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북위 41-43도 이야기를 해 보자.
한국사에서 북위 41-43도가 돌파된 시기는 조선초기다.
이 시기에 사군 육진이 개척되면서 두만강 압록강선이 확정되고 북위 41-43도 선까지 북상했다.
일본사에서 북위 41-43도 선이 돌파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대략 메이지유신 이후 북위 41-43도선의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메이지유신 시대에는 한국의 경우 청의 봉금 지대인 북위 44도선까지 올라가 벼농사를 시작하였는데,
19세기 후반이 되면 한국과 일본사에서 각각 북상한 지리적 한계는 거의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사에서 북진정책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문제와 결부된 농업 기술, 생산성의 문제다.
한국이 사대를 했건 뭐를 했건 그 땅에서 농사 지을 자신이 있다면
월경하면 목을 친다고 해도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간도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말이다.
정부에서 북진정책을 하겠다고 아무리 설쳐도 농업생산이 받쳐주지 못하면 윤관 9성이 그러했듯이 그 땅을 돌려줘야 했다는 말이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 구한말까지 한국민의 북방 개척사는
사대주의 북진정책같은 한가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농업기술사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많고 땅은 좁으면 새땅으로 건너가 농사짓는 사람은 억눌러도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의 야요이인들.
우리는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하러 간 한국인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 땅은 좁은데 사람이 바글바글 하면 새땅을 찾아 바다를 건넌 사람들.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들어간 농민들과 다를 바가 없다.
#북방진출 #북진 #북벌 #북방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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