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vs.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같은 글인데, 구두점을 다르게 찍으니 묘하게 뜻이 달라졌다. 과연 어느 것이 추사 선생의 의도에 가까울런지. 2021. 8. 7.
제주추사관-小窓多明 2021.06.17.(목) / 제주추사관 소창다명사아구좌 小窓多明使我久坐 작은 창문에 많은 광명의 빛이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한다. 제주추사관은 생각을 좀 더 정리한 다음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기약은 없습니다. 생각날 때?!) 제가 생각하는 제주추사관은 세한(歲寒) 그리고 소창다명(小窓多明)입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면서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유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함, 두려움, 때로는 약간의 화도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추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글을 썼고 또한 추사체(秋史體)를 절정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제주추사관이 과천에 있는 추사박물관, 예산의 추사고택과는 다른 점이라 생각합니다. 제주추사관에서부터 추사유배지까지 이런 이야기가 잘 연결되어 있는지 천천히 다시.. 2021. 7. 1.
추사고택, 장가 잘가 불하받은 아빠찬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는 그랜드디자인 충남 예산 추사고택을 다음위성지도에 얹어보면 이렇다. 유의할 점은 전체 건물군 배치는 남향을 지향하되 동서축을 형성한다는 대목이다. 매표소와 화순옹주 홍문이라 표시된 오른쪽 중간이 전체 대문이라 그 방향이 동쪽인 까닭에 이 고택은 남대문이 없고 동대문으로 대문을 삼았다. 그 대문을 들어서면 앞마당에 ㄱ자 모양 사랑채가 나타나고 그것을 지나면 ㅁ자형 안채가 자리한다. 건물채 맨왼쪽 상단에 남북방향으로 길게 자리잡은 작은 건물이 사당이다. 건물군 중심인 사랑채와 안채는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었지만 남향이다. 이것과는 달리 남북 장축인 사당은 동향이다. 이 모형은 동쪽에서 서쪽 방향을 향한다. 동대문과 사랑채 안채 그리고 오른쪽 상단 귀퉁이 사당이 동향한다. 이 그림 역시 같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한 시점이다. 오.. 2021. 6. 7.
발명한 김정희와 박제가 《용재수필》 물린 자리 허전함을 메꾸고자 새벽에 뒷다리 잡기 시작한 후지츠카 책 역본이다. 원저 명성이야 익히 알려진 바이거나와 우리가 아는 추사 김정희는 '발명'되었다. 다시 말해 추사는 자연히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요 누군가가 필요에 의해 주물한 이미지다. 그 위대한 주물의 용범을 만든 이가 후지츠카요 그가 주물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후지츠카를 제대로 소화한 적이 없다. 저 일본어 원전은 무단 복제본으로 오래전에 구해 놓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후지츠카가 더욱 놀라운 점은 박제가 역시 저의 손끝에서 관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본인 후지츠카에게 김정희나 박제가가 종착역은 아니었다. 그가 추구한 바는 청대 고증학의 일본 열도 상륙의 양상이었고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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