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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1475

올해 한국학계에 기고할 두 가지 논문 필자는 사람과 가축, 작물의 세계를 대통합할 거창하기 짝이 없는 꿈을 갖고 있다. 앞서 쓴 것 같지만 이런 움직임은 필자가 처음 제창한 것은 아니고,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축의 생물학적 역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필자는 이 주장에 농작물의 세계를 하나 더 더했다. 이러한 작업으로 올해는 두 개의 논문을 한국학계에 기고할 것이다. 첫째는 동아시아 양잠의 출현과 확산에 대해서이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돼지사육의 전개에 대해서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현재까지의 연구를 묶고 최신 유전학적 연구의 보고를 함께 묶어 보고하게 될 것이다. 2024. 2. 10.
100년이면 따라가는 양국사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류도 하고 치고 받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재미있는 것은 양국 격차가 아무리 벌어졌더라도 100년이면 따라간다는 것이다. 서기 7세기 후반-. 한반도의 삼국통일로 일본이 한국으로 부터 문화적 보급이 어려워졌을 때 이들은 잘 알다시피 대양을 건너 당나라로 바로 유학하는 길을 택했는데, 그 결과 평균적으로 견당선 두 척 중 한 척은 난파하였다는 것이지만, 반면에 서기 8세기 이후 나라-헤이안시대에는 빠른 속도로 한반도와의 격차를 좁혀-. 잘 알다시피 나라박물관에 가보면 8세기만 해도 일본은 한반도와 별 차이가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시대를 바꾸어 일본이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에도시대가 시작되자 조선의 문예 수준을 쫒아가는데 딱 100년이면 됐.. 2024. 2. 10.
대장, 중장, 소장의 기원 지금 한국군 (북한군 포함) 계급체계에서 대장, 중장, 소장 등의 명칭은 사실 그 기원이 일본 헤이안시대 율령체제의 영외관 (율령체제에서 시행되었지만 율령에서 규정되지 않았던 관위)에 있다. 이 시대에 고급 무장이 이름에 대장, 중장, 소장이 있고 이런 명칭은 전국시대를 거쳐 메이지시대까지 이어진 것이 구 일본군 계급 체계다. 한국 전통에서 보자면 대한제국 시대의 대장, 부장, 참장이라는 명칭이 더 맞는 것 같다. 한국은 대한제국 시대에는 대장, 부장, 참장의 명칭을 쓰다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전통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국 영향을 받아 장군이 소, 중, 대장이 아니라 지금처럼 4단계로 바뀌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미 건국 70년이 지났는데 이걸 지금 무리해.. 2024. 2. 9.
내가 있건 없건 잘 돌아가는 세상 자기 일에 대한 긍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없으면 세상이 망하는 줄 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당신이 더 잘 될 세상을 앞에서 막고 있었을 수도 있다. 젊은 친구들이 미덥지 않다고 하지만 그 친구들이 사실 당신 때문에 더 발전을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긴가민가 하다면 한 번 슬쩍 일년만 일에서 빠져봐라. 아마 그래도 잘 돌아갈 것이다. 그때가 바로 그 일을 접을 때다. 앞에서 자기가 가로 막고 있으면서 빨리 자신을 밟고 나갈 후진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 하지 마라. 한가지 위안은 뭔가 하면, 그렇게 정리하고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이 더 없을까를 찾아보면 의외로 다른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집착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 2024. 2. 8.
塚이라는 명칭은 타당한가? 우리 고분 중엔 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 있는데-. 塚이라는 이름을 이런 왕릉급에 붙이는 것이 타당한가? 필자는 문외한이라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塚이란 명칭에 대해서는 조금 고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일단 우리의 경우 塚은 규모를 막론하고 왕릉이나 왕족의 무덤이 아닌 무덤을 가리키고 있음은 왕조실록만 봐도 알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塚이라고 하면, 무덤이라는 일반적 호칭 외에 좋지 않은 의미로도 많이 붙인다. 대표적인 것이 미미츠카 耳塚 그리고 더욱 유명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카인 2대 관백 히데쓰구를 할복시키고 그 일족을 모두 죽여 묻었다는 畜生塚 혹은 悪逆塚이 있다. 이 경우 히데요시는 히데쓰구를 할복시킬 때 그의 문란한 사생활도 널리 선전하여.. 2024. 2. 7.
가정에서 분리해야 하는 추모, 제사의 문제 조선시대에 유교 가례가 관철되면서 이전까지 장례와 납골 관련하여 개인이 아니라 사찰에서 담당하던 의례가 가정으로 들어와 버렸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례가 관철되기 전에는 어른이 돌아가시면 모시는 의례와 행사는 대부분 사찰에서 진행되었던 것이 가례 이후에는 온전히 가정의 몫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전혀 가정에서 준비하는 의례가 아닌 추모행사가 한국에서는 온가족이 모여 가사노동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처럼 농경사회로 어차피 집에서 타작도 하고 밥도 하고 부침개도 부치던 시절에는 문제가 안 되었겠지만, 지금은 평소에도 밥을 집에서 잘 안 해먹게 되면서 온전히 명절 때 노가다로 추모행사가 남게 된 것이다. 가례 도입 이후 때 아닌 가내 가사노동의 형태인 조상추모행사로 변..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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