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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1837

東海道中膝栗毛가 전하는 에도시대 宿場 에도시대에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은 宿場에 묵어야 했다. 이들은 宿場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을까? 東海道中膝栗毛에는 이를 유추할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돈이 없는 시골뜨기 영감이 1인당 2백문을 달라는 여관비를 흥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 숙박비는 200문은 못낸다. 160문을 내겠다. - 대신, 목욕물은 미지근 해도 좋다. - 채소조림도 한접시면 된다. - 밥이랑 국도 6-7 홉 정도 먹을수 있으면 OK - 내일 길을 떠날때 도시락 꾸러미에 밥만 채워주면 된다. 다른건 없어도 된다. 이를 뒤집으면, 200문을 내면 宿場에서는, - 제대로 된 목욕물 - 두접시 이상의 채소조림 반찬 - 6-7 홉 이상의 밥이랑 국 - 조식 도시락에는 밥과 반찬. 이렇게 제공되었다는 소리가 될테니, 나쁘지 않은.. 2022. 4. 20.
일본의 매독과 東海道中膝栗毛 매독은 1492년, 신대륙발견과 함께 구대륙으로 전파된 이후 아주 짧은 시간에 전세계를 휩쓸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비교적 일찍 전파되었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이보다 느리다. 전세계를 누비던 세계무역의 확대와 매독의 전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개항이 상대적으로 늦은 조선이 매독에 상대적으로 늦게 노출된 것은 그런 의미가 크다. 흥미로운 것은 인류학적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일본의 경우, 20세기 이전 매독의 감염률이 엄청나게 높았다는 것이다. 매독은 만성화 되면 여러가지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뼈에 그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뼈에 남아 있는 어떤 흔적이 매독때문에 생긴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인류학적 연구가 상당히 축적되어 전세계적으로 많은 연구보고가 있었.. 2022. 4. 20.
발해- 동쪽으로부터의 위협 행정단위의 이름으로 부터 그 사회의 성향을 짐작할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발해가 딱 그렇다. 발해의 15부 중 동북부에 있는 4개부의 이름을 보자. 安邊府 東平府 懷遠府 安遠府이다. 4개부 모두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상적으로 두고, 羈縻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는 이름이다. 반면에 당나라와 신라쪽으로는 행정단위에는 그런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발해가 생각하던 主敵이 과연 어디었을지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하는 측면이 있다 (의외로 발해가 당과 일전을 불사했던 이유도 동북쪽 변경 정벌에 관련된 문제였다). 2022. 4. 19.
발해-상경용천부의 위도 건국초기 발해가 얼마나 험준한 지역에 자리 잡았는가 하는 것은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위도를 보면 알수 있다. 상경용천부의 위도는 일본 홋가이도 북부지역과 거의 같다. 최치원의 "謝不許北國居上表"에 이르기를-. 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孽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라 하여 "측천무후의 시기에 대조영등이 도망가 자리 잡은 땅을 황무지 언덕=荒丘"이라 묘사했던 것이 이해가 간다. 발해가 건국 초기 상경에 자리잡았던것은 당의 통제에서 되도록 멀리 벗어나려 했었던 것일테고, 그런만큼 위도가 높아 농사고 뭐고 거의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발해 오경이라는 부수도를 남쪽에 다수 두게 된것은 결국 그나마 그 판도 안에서 농사가 이루어지는 땅을 찾아 팽창해야만 했던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이 당시.. 2022. 4. 18.
정조는 개혁군주인가? 그리고 다산은? 조선시대의 소위 개혁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인물 중 도대체 어느 구석이 개혁적이라는 것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분들이 둘 있는데, 첫째가 조광조요, 둘째가 정조이다. 이 두 분은 내가 아는 한 성리학 원리주의자에서 단 한 발자욱도 이탈한 양반들이 아니다. 한 분을 굳이 더 추가해 본다면 다산도 그런 면이 좀 있다고 보는데, 필자가 지난 1년간 참여하는 강독회에서 다산의 논어고금주를 잔뜩 기대를 가지고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다산 경학이 개혁적이라면 도대체 어떤 구석이 그렇다는 것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분명히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의 지식이 얕아서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 수도 있겠는데.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오랫동안 항상 의심스러웠던 이야기를 적은것이니 양해 바란다. 정조.. 2022. 4. 17.
한국사는 왜 만주를 잃었는가 삼국시대에 당의 침입으로 한번 만주를 상실하고, 뒤이어 만주일대에 세워진 발해가 요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완전히 만주는 한국사에서 분리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사건에서 생각을 해방시킨 다음 아래 그림을 보자, 중국의 기후변동 도표이다. 한반도와 만주도 비슷하게 평균기온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본다면,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은 삼국시대 후반기와 통일신라시대 초반에 피크를 찍었다가 그 후 점점 추워지는 현상을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되면 농사를 제대로 짓는 한계선도 점점 남쪽으로 내려갈수 밖에 없다. 송화강유역에서 오곡 농사를 짓던 부여는 고려시대가 되면 그 농사꾼들은 모두 어디가버리고 사냥꾼만이 횡행하는 땅이 되어버렸을까? 이처럼 "농경이 후퇴"한 현상은 한국인이 만주땅을 잃었기 때문에 벌어진.. 2022.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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