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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향촌에는 잔반, 향리, 전호, 노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계층이 다른 지적수준을 가지고 존재했다.
이들 모두를 "농민"이라고 뭉떵그려 불러버리면 19세기 후반 상황에 대한 분석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실제로 동학군에는 양반계급도 상당히 많이 합류 해있었고 잔반은 부지기수였다.)
개인적으로는 19세기 후반,
소위 중인, 잔반, 향리, 그리고 상층 노비, 부유한 상인 중 국제정세에 밝고 한국사회의 침로에 대해 명확한 방향의식을 지닌 이들이 왕조 멸망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어야 한다고 보는데 실제로 바로 이 계층이 메이지 유신처럼 조선왕조 타도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발빠르게 국제정세에 대처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한국은 일본보다도 앙샹레짐의 타도가 이미 한 세대가 늦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의 "농민"이란 참으로 쉽고 간단한 개념인 셈인데, 이 시대를 "농민"과 "농민전쟁", 그리고 "수탈"과 "제국주의 침탈"로만 보고 분석하는 애들 만화영화 같은 설명으로는 19세기 후반에 대한 정확한 실체 분석, 그리고 당시 우리가 어떻게 했었어야 했는가를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본다.
19세기 말, 앙시앙레짐의 붕괴 이후 전망을 "농민에 의한 정권, 수탈의 분쇄, 제국주의 타도"로 간단하게 설정하니 분석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구한말이 그렇게 상황이 간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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