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정책이나 사대주의 이런 게 아니다.
한국사 북방개척에서 정말 중요한 요점은 당시의 농업기술사다.
왜 통일신라는 북위 39-40도를 돌파 못했고,
이것을 14세기 후반에는 북위 41-43도까지 올라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 당시 윤관이 9성을 지었네, 김종서의 육진이 어떻고 하는 그런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수백년 전에는 성공 못했던 농사가 이 시대에는 기술적으로 달라졌는가,
이 부분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신라의 북방한계선은 그 당시까지도 쌀농사를 기반한 한반도 남부의 문명으로서는 한 번도 돌파해보지 못한 기술적 한계선이었기 때문에
김춘추가 사대주의자네 아니네 이런 거 하고는 상관없이 대개 그 정도쯤에서 북진은 머물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로서는 그 한계선 북쪽은 별개의 세계였다는 말이다.
벼농사를 북쪽으로 끌고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부족한 일조량에 적응한 종자가 개발되어야 하고,
벼농사를 위해 최소한의 수리시설도 해야 한다.
만주 벌판은 우리 땅이니까 회복하자고 하고 말 달려 올라간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사 지리적 공간의 북진은,
북진 정책 사대주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런 건 그냥 프로파간다에 불과하고,
실제로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는냐의 문제는,
새로 올라간 땅에서 벼농사를 성공할 수 있느냐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일본의 7-8-9세기 북방진출선.
아래 지도와 비교해 보면 한국과 일본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수준으로 북진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쌀농사에 기반한 경제구조의 양국은 북진하는데 있어 공통적인 기술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9세기말 일본이 도달한 북방영토의 경계는 우리 나라로 보면 대개 평양 바로 북쪽 정도 된다.
닫시 기술로는 쌀농사를 북쪽으로 끌고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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