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까무라상, 천 년도 더 전 옛 이야기를 그리다
1. 옛날 중국 진나라 때, 스님인 혜원법사와 시인 도연명, 도사 육수정 이 셋은 참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혜원법사는 여산 동림사東林寺라는 절에 머무르며, 절 앞을 흐르는 시내 '호계虎溪'를 건너지 않는 걸 철칙으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스님이 잘 지내는가 싶어서 친구 둘이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웠으랴.
혜원법사는 이야기에 취해 그만 냇물을 건넜다.
그러자 어디선가 범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깨달은 세 사람, 누구랄 것도 없이 껄껄껄 웃었다 한다.
이 장면, '호계삼소虎溪三笑'는 이후 유-불-도 세 종교 화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고사가 되었다.
2. '호계삼소'를 다룬 그림은 적지 않다.
하지만 딱! 떨어지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다가 이 그림을 만났다.
우리나라 사람 솜씨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야기할 거리가 있다.
존경하는 모 페친께서 일본인을 뭉뚱그려 "나까무라"라 하실 때가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린 분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까무라다.
그 이름 나카무라 후세쓰中村不折(1866-1943).
근대 일본의 서양화가이자 서예가로, 일본에서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삽화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비단에 그린 전형적인 동양화다.
서양화가가 동양화를 그렸다고?
3. 근대, 특히 동아시아의 근대는 지독한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일본만 해도 폐불훼석廢佛毀釋 같은 문화파괴가 벌어졌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당시를 산 사람들은 뼈에 박힌 전통을 모조리 내칠 수 없었다.
특히 예술가들은 고미술과 신사조 사이에서 둘의 장점을 어떻게 융합할까,
또는 전통 속에서 근대의 싹을 어떻게 찾아볼 수 있을까 고민해야 했다.
일본에서건 조선에서건 서양화가나 조각가가 붓글씨를 쓰고 동양의 미를 논하며, 골동품을 모으는 것이 결코 어색한 게 아니었다.
이 글 주인공 나까무라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도 서예가였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서예자료들을 어마어마하게 모았다.
그의 수집품은 오늘날까지 도쿄의 다이토구립 서도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았다.
4. 이 그림은 꽤나 해학적이라고 할까, 만화풍이라고나 할까, 보고 있으면 슬쩍 웃음이 나온다.
엷게 우려낸 먹으로 올린 산 아래 소나무 한 가지, 그 옆에 셋이 서 있다.
머리 깎은 혜원 스님이야 분명하지만, 지팡이 짚은 분이 도 선생인지 육 도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편집자주 : 지팡이는 도사의 표식이다. 따라서 육수정이다.)
하기야 그런 구분이 저들의 입가에 걸린 웃음 앞에서 무슨 소용이랴.
가볍게 그린 듯 하면서도 깊이가 남다르다.
화제 글씨는 나까무라 후세츠 특유의 필치인데, 그 뜻이 이 그림 그 자체이다.
三老同一咲 세 어른 함께 웃으시니
物我兩茫茫 물아가 다 아득하구나
月照清溪水 달은 맑은 시냇물 비추고
風散白蓮香 바람은 흰 연꽃 향을 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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