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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1476

헤이안쿄: 서기 800년 경 - 서기 1000년 경 서기 800년 경, 헤이안쿄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의 모습이다. 바둑판모양으로 구획된 조방제 모습이 확인된다. 이 헤이안쿄가 헤이안 말이 되면 어찌 되느냐. 1000-1200년 경의 헤이안쿄다. 이때가 되면 도성 서쪽 절반이 날라간다. 이 지역은 배수가 잘 안 되어 사람이 살기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왕성도 이 시기에는 원래 있었던 주작대로 북쪽 끝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쿄토고쇼 지역으로 옮겨간다. 처음 건립되었을 때는 건물이 없던 가모가와 동쪽에 거주지와 절들이 들어선다. 실제로 무가정권 세력자들은 원래는 헤이안쿄 영내가 아닌 가모가와 동쪽에 살았다. 조방제 도시구획?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몇백년만 지나면 다 사라진다. 쿄토는 지금까지도 서기 800년 당시의 조방제가 완연한 쿄토의 모습은 회복하.. 2024. 1. 19.
영감님들과 젊은이들의 분업 공부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영감님들은 괜히 논문 한 두 편 더 쓴다고 젊은이들 일거리 뺏지 말고,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하시기 바란다. 최신 기술로 프론티어에서 누비는 작업은 영감님들에게는 맞지 않다. 자신의 오랜 경험으로 큰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작업해야 하는데 필자 생각으로는 이것도 쉽지 않다. 젊었을 때 뭐라도 자기 분야에서 충분한 전문적인 경험을 쌓는 데 게을리한 사람들은 늘그막에 큰 그린 그림그린다고 해봐야 뭐가 나올 리 없다. 차라리 그런 경우에는 놀아라. 이미 큰 그림 그리기도 늦었고 뭐 한다고 돌아다녀봐야 방해만 된다. 반면에 젊은분들의 경우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그림 그린다고 이리 저리 섭렵하고 다니는 건 필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젊었을 때는 한가지를 깊게 파고.. 2024. 1. 19.
조선 막사발은 어디에서 왔는가 흔히 조선 막사발을 두고 무위 무념의 소산, 인위가 극소화된 자연적 미의 소산 등등으로 찬상하는 경우를 보는데, 무위 무념 자연적미, 인공의 극소화 이런 것이 조선중기 한국사에서 나올 수 있는 사상이 맞기는 맞는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나라 사상의 어느 구석에 무위 무념 자연, 인공미의 극소화 같은 흐름이 있었다는 건가? 이러한 흐름은 유교적 흐름이라기 보다는 외려 도교나 불교적 사상의 영향에 더 가깝다고 보는데 알다시피 조선은 여말선초에 불교를 이미 작살을 내놔서 이런 사상이 똬리를 틀고 나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본다. 막사발이 나오던 시기. 흔히 이야기 하는 바 무위 무념 자연, 인공의 극소화 등등 막사발과 관련된 아니. 그 그릇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좋다. 그 그릇의 제작과 직접 관련.. 2024. 1. 19.
당신은 확신할 수 있는가 이 막사발의 미가 16세기 후반 조선의 미에서 나왔다는 것을-. 필자는 이 막사발이 조선의 미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막사발이 한국의 자랑거리가 됐건 뭐건 이걸 적어도 한국에서 찬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보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국사 전체 흐름 안에 막사발을 안착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특히 당시의 시대적 흐름 어떤 부분에서 이런 그릇이 나올 수 있는지 이걸 규명해서 이 그릇 배경 설명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 이런 주장이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는 한, 물론 필자가 이런 주장한다해서 뭐 하나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필자는 이를 한국미술사의 일부로 인정할 수 없다. 2024. 1. 19.
조선의 사발과 센노 리큐千利休 조선 사발이 일본에서 톱스타가 된 데는 센노 리큐 [千利休, 1522~1591)의 와비차侘び茶 사상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스토리의 완결성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사발은 한국사에서 혜성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진 반면 같은 사발을 일본에 가져다 두면 센노리큐의 사상과 연결되어 일본의 후기 도자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사발은 한국의 미인가 일본의 미인가. 조선사발은 한국미술에서 다루게 되면 어째서 앞뒤 제대로 연결된 스토리가 없는가. 왜 그런 그릇이 나온 건지 설명할 수 있는 문헌 자료 하나 없는가.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사발을 선호한 사상적 배경이 스토리를 가지고 남아 있다. 이렇다면, 조선사발은 한국미술사인가, 일본미술사인가. 필자가 무식해서.. 2024. 1. 19.
대중이 만든 사무라이 정신 일본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의 하나가 사무라이와 그 정신이 아닐까. 그래서 스타워즈에도 사무라이 장수를 벤치마킹한 다스베이더가 뛰어 다니고, 동경국립박물관에는 전시실 좋은 구석에 니뽄도가 줄줄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사무라이 이미지는 사실 많은 부분이 에도시대에 창작되었다. 에도시대 이전, 가마쿠라, 무로마치, 그리고 전국시대 무장은 우리가 아는 사무라이들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와 태평기, 그리고 전국시대 군담소설류를 보면 그 차이가 많이 나타나는데 우선 겐페이 합전시대나 태평기 시대 무사들은 어느 나라나 있을 것 같은 무장으로 용감하고 신불의 가호를 비는 무장이지만, 일본 무사 특유의 분위기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일본 사무라이 특성의 많은 부분은 오히려 ..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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