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026 정조는 인문학적 천재인가 영화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학술논문에서도 그려내는 정조의 모습은 인문학적 천재다. 신하를 데려다 놓고 학생처럼 가르치면서 써먹는다는 이런 경향은 사실 그의 할아버지인 영조로부터 물려받은 (더 위로 올라가면 숙종때부터) 것이 틀림없는데, 군왕이 신하를 뽑아 놓고 학생처럼 가르치면서 유교의 도통의 계승자를 자처한다는 것이 정상인가? 공자이래 군왕이 도통의 계승자를 자임한 적은 중국이건 한국이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조는 정말 그렇게 뛰어난 인문학적 천재였을까? 정조의 인문학적 소양과 수준. 냉정히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는 없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조는 인문학적 천재도, 신하의 스승으로 자임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고 본다. 2023. 7. 20. 나라에 망쪼가 들었던 조선 말기 숙종 영조는 일단 제쳐두고, 정조 때부터만 따져 봐도 쓰잘데기 없는 토목공사를 몇 번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다. 수원 화성은 도대체 뭐하러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본다. 왕이 가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수도를 그리로 옮기려고 했다는건 화성 크기를 보면 택도 없는 소리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 겸사겸사 수원에 행차할 때마다 묵을 행궁을 지킬 성을 만들자고 지은 게 화성이었던 듯 한데 그렇다고 정조가 거기가서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정조의 이런 삽질은 정약용의 기중기로 미화되고 있지만 도대체 왜 이 성은 지었는지 자세한 속내는 오리무중이다. 화성을 건설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이런저런 것이 나온 것이 있지만 하나도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이 없다. 왕이 가서 살지도 않을 거면서 국비를 낭.. 2023. 7. 20.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법 어떻게 인구 3천만의 까막눈 국민이 사는, 제대로 된 자원 하나 없는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한국은 전통적으로 20세기 초반 망국에 이를 때까지도 국가의 사적 통제가 아주 강한 나라였다. 반면에 해방 이후 한국의 성장 전략을 보면, 국가는 외채를 적극 조달하여 이를 국가기반 산업 및 교육제도 등에 투하하고, 국가가 도저히 감당 안 되는 영역은 민간자본을 적극 유입시켜 나머지 구조물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략은 오천년 한국사에서 유례가 없는 방식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한국사에서 이례적인 이질적 측면이 매우 강한 역사인데 바로 사회의 운영자체가 20세기 이전의 방식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한국이 돈이 넉넉하고 팔아먹을 자원이라도 있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2023. 7. 19. 외채와 민간자본 한국자본주의 성장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땡전 한푼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외채와 민간자본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다. 일본이 제국주의 길을 걸을 때만 해도 일본은 없는 살림을 쥐어짜고 이따끔식 들어오는 전쟁 배상금 등으로 메꿔가며 아직까지는 추격 가능한 선진 제국주의를 추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이 해방이후 성장의 길을 추구할 때쯤이면 이미 후발 국가가와 선진국 차이는 이전보다 더 벌어져 있었고, 더 큰 문제는-. 정말 신생 대한민국에는 땡전 한 푼 없이 까막눈 국민 3천만이 하루 하루 먹고사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과 일본의 성장 전략의 차이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보다 외채와 민간자본 의존도가 훨씬 높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언론 표지를 장식하던 외.. 2023. 7. 19. 마지막 고고기생충 샘플 처리를 마치며 오늘 필자는 고고기생충 연구 남은 마지막 샘플 처리를 마쳤다. 이로써 지난 20년간 계속한 고고기생충학 검사 종지부를 찍는다. 물론 우리나라 고고기생충학연구는 앞으로도 오창석, 홍종하, 서민 교수에 의해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가 이제 직접 시료 분석에 참여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필자의 현장 참여는 고고기생충에 관련해서는 이제 이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남아 있는 논문 출판 2-3편, 그리고 단행본 2권 정도 집필이 남아 있지만 금명간에 필자의 고고기생충 연구는 완전히 끝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항상 든든한 동료가 되어 주었던 오, 홍, 서 교수님 제위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 또한 필자의 연구 마무리와는 상관없이 관련분야가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며 한국 고고학 발전에 기여할 .. 2023. 7. 18. 김구와 이승만: 신탁통치에 대한 오랜 의구심 해방 후 신탁통치안이 나왔을 때 이를 반대한 것은 오해에 기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탁을 주장했던 이승만 김구는 그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 당시 반탁은 전략적 오류라는 뜻일 터인데. 이 당시 신탁통치안 뉴스에 김구는 실제로 매우 격분했고 신중론을 펴는 송진우는 찬탁으로 몰려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승만과 김구가 신탁통치안을 반대한 것이 과연 오보 때문이었을까. 일본에 의해 조선이 해방되더라도 즉각 독립되지 않고 신탁통치가 시행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이 두 양반에 있어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다. 우선 조선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카이로선언 때, 조선의 독립을 규정하는 문구가 "즉각적으로 지체없이"가 아니라 "적당한 과정을 거쳐서"라고 모호한 표현이 .. 2023. 7. 17. 이전 1 ··· 202 203 204 205 206 207 208 ··· 33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